00023 「3-2 : 평온한 나날 (2)」 =========================
비가 오는 날. 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비가 왔기에 마을 밖으로 가는 사냥은 갈 수가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은 마을 입구를 지키는 경비 외에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괴물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이런 날씨에는 살고 있는 곳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괴물들이 감기가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만, 안 오니까 좋네. 난 살인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괴물의 존재를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놈들은 숲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여자들을 무참히 죽였으니까. 그런 놈들을 용납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걸 용서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괴물로 인해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잊고 싶지 않은 건 서서히 잊혀가면서, 잊고 싶은 건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란 것이다.
메이는 어머니인 로라를 돕기 위해 함께 나갔다. 방 안에는 혜린과 나, 둘뿐이었다. 나도 나가고자 했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대부분 집에 있고 큰 사건도 없으니 쉬고 있으라 했다.
하긴, 이틀 전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로라를 위해 특별 서비스로 엄청나게 무리했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똥을 싸버린 그 사건도 벌써 그저께 일이다. 진짜 시간 빠르다.
난 홀로그램 스크린을 정비하며 내 스테이터스, 파티 데이터, 아이템, 무기, 마법 등을 차분히 살펴봤다. 그야 당연하잖아. 난 이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됐고 그럼 이 세상에 무조건 적응을 해야 한다. 이미 어느 정도 적응은 했지만, 내가 가진 물자(物資)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며 살아남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이렇게 여러 가지 아이템을 정리하고, 코스튬 등을 정리하자니 엄마랑 아빠가 생각난다. 비록 빚을 주긴 했지만……솔직히 말하마. 안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 물론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다. 미쳤냐? 거기 가서 또 그 무한경쟁 시대에서 죽을 때까지 노예짓을 하라고? 난 그걸 스스로 원할 정도로 또라이는 아니거든?
하지만 적어도 부모님의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참 삭막한 시대군. 부모님이랑 같이 찍은 가족사진 한 장조차 핸드폰에 없다니.
이 세상으로 오며 핸드폰은 찾을 수 없었지만, 설령 찾는다 한들 가족사진도 없는 앨범을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슬퍼할 거라 느꼈다. 비가 오니 감상적으로 변한 걸까.
정리를 끝내고 혜린을 보니 그녀는 밖의 비를 보며 멍하니 있다. 그녀는 은색 비키니 세트를 입고 있었고 난 여관의 가운이다. 원래 입던 옷은 찢어지면 곤란하니 잘 개어뒀다. 뭐, 이런 차림으로 다닌다고 누가 욕하는 것도 아니고.
“왜?”
내가 보는 걸 눈치 채자 용건을 묻는다.
“아, 그냥. 좋아하나 봐. 비.”
“반대야. 정말 싫어. 여자는 비 별로 안 좋아해. 특히 생리 오는 날이면 죽을 맛이거든.”
참 리얼한 발언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여자들은 생리를 하나?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나. 안 온지 꽤 됐어.”
“뭐가?”
“……생리.”
……아, 그렇군. 임신했다는 뜻인가. 원래라면 속이 타들어가거나, 갑자기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느낌이어야 한다. 왜냐고? 부모가 된다는 건, 그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니까. 한 생명의 아버지가 된다는 건 너무나 엄청난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난 웃었다. 그리고 옛날처럼 ‘존댓말’로 말했다.
그녀가 이전부터 조용히 있던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뭐, 나도 몰랐던 건 아니었다. 스테이터스 파티에 있는 모든 여성 파티원은 현재 ‘임신’이라는 단어가 빛나고 있었으니까. 단지 실제로 이렇게 들으니 그녀 또한 많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알 바는 아니다만.
아기라. 섹스할 때는 그토록 많이 말한 단어였지만 막상 임신을 한 여자가 세 명이나 있으니 실감이 안 난다. 그들의 자궁(子宮)에서 생명의 요동을 치고 있는 아이들이 모두 내 아이들이라니. 하하, 한국에서는 중혼(重婚)이 심각한 범죄인데 여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니 웃겼다.
하지만 혜린은 가만히 있었다. 나한테 ‘내 인생을 돌려줘!’라고 소리치지도 않았고, 날 원망하는 눈으로 보지도 않았다. 생각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별로 안 읽는 이유? 24시간 동안 다른 사람 생각을 듣다 보면 회의감도 들고 피곤하기도 하다. 내 생각만 해도 시간이 모자란데 미쳤다고 오픈 채널 24시간으로 남의 마음을 읽겠냐?
“……또 봉인할 거야?”
“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와서 좀 이상하게 대답했다. 봉인? 인격 말인가?
“……나, 이틀 전에 아무것도 못 했잖아.”
숲에서 메이와 로라가 화려한 무쌍을 찍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단검을 든 채 어설픈 자세만을 잡았던 그거 말인가? 근데 왜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내 다른 인격은 적어도 싸우는 건 도움이 됐을 테니까.”
“대신 너무 대하기 어려웠어. 질투심 장난 아니더라.”
그녀는 피식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진짜 웃겨서 웃은 거다.
“그렇겠지. 질투심……이라고 하긴 뭐한데. 한국에 있었을 때 난 정말 질투심이 많았어.”
그녀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들어주는 게 매너 같았다.
“내가 데뷔하고……온갖 방송국에서 CD 트느라 다리 벌린 횟수만 해도 열 번은 가볍게 넘었을걸? 내가 왜 그렇게 몸을 팔면서까지 노력했다고 생각해?”
“어……유명해지고 싶어서?”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핵심에는 다가간 거 같았다. 혜린이는 부정은 안 했으니까.
“얼추 맞아. 지는 것도 싫었고, 나보다 잘난 애들한테 가려서 아무런 빛도 못 본 채 사라지는 것도 싫었거든. 그래서 가슴골 드러나는 옷 입는 거부터 시작해 오락 프로그램, CM(광고) 등 온갖 거에 다 손을 댔어. 아, 드라마는 최악이었지.”
“그거 시청률도 그렇지만 연기력이…….”
“내 연기력 개판인 거 아니까 그거 이야기하지 마.”
실실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니 참 신기했다. 비가 오니 감상적으로 변한 건 나만 그런 게 아닌 거 같았다. 이 이야기가 끝나면 내 신세 한탄도 해야 하나? 근데 내 신세 한탄은 혜린처럼 대단할 게 없었다.
“몸을 팔 때마다 방송국 사장이나 감독 새끼들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겨, 결혼하자?”
“아, 그런 새끼들도 있긴 있었지. 주로 내 몸이랑 명성을 노리고 그랬겠지만…….”
다행이군. 한국에도 나랑 동급의 또라이들이 적어도 몇 명은 있다는 거니까. 상향평준화(上向平準化)가 안 된다면 하향평준화(下向平準化)라도 노려봐야 하잖냐.
인간이란 자기보다 잘난 놈한테 질투를 느끼고, 자기보다 못한 놈을 비웃으며 용기를 얻는……쓰레기 같은 동물이니까.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키워줄까?’였어. 그 말을 들으니 더 좆같더라고. 나 같이 신인이고 가진 게 몸밖에 없어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는데 뭐? 키워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맹세했거든. 네놈 새끼들이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는 자리에 올라가 주겠다고.”
굉장하군. 나 같으면 ‘에휴, 내 인생이 그럼 그렇지. 어쩌겠냐……’라며 포기했을 텐데.
“한국 대표 섹시 가수라는 타이틀을 얻었을 땐 뛸 듯이 기뻤어. 가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에 나올 때마다 자막으로 나오는 타이틀을 늘 확인했다니까. 내가 어떻게 묘사됐나 싶어서. 너도 나 가지고 딸 쳤지?”
지금까지 몇 번이고 범했는데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부끄러웠다. 고개를 끄덕이니 약간 짓궂은 표정이 된다.
“주로 뭐 보면서 쳤어?”
“그, 뮤직 비디오나 화보. 합성 사진.”
“이해해. 화보 촬영할 때 엉거주춤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기분 째졌거든. 내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요염하구나~하고.”
그래. 작살나지. 솔직히 지금도 불끈거리는 걸 참고 있다. 하반신이 계속 불끈거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 섹스를 하든 자위를 하든 간에 아프다. 좆물은 잘 안 나오면서 아픈 건 더럽게 아프단 말야. 그러니 최근에는 흥분하는 횟수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근데 여기 와서 끝이 났네. 좀, 슬펐어. 괴물이랑 만나는 것도. 싸우는 것도. 모두 힘들고 현실 같지가 않았거든. 솔직히……다 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었어.”
“나도.”
그러자 혜린이가 소리 높여 웃었다. 소위 말하는 ‘빵 터졌다’와 같은 느낌으로.
“왜?”
“아, 아하핫! 으히히! 아, 잠시만! 으, 크흐흐흑……!!”
배까지 잡고 웃을 말이었나? 겨우 ‘나도’라는 말 두 글자를 말했는데? 정말 미친년 웃듯이 부들거리던 혜린은 겨우 진정을 했다.
“미, 미안……푸흡! 그, 콜록! 아, 음. 그게. 웃겼거든.”
“겨우 두 글자 말했는데?”
“넌 여기 와서 정말 엄청 싸웠잖아? 이것저것 경험도 했고, 사람들 앞에서 날 범하기도 했잖아.”
“필요성을 느껴서 한 일이지. 나라고 해서 이 세상을 100% 마음에 들어 한 건 아니었거든.”
“지금은 어때? 돌아가고 싶어?”
“아니. 부모님은 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그러는 너는?”
“안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이 지경까지 오니 돌아갈 수도 없게 됐어. 돌아갈 방법도 모르지만. 이리 한 번 와볼래?”
때릴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는 다가온 나한테 자기 가슴을 보여줬다. 로라나 메이가 너무 커서 그렇지, 혜린의 가슴도 꽤 예뻤다. 그녀가 가슴을 쥐고 꽉 짜자, 하얀색의 무언가가 흐른다. 이건……?
“마셔봐.”
입을 대서 할짝인 순간, 어디선가 마셔봤다는 느낌이 온다. 로라의 모유와 비슷한 맛이다.
“나……이 지경까지 와버렸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뭐라고 해야 하나. 미안하다? 축하해?
“처음에는 싫었는데 점차 적응하게 됐어. 무엇보다……이틀 전의 싸움에서 느꼈거든. 이대로는 쓸모없는 인간이 될 거라고. 너한테 또 버림받을 거라고.”
‘아냐’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도 그녀를 보며 어떻게 전투에 참여시켜야 하나 고민했으니까.
“하지만 아기를 가지고, 쭉 생각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 앞으로 널 위해 노력할게.”
지금까지 나한테 시발놈, 개새끼를 욕하던 그녀가 갑자기 ‘날 위해 노력한다’라고 말하니 좀……믿기지가 않았다.
“안 믿기지? 하지만 나,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는 성격이거든. 널 위해 노력할게. 아이도 낳아주고, 모유도 듬뿍 마시게 해줄게. 대신…….”
내 머리를 잡고 그녀 쪽으로 끌어당겼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우리가 입술을 맞추는 소리는 사라진다. 혀와 혀가 감기는 농후한 키스.
키스가 끝난 후에도 가볍게 키스를 했고, 그런 걸 받으니 머리가 멍해진다. 그녀의 진심이 담긴 키스는 사실상 처음이었으니까.
“날 지켜줘. 아니, 니가 날 지키게 만들 거야. 그 정도로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될 테니까. 나, 진심이니까……각오하라고?”
“어, 음……니가 날 위해 일할 테니, 나도 널 위해 일하라고?”
“그럼. 말했잖아? 난 질투심이 강하다고. 이렇게 된 이상, 첫 번째 아내로서 로라나 메이한테도 안 질 정도로 널 유혹할 테니까……알아서 해?”
윙크를 하며 혀를 내미는 그녀는, 지금까지 본 이혜린의 모습 중 최고로 귀엽고 아름다웠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 또한 이제 이 세상에.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했구나 생각하니 어쩐지 기특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띤다.
“안 하고 싶어?”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 안 해도 안다. 적극적으로 다가와주는 건 좋았지만, 곤란했다.
“그게……너무 무리해서 그런지 좀 아프거든.”
“흐음……그럼, 내가 나설 차례네?”
“아, 아니. 아프다니까?”
“가만히 있어봐. 이럴 때는 이럴 때대로 즐기는 방법이 있으니까. 결혼 후에 맨 정신으로 아내가 처음으로 해주는 서비스니까, 안 받으면 안 되잖아?”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에 재주가 있는 거 같다. 그녀는 꼿꼿하게 선 유두(乳頭)를 내 귀두(龜頭)에 갔다 댔다. 소변이나 좆물이 나오는 구멍에 그녀의 젖꼭지가 닿을 때마다 움찔했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 온몸을 달린다.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가끔 혀로 핥고. 그러면서도 충실하게 젖꼭지로 다양하게 자극을 주었기에 숨이 흐트러졌다.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나한테 승리감이라도 느낀 걸까? 비릿한 웃음과 함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새로운 플레이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형편없는 신음과 함께 사정(射精)을 해버렸다.
찌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좆물은 그녀의 머리카락, 얼굴, 가슴 등 상반신에 묻었다. 이런, 씻어야겠군. 미안한 느낌이 들었기에 닦으려는 순간 혜린이는 믿을 수 없는 짓을 했다. 얼굴에 묻은 좆물을 정성스럽게 모은 후, 마치 샘물을 마시듯 후루룩 마시는 거였다.
“야, 야. 그거……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남편이 준 소중한 좆물이잖아? 게다가……이 좆물 안에도 수 억 마리의 정자(精子)가 헤엄치고 있겠지? 아내이자 엄마인 내가 이 아이들을 뱃속에 품는다면, 분명 자궁(子宮)에 있는 아이와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음.”
손에서 떨어지는 끈적한 한 방울까지 마신 후 게걸스럽게 손바닥을 핥는 혜린이를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너, 원래 그런 성격이었어?”
“아니. 그래도 여긴 판타지 세상이잖아? 예전의 내가 어쨌든 간에, 여기에 있는 나는 예전의 섹시 가수가 아냐. 그럼……이렇게 행동한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잖아.”
“그건 그렇다만…….”
“게다가, 이렇게 된 이상……살아남을 거거든. 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해가 간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그녀는 자기가 하지 못했던 것. 나를 이용한다는 것을 아예 ‘서로 함께 이용하며 살아간다’라는 것으로 덧씌운 것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진심과 사랑이 있었으며, 단순히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만을 생각하던 이혜린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헌신적이고 예쁜 아내를 위해, 나도 노력해야겠군.”
“알면 됐어요. 신세린 아빠.”
저 말투는 메이 흉내인가. 손바닥에 있는 좆물까지 깨끗하게 핥은 후, 여전히 부들대는 내 자지에 키스를 한다. 자지에 하는 키스는 정말 좋아했기에 거절하지 않았고, 남은 좆물과 좆 찌꺼기까지 처리하는 걸 보니 만족감이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침대에 누운 후 서로를 껴안았다. 비록 섹스는 어렵지만 여전히 발기하고 있는 생식기가 그녀의 은색 비키니 아마에 닿았다.
“잠 오네.”
“그럼 자.”
그럴까. 이 빗속을 뚫으면서까지 나갈 일도 없고. 로라와 메이한테는 미안하지만 그건 그들의 일이니까. 난 어디까지나 괴물 퇴치 등을 무상(無償)으로 도와줄 뿐이다. 순찰까지 가기에는 지금 내 상태가 안 좋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혜린도 임신한 상태에서 날 위로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군.
“뭐 원하는 거 있어?”
“원하는 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이렇게 된 거……서로 잘 해보자는 의미에서 뭐라도 사주고 싶어서.”
“그렇게 속물적(俗物的)인 여자로 보였어? 아쉽네.”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기에 난 아니라고 했고, 급하게 부정하는 내가 웃겼던지 혜린이는 킥킥 거렸다.
“농담이야. 우리 남편, 의외로 순진하네?”
“난 내가 호구 같아 보이는데. 여자랑 사귄 적이 없으니까.”
“근데 말은 그렇게 야하게 잘 해? 너, 웃기다니까? 여자랑 자본 적도 없고 사귄 적도 없으면서 모두의 축복과 사랑 속에서 아기 어쩌고저쩌고. 당한 나도 나지만, 말한 너도 참 웃기다니까?”
인생의 흑역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순간이군. 근데 확실히 내가 봐도 내가 미친놈 같기는 하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간을 하는데 사랑스런 아내와의 초야(初夜)를 모두 앞에서 지내고 싶다고 하질 않나, 로라가 사람들 앞에서 똥을 싸게 할 정도로 자극하질 않나. 나 사실 새디스트 기질이었던 걸까? 걱정이 하나 더 늘어났군.
어찌 보면 무례했지만 이렇게 말을 터놓고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니 감개무량했다. 내가 한 짓을 다른 사람 눈에서 보면 어떻게 보이나도 알게 됐고. 앞으로 흑역사를 만들 수 있는 짓은 가능하면 삼가자. 해서 좋을 일이 없잖아. 뭐……그런 말을 할 때 짜릿하긴 하다만.
“원하는 게 뭐냐고 했지? 음, 글쎄……솔직히 모르겠네. 너 돈 많아?”
“사냥으로 번 것도 있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이템이랑 무기, 돈 정리했거든. 니가 다루기 쉬운 무기라든가……그런 것도 신경 써야 했으니까.”
누가 보면 내가 매일 할 일 없이 처놀고 있는 줄 알겠지만, 나도 할 일 많다. 지금 가진 코스튬을 누구한테 입힐 것인가. 전투 배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모니터만 두드리고 있다고 놀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내가 좋든 싫든 넌 그 옷 다시 입힐 거잖아? 그, 시라누이 마이였던가?”
“그건 그렇지. 살아남으려면 그 옷의 힘을 빌려야 하니까.”
코스튬을 장착함으로써 그 코스튬(옷)을 입던 캐릭터의 기술을 쓸 수 있다는 건 매우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아니지만, 그걸 써서 살아남거나 싸워야 하는 여자들한테 말이지. 물론 그 힘으로 날 보호해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옷 외에 다른 옷은 없어?”
“지금 한 벌 있는데 그건 로라 거야. 그리고 이전에 약속했던 메이 선물도 마련해야 하고.”
“옷으로?”
“응.”
옷으로 주는 게 최고다. 반지 같은 귀금속도 좋겠지만, 그녀들이 가진 능력에 코스튬의 능력까지 가산(加算)된다면 더욱 더 전투는 수월해질 것이다. 그녀들의 안전이 내 행복이니까.
“그럼 나중에 나 데리고 밖에 나가줘. 무슨 가게가 있나 구경해보게.”
“응. 나가서 원하는 걸 사줄 수도 있으니까. 원래 입었던 옷은 싫어?”
“속살이 훤히 보이는 게 그렇지만……사랑하는 남편이 준 드레스니까. 소중하게 입어야 하잖아?”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하는군. 다른 코스튬도 좋았겠지만 이 세상에 와서 가장 먼저 고른 옷.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 동시에 우리의 결혼식을 모두에게 증명할 수 있었던 붉은 닌자, 시라누이 마이의 코스튬은 매우 큰 뜻과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첫 데이트를 하겠군. 마음이 더 두근거리지만 몸은 솔직했다. 눈은 절로 감겼고 혜린의 가슴에 안긴 채 나는 잠에 빠졌다.
============================ 작품 후기 ============================
이번 업로드를 제외하면 남은 업로드는 두 번. 소아온 팬픽을 합쳐도 글을 올릴 기회는 이제 세 번뿐이네요. 단숨에 줄어든 2016년을 생각하며 한 해를 돌아봅니다. 11월 말부터 시작한 연재는 어떻게든 잘 진행되고 있고 독자분들도 응원을 해주셔서 매우 기쁩니다.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그냥 없던 걸로 칠까 싶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좋은 회사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중소기업 계열은 가능하면 피하세요.
무조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나쁜 일이 있을 거라고 낙담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래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열심히쓸게요님, 앞으로 계속 수위를 늘려갈 생각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keriaba님, 어쩌다가 세린이 무정자증 주인공으로 오해받게 됐는지……. =_=; 솔직히 제가 더 놀라웠습니다.
현재 세린과 관계를 맺은 여성은 100% 임신 상태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밝혀질 겁니다.
루블리츠님,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잘못 하다간 콧물 나오는데 코는 막힌 느낌이 드는 지옥도를 보게 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요? 제가 현재진행형으로 걸렸거든요. 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