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1-4 : 만남」 =========================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 세 가지를 의식주라 부른다. 의(衣)는 알겠지만 의복, 옷이다. 옷 없이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건 목욕탕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실제로 그랬다간 잡혀간다.
물론 나도 남자기에 여성이 옷을 벗는 거나 벗은 모습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렇다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음증이라도 걸리지 않은 이상 말이다.
식(食)은 밥. 먹는 것을 뜻한다. 이것도 중요하다. 군대에서 몇 안 되는 낙(樂)이라고 한다면 난 음식을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식사시간만큼은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고 그 후에는 잠시 동안이나마 현실을 잊고 휴식을 취할 수 있지 않은가.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전투식량의 맛을 개선하는 데에 힘을 쓸 정도로 밥이라는 것은 중요한 요소다.
마지막으로 주(住). 집. 사는 곳이다. 대한민국에서 자기 집 가지는 것이 꿈이라고 할 정도로 집에 대한 소유욕과 관심은 매우 높다. 서민들의 꿈이 대기업, 로또당첨, 자기 집 마련이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프롤로그부터 지금까지 쭉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내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지게 된 빚 4500만원이 바로 집빚이다. 좋은 집은 좋은데, 그걸 사놓고 ‘너도 이 집에 살고, 우리 집의 가족이자 일원이니 빚을 갚으렴! 그걸 위해서는 공무원! 공무원이 최고야!’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무책임한 부모를 생각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판타지 세상에 와서까지 집빚과 부모님의 병신짓에 머리를 싸매야만 하다니. 불쌍하다 못해 처량하다.
진짜 왜 이러냐.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은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굵직한 마법이나 그런 걸 얻고 먼치킨짓을 하는데, 왜 나는 이 판타지 세상까지 와서 내 잘못도 아닌 걸 고민하고 걱정해야 하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이란 잔혹한 것이다. 왜냐고? 이쯤 되면 눈치를 챘을 것이다. 소설의 매 편을 시작할 때마다 이렇게 앞에 헛소리를 지껄이고 멋들어진 타이틀 좀 놓고 소설 시작하는 작가의 스타일을 알겠지만……위의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배고파 뒈지겠다, 시벌…….”
의식주를 갖추고 있지 않은 훌륭한 견본이 지금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 † † † † † † † † †
시발, 시벌, 시불, 시볼, 씨바아아아알! 욕밖에 나오지 않는다. 응? 왜 같은 욕을 다섯 번이나 하냐고? 욕의 배리에이션에 따라 사용처도 다르고 어감도 다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욕을 얼마나 활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감정과 현재 상황을 재빨리 나타낼 수 있다는 장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헛소리는 이쯤 하고. 지금 난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다시 괴물과 만났냐고? 그럼 내가 이러고 있겠냐? 도망치는데 급급하지. 지금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습격한 건 바로 ‘배고픔’이었다. 그게 무슨 큰일이냐고?
내가 살고 있던 대한민국. 그리고 강대국인 미국이나 중국을 기점으로 할 때 우리가 밥을 버리고 있는 동안에 아프리카에서 실시간으로 기아로 죽고 있는 아이들이 속출한다는 사실을 알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기아라는 것은 심각한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정도로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 빌어먹을 판타지 세상에 와서 제대로 된 밥을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일어나서 그 괴물한테 쫓기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A1이 날 구해준 것.
그리고 죽은 괴물로부터 떨어진 후 잠 좀 자고 지금 여기까지 합치면 대강 6~7시간은 지나지 않았을까. 시계가 없으니 정확한 건 모르겠다. 잠을 더 많이 잤을 테니 어쩌면 시간은 더 지나가 있겠지.
배고픔과 함께 깨달은 것은 바로 하늘의 상태였다. 저 하늘은 아무래도 내가 살고 있던 세상과 마찬가지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 같다.
물론 누군가는 ‘어, 그러면 다른 행성에 있는 거 아닌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라고 하겠지만……. 세상일은 결코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갔다면 그 누구도 자살은 하지 않겠지.
잠시간이지만 내가 우주에 있지 않은가 하는 가설도 떠올려봤다. 하지만 설령 있다고 치더라도 원래 내가 살던 세상……지구라고 해야 하나. 지구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다. 왜냐고?
내가 있는 곳이 지구와 가까운 행성계인지 아닌지도 모를뿐더러 우주로 나갈 수 있는 우주기술이 엄청난 발달을 이룬 것도 아니다. 차라리 다른 세상으로 차원이동을 했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은 있으리라.
무엇보다 설령 지구에서 온다 치더라도 그럼 그 사람들한테 기다리고 있는 건 오직 죽음뿐이다. 죽은 괴물 같은 게 한 마리만 있을 턱이 없다. 그런 놈들이 무더기로 있다고 생각만 해도 오싹하고 토할 것 같지만, 낙관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고 생각한다.
아주 대놓고, 까놓고 말해서……비무장. 혹은 제한된 무장을 한 사람들이 이 판타지 세상에 왔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죽을 거다. 내가 죽을 뻔 했듯이 말이다.
여러 가설과 잡생각을 하는 것도 질렸군. 입을 열어 단어를 말했다.
“오픈(Open).”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내 앞에는 초록색의 홀로그램 스테이터스 윈도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배를 채우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만……주린 배를 잡고 걷기 전까지 조사를 해 알아낸 것은,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일종의 상태창(狀態窓)이라는 것이었다.
A4용지에 가까운 크기의 직사각형 윈도우는 다 초록색. 밝아서 좋긴 좋다만, 좀 눈에 띄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냐. 어차피 이 주변에 괴물이 있다면 이걸 부르든 말든 나한테 다가올 건데.
A4 크기의 조작 윈도우를 보니 다시금 유명 일본 애니메이션 [소드·스킬·온라인]이 떠오른다. 거기서는 입으로는 말 안 하지만 손짓을 하니 스테이터스가 나타났었지? 나 원 참, 이건 무슨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전에 연재중지 됐었던 그 팬픽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연재중지가 되는데도 여자캐릭터랑 음양합일의 조화를 못 이루었다고 징징 대던 주인공도 참 웃긴 놈이었지. 작가는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적었던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 상태창 왼쪽에는 약 네 개의 메뉴가 위치해 있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스테이터스], [아이템], [무기], [마법]. 그리고 맨 밑에는 [1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날 가지고 노냐? 진심으로 화면을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홀로그램에 주먹질하는 건 하늘에 삽질하는 것과 동격이었다. 아, 물론 이건 내가 직접 주먹을 후려갈겨 본 결과 터득한 것이다.
즉, 이미 삽질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헛짓했다고 뭐라고 하지 말자. 안 될 걸 알면서 하는 것. 그게 바로 남자의 자격 아니던가? 응? 아니라고? 아님 말고!
난 [스테이터스]를 클릭했다. 나타나는 것은 내 이름과 레벨, HP와 MP. 경험치와 직업. 이 정도인가. 민첩이나 힘 같은 스탯은 보이지 않았다. 으음, 이왕이라면 올힘찍고 대검들고 설쳐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런 목숨 아까운 짓을 할 정도로 난 멍청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목숨이 걸린 현실에서는 말이다.
HP는 알겠는데 MP라니. 그럼 마법도 쓸 수 있는 걸까. [마법] 메뉴를 클릭(사실, 터치지만. 터치든 클릭이든 누르니까 상관없지)하니 나온 건 단 하나였다. 그걸 조금씩 읽어 내리니 내 정신이 혼미해지는 거 같았다. 내용이 뭐였냐고?
[자지(좆)의 맹세 / 소비 MP 0 / Passive]
- 여성 캐릭터를 자신의 충실한 몸종으로 만드는 마법. 발동 조건은 플레이어의 자지(좆)에 입맞춤을 하거나 당하는 것으로 발동. 자지의 맹세에 걸린 여성 캐릭터는 이후 [스테이터스] 메뉴에 파티 인원으로 추가되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플레이어한테 지배당한다.
……
…………
………………
“나니☆코레(뭐니☆이거)?”
스크린을 후려갈겼을 때보다 더 어이가 없었다. 보통 마법이면 파이어 볼이나 썬더 볼트, 힐 등. 적어도 정상적인 마법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근데 뭐? 자, 자지의 맹세? 대놓고 자지 옆에는 괄호로 ‘좆’이라 쓰여 있었다.
아니, 시발! 자지가 좆이라는 건 나도 알아!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중학생, 고등학생만 되어도 금방 알게 되지! 근데 문제는 그게 아냐! 대체 ‘자지의 맹세’가 뭔데!?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뭐어? 충실한 몸종? 몸과 마음 모든 걸 플레이어한테 지배당해? 대체 무슨 약을 빨아먹으면 이딴 마법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안 그래도 집빚이랑 부모님, 그리고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는데 더욱 더 통증이 심해지는 거 같았다. 아니, 진짜 뭐가 이따위야?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다른 메뉴로 손을 옮겼다.
[아이템] 메뉴는 클릭해도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에(단, 돈은 표시됐다. 맨 위에 아이템과는 달리 고정 메뉴로 표시되고 100이라는 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무기]를 클릭했다. 그곳에는 드물게도 단 하나의 리스트가 존재했다. 그걸 클릭하자 눈에 익은 사진과 함께 설명이 디스플레이에 표시되기 시작했다.
[M16A1]
- 원거리 사격형 무기. 한 번 쏠 때 최대 30발까지 장전이 가능하며, MP를 30소비하여 재장전이 가능. HP가 30%이하로 내려갔을 경우 자동사격모드로 바뀌며 재장전 및 자동사격으로 인해 MP가 50씩 소비된다.
설명을 처음 읽었을 때 바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설명을 읽자마자 바로 삘Feel이 왔다.
아, 그렇군. 이 총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미친 듯이 괴물을 공격했던 이유는 내 HP가 30%. 쉽게 말해 뒈지기 일보 직전이라서 능력이 발동됐었던 거라고 말이다.
실제 내 HP는 최대치 100에서 매우 떨어진 27을 표시하고 있었고, MP는 최대치 100에서 반이나 떨어진 50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적이 나타나면 바로 공격해준다는 거잖아요?’라고 묻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살아남은 건 좋지만……이렇게 HP와 MP가 제한된 상태에서 자기 몸을 걸고 자동공격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이판사판식 전법을 채택할 수는 없었기에 난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며 걷고 있었다. 혹 적이 나타났는데 나를 둘러쌀 정도로 엄청난 대군이 몰려온다면……아무리 자동사격이 있으면 뭐하냐. 죽을 텐데.
적의 세력이나 정체조차 모르고 깝칠 정도로 난 간이 큰 놈이 아니었고, 이 경우는 그러한 소심한 성격이 현명한 선택으로서 적용된 셈이었다. 으으, 그나저나 더럽게 배고프네. 안 그래도 마법 메뉴에 있던 이상한 마법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배까지 고프니 진짜 미칠 지경이다.
결국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걷자니 너무 피곤하고 배고프다. 먹을 거……먹을 거. 풀을 먹을 수는 없다. 초식동물도 아닐뿐더러 이상한 걸 먹었다가 배가 터지거나 몸이 녹아버리는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며 생각이지만, 괴물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아무리 주의해도 모자라지 않다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거겠지?
다시 시선을 위로 옮겼다. 으아아아……진짜 무식하게 큰 나무다. 이런 나무가 몇 백 그루나 존재하다니. 이 숲을 빠져나갈 수는 있으려나.
“어?”
머리를 스쳐지나간 것. 어쩌면……있을지도 모르겠어. 난 주변에 있는 나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수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이렇게 큰 나무라면 있을 건데……설령 여기가 아니더라도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한데. 아픈 상처를 끌어안은 채 자세를 낮춰 이리저리 보던 나는 결국 목표로 삼던 것을 발견했다.
“찾았다!!”
손에 쥔 것은 붉은색의 과일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렇게 무식하게 큰 나무라면 잎뿐만 아니라 열매도 맺힐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고, 내 생각은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생긴 건 사과랑 비슷하게 생긴 과일을 보니 입에 침이 절로 고였다. 으윽, 그러고 보니 사과를 껍질 안 벗기고 그냥 먹는 건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군.
원래 과일을 그다지 좋아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을 직면하니 그야말로 최고급 음식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먹자니 불안함이 다시 내 마음을 엄습했다.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 위험하다. 하지만……하지만 말이다.
“안 먹어도 죽을 거야.”
난 조금 전에도 죽을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나 마음을 지니게 된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정도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굶어죽는다’는 선택지는 내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난 용기를 가지고 과일을 먹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간 붉은색의 열매의 단면이 보였다.
“……존나 맛있잖아!?”
사과보다 훨씬 달콤하고 아삭거리는 감촉. 맛있다. 배고픔과 피로가 겹쳐서 이런 느낌을 더욱 더 강화시키는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맛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결국 난 하나를 다 먹은 후 주변을 뒤져서 같은 과일 두 개를 더 먹은 후에야 바닥에 드러누웠다.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좀 쉬자. 먹은 후에 바로 움직이면 배탈 난다. 게다가 진짜 피곤하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만복감을 맛보고 있는 나한테 있어서 ‘지금 당장 움직인다’는 선택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선택지였다. 적어도 괴물이 내 눈앞에 나타나 날 죽이려 한다는 상황이 없는 한 말이다.
배가 부르니 잠이 왔다. 하하,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다. 살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고, 배가 고프면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의젓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리를 하니까.
이렇게 보니 난 그런 의젓한 사람과는 한 1억 광년 정도는 떨어진 사람 같다. 아, 혹시나 싶어 말하지만 광년은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다. 이상한 욕 아니니 오해 말자.
“몸이 땀범벅이잖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 괴물한테서 도망치느라 있는 힘, 없는 힘 다 쓴 것도 모자라 땅을 구르고, 파묻히고. 정말 온갖 경험을 다 했다. 배가 부르니 이번에는 샤워인가. 평소 샤워는 안 했으면서 이럴 때는 간절하게 바라다니. 역시 인간의 마음이란…….
입에 절로 웃음이 걸렸다. 그치만 샤워라니. 말이 되냐? 여기에 샤워실이나 도구는커녕, 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샤워라니. 아, 강이나 시냇물 같은 게 있다면 그나마 좋겠는데. 지금은 배부른 걸로 참자.
이렇게 배부른 채 눈을 감고 있으니 정말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따로 없군, 옛날에 붕당정치만 하고 자기 밥그릇만 챙기다 나라 멸망시킨 조상들이긴 하지만, 적어도 좋은 말은 남겼다고 생각한다.
뺨을 스치는 바람. 시원한 대지. 햇빛을 가려주는 그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걸 경험하는군. 웃기게도 이제 내 머리에서는 핸드폰이나 집빚에 대한 것은 완전히 날아가 있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당장 자기가 어디 있고 뭘 하면 되는지도 모르는데 집빚? 취업? 핸드폰? 병신 헛짓거리도 정도가 있는 거다.
아, 잠들 것 같다. 하긴 뭐 자면 어떠냐. 지금 귀에 들리는 졸졸 거리는 시냇물 소리를 BGM 삼아 자다니. 이거 진짜…….
“What The Fuck(뭐 씨발)!?”
난 벌떡 일어섰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시냇물 소리? 귀에 들려? 난 나무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단숨에 일어나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서? 어디서 들려온 거지?
정신을 집중하니 북서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있다 보니 감각도 예민해진 건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다쳐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할 정도의 고양감이 내 몸을 감쌌다.
가자! 가서 물을 마시는 거다! 몸도 씻자! 주저하는 마음은 모습을 감추고 있었고, 그 빈자리를 고양감과 흥분이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방해가 되는 수풀을 헤치며 나간다.
달린다. 앞에서 조금씩이지만 밝은 빛이 보인다. 점점 더 그 소리가 리얼해져간다. 그리고 완전히 시냇물이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 난 힘껏 외쳤다.
“아싸 좋구나!!”
수풀을 헤치며 나온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대지를 비추고 있는 밝은 태양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시냇물
아무것도 입지 않은, 태초의 형태 그대로 몸을 드러내고 있는 여성
“어?”
시냇물이라고 하긴 큰, 샘과 같은 곳에 몸을 담그고 있는 알몸의 여성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성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매력적으로 뒤로 넘기고,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어……?”
“어, 어맛!?”
소중한 부분과 가슴을 가리는 그 모습을 보니 내 하반신이 꺼덕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이런 미친 시발!? 대체 뭐냐? 갑자기 숲을 헤치고 나오니 알몸의 여성이 샤워를 하고 있다니? 이건 대체 어디서 살 수 있는 18금 게임이란 말인가? 그녀는 부끄러운 듯─부끄러운 게 당연하지만─몸을 감추려 했지만 오픈된 공간이기에 그녀의 발버둥은 헛수고일 뿐이었다.
“……어?”
난 허둥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
“설마.”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하하, 설마. 아냐. 하지만 확실한데. 잊을 리가 없다.
“이, 이혜린 씨……?”
“예, 예?”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드러내며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여성의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느끼고 있던 충격은 다시금 내 머리를 싸늘하게 식히고 있었다.
“저, 저 아세요? 그, 여기는 대체 어디에요?”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그녀. 모를 리가 없다. 저 여성은……내가 원래 세상에서 도서관에 가기 전, 자위를 위해 딸감으로 삼았던 여성이니까.
============================ 작품 후기 ============================
드디어 이번 주 분량을 다 업로드했네요. 생애 처음으로 하는 노블레스 연재라 여러 모로 불안하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구독, 선작, 추천, 코멘트해주신 분들께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그걸 보니 앞으로도 노력해서 열심히 올리자는 생각이 막 들었습니다. 아래는 코멘트에 대한 대답입니다.
라스이솔레트 2016-12-01 10:42 new
다음 편도 기대합니다
-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월-금 5일 연재입니다. 토요일에 소드 아트 온라인 팬픽을 올리니 그것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료인데다 심심풀이 삼아 읽을 정도는 될 겁니다.
열심히쓸게요 2016-12-01 10:08 new
주인공이 아직 까지는 자신이 뭘해야할지 갈피를 못잡는모습이군요! 하긴 누구라도 저 상황이라면... ㅜ
- 드디어 히로인과 만났습니다. 노블레스에서 히로인과 만나면 뭘 하냐고요? 에이, 다들 아시면서!
쿠죠죠타로 2016-12-01 10:07 new
ㅇㅅㅇ 모리안은 아마 마비노기쌍년을 말하는걸껍니다
그리고 건담시드까지는 볼만했다고쳐도 (막장이여도) 시데는 ㅇㅅㅇ 뭔놈의 트레이서도아니고 같은장면반복으로 데자뷰를 그렇게주는지
- 후쿠다 미츠오. 흔히 말하는 '후쿠닭' 감독은 트레이싱을 통한 연출을 매우 즐겼습니다. 사이버 포뮬러, 기어전사 덴도가 그 적절한 예시죠. 아무리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라도 매일 틀어주는데 질릴 수밖에 없죠. 거기에 BL코드까지 끼얹었으니……야레야레다제.
그치만 그런 걱정도 이제 하실 필요 없습니다. AGE보다 더한 망작, 철혈의 오펀스가 나왔으니 말이죠. 그거 보시면 키라가 정의의 용사로 보일 정도입니다. AGE는 평작에서 수작(전 원래 AGE를 상당히 좋아하기에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으로 랭크UP 됐습니다. 더블오는 원래부터 높게 평가됐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철혈은……진짜 답 없습니다.
철혈을 보면 모로사와 치아키의 각본을 재평가할 정도로 엄청난 타격을 입으실 겁니다. 아니, 정말로요. 레알. 오죽하면 키라(시드 데스티니 기준)를 정의의 사도로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막장이겠습니까…….
……근데 왜 코멘트에 건담 관련 글로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걸까요. 이 건덕후 기질을 좀 줄여야 할 텐데. 어쨌든, 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문 안에는 팬픽인 마법사 이야기 및 작가를 까는 부분도 있습니다. 내일은 그 까이고 까인 팬픽 올리는 날이니 한 번쯤은 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주부터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아침에 올리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저녁 무렵에 글을 올리게 될지도 모르는 점,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