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230화 (230/235)

230화

닐로가 손에 든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는 달아오른 자리를 진정시키려는 듯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진우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진우의 시선이 에드막을 떠나 닐로에게로 옮겨졌다.

“만약에 우리가 지구를 침공해서 그곳에 있는 모든 지구인을 죽이겠다고 자네를 위협하면 어쩌려고 했나? 솔직히 단순히 위협이 아니라 정말로 쳐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닐로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만약 그랬다면 나로서는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졌겠지. 그런데, 정말 그럴 생각이 있었나?”

“이곳에 있는 전사들은 물론 그럴 생각이 없었지. 지구를 정복한다고 한들 얻을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외계 행성에 나가 있는 다른 상급 전사들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그들에게는 얻을 게 있었다는 말인가?”

닐로가 손가락을 들어 진우를 가리켰다.

“자네가 있으니까. 상급 전사를 굴복시켜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거든. 그러니까 지금까지 루살카부터 노르호지와 벨푸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상급 전사들이 계속해서 자네에게 도전을 한 게 아닌가?”

닐로의 이야기를 들은 진우가 갑자기 풋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그는 닐로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상급 전사를 노예로 삼으면 지배의 단계에 올라설 수 있다고 믿고 있더군. 그들에게 그런 말을 흘린 게 너였군.”

“정확히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았지.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운을 떼기는 했지만. 해석은 자기들 마음대로 했을 뿐이지.”

“외계 행성을 지배하는 상급 전사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지배의 단계에 올라서려고 했던 것은 아마 플레비크 본성에 대한 욕심 때문이겠지?”

진우의 말을 들은 닐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진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녀석들은 그런 생각을 했었지. 자신들이 지배의 단계에 오르면 플레비크 본성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어. 하지만 그건 모두 어리석은 생각이었어. 녀석들은 절대로 본성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으니까.”

닐로의 말을 들은 진우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아마 동조의 단계에 오른 나를 굴복시켜 노예로 삼았다면 녀석들에게는 큰 문제가 생겼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니코레임의 레비스도 그렇고, 나같은 상급 전사를 꺾을 기회를 너희들이 굳이 다른 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테니까. 레비스의 경우는 싸움 끝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종속의 낙인을 찍을 수 없었지만 내 경우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너희들은 나를 통해 상급 전사를 종속시킨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진우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미슬란트가 입을 열었다.

“재미있군.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니. 네 말이 맞다. 플레비크 본성의 지도자들에게만 전해지는 말이 있지. 상급 전사가 다른 상급 전사를 노예로 만들 경우 주인과 노예 모두 미치거나 죽게 된다고 하더군. 그래서 플레비크 인들끼리는 상급 전사들 사이의 결투나 종속 시도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 하지만 우리는 그 점에 대해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과를 보고 싶었던 거야.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거든.”

미슬란트의 말을 들으며 진우는 오늘 벌어질 싸움에서 이들에게 자신을 이길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자신의 말에 저렇게 상세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너희들은 다른 개체를 노예로 만듦으로 인해 다른 어떤 행성의 종족보다 빠르게 힘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진화했어.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동조가 끝이지. 내가 보기에 종속의 낙인을 찍어 상대의 힘을 흡수하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지배의 단계에 도달할 수가 없을 거 같아. 너희 선조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거나, 그런 경험이 있었겠지. 너희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짐짓 그걸 무시하고 굳이 동족을 이용해서 실험을 해보려고 한 것이고.”

진우의 말에 에드막이 코웃음을 쳤다.

“상관없다. 플레비크를 떠나 외계 행성을 정복한 순간 녀석들은 더 이상 진정한 플레비크 인이 될 수가 없게 된 거다. 놈들이 바깥에서는 한 행성의 지배자라고 거들먹거리든 말든 이미 본성의 입장에서는 외계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 거지.”

진우는 에드막의 얘기에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딜 가나 자신들은 순수하고 우월하며, 남들은 잡스럽고 열등하다고 주장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본래 전사들의 행성이었던 플레비크조차 예외가 아닌 듯 했다. 이들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마스바로크에 의해 패배를 당한 뒤부터 변질이 된 것일까? 진우는 에드막을 잠시 쏘아보다가 닐로를 향해 물었다.

“내가 조르크 행성에서 뭔가를 배우게 될 게 두렵지는 않았나? 그곳은 너희 조상들이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곳이었잖아?”

“무언가 배웠나?”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닐로의 눈이 조금 커졌지만 곧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잘 하는군. 우리가 지난 몇 백 년 동안 조르크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조르크 인들의 기술은 대단히 순수한 마나를 필요로 한다. 순수한 마나가 무엇인지 알아? 그건 색깔에 비유하면 검은색이나 흰색에 가까워. 모든 색을 가지고 있든가, 아니면 어떤 색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특징 없는 마나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해. 어떤 행성의 종족도 예외일 수가 없지.”

하지만 지구인은 가능하다. 애초에 마나가 없는 행성에서 자란 그들은 모든 마나에 대해 적응력을 갖는다.

첼스본은 그 점을 어렴풋이 깨달았었다. 그런데 마나가 없는 행성에서 자란 이들이 과연 헌터나 전사가 될 수 있을까? 니코레임 인들은 도박을 하듯 지구를 찾아 그것을 실험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성공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이 바로 진우였다.

진우는 닐로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조르크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을 이들이 믿게 하기 위해 굳이 설득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닐로를 비롯한 세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지.”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진우에게로 향했다.

“보아하니 오늘의 싸움은 삼대일이 될 것 같군. 이길 자신은 있나?”

에드막의 얼굴이 순식간에 검어졌다.

“건방진 애송이가...”

그의 말을 미슬란트가 가로막고 나섰다.

“플레비크의 전사는 이길 수 있는 싸움만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싸울 필요가 있으면 싸우고, 반드시 이기기 위해 싸울 뿐이지. 싸움이 시작되면 더 이상 목숨을 돌보지 않아.”

닐로 역시 고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몇 명의 중급 전사들에게서 종속의 낙인을 거둬들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힘이 조금 약해질 텐데... 죽을 각오를 했다는 뜻이군. 나 역시 마찬가지야.”

닐로가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싸움이 되겠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자리를 옮기기로 하지. 이곳에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온통 난장판이 될 테니까 말이야. 자네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저택을 꾸미는데 내가 좀 신경을 많이 썼거든.”

진우는 피식 웃으며 닐로를 따라 저택 밖으로 나갔다. 닐로는 일행을 인도해서 섬 아래의 좁은 해변까지 데리고 갔다. 섬을 향해 열려 있는 해변은 바다를 직접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잔잔한 파도만이 가끔씩 핥듯이 조용히 모래들을 어루만지고는 물러나고 있었다.

앞서 가던 닐로가 걸음을 멈추고 진우를 향해 돌아섰다. 진우가 그의 앞에 서자 뒤따르던 미슬란트와 에드막이 삼각형의 형태로 진우의 양쪽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닐로는 자신의 손에 하얀 색의 장검을 실체화시켰다. 그러자 에드막과 미슬란트도 각각 대도와 장창을 실체화시켰다.

진우가 우윳빛 장검을 실체화시키자 곧바로 닐로의 공격의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양쪽 뒤에 서 있던 에드막과 미슬란트가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며 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까가가가강

진우는 장검을 휘둘러 삼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세 명의 무기를 모두 쳐냈다. 그와 동시에 제자리에서 도약해서 허공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어리석은.”

닐로를 위시해 미슬란트와 에드막이 모두 공중에 떠 있는 진우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그러자 그들의 무기로부터 서로 다른 색깔을 띤 마나가 빛살처럼 진우를 향해 쏘아져나왔다.

“합.”

진우는 급히 자신의 주위에 마나벽을 씌우면서 공중에서 물구나무를 섰다.

따다당

플레비크 본성의 지도자인 세 명의 상급 전사가 쏘아낸 마나의 위력은 대단했다. 진우의 마나벽은 그들의 마나를 무사히 막아내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마나벽 역시 산산히 부서져 나가고 말았다.

지상에 있던 세 사람이 득의의 표정을 짓는 순간 물구나무 선 진우가 에드막을 향해 마나를 쏘아 보냈다. 그의 마나는 에드막의 머리를 곧바로 파고들었다.

“흥. 그게 될 것 같으냐.”

진우는 그들의 머리에 있는 종속의 낙인을 해제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나는 에드막의 머리를 파고들려는 순간 강한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진우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꿔 닐로의 뒤를 향하면서 지상을 향해 장검을 길게 휘둘렀다.

그의 동작에 따라 마나가 반월형으로 길쭉하게 실체화되면서 세 사람을 동시에 노리고 날아갔다.

“차앗.”

닐로를 비롯한 에드막과 미슬란트는 떨어져 내리는 진우를 향해 재차 공격을 시도하다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그의 마나를 막아내느라 할 수 없이 진우가 땅에 착지하는 것을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타앙

진우의 마나는 세 사람이 휘두른 무기에 막혀 부서지고 말았지만 진우는 그 사이에 포위를 벗어나 바다를 등지고 세 사람을 동시에 시야에 넣고 설 수 있었다.

“우리가 노르호지나 벨푸같은 잡종인 줄 아느냐? 어디서 감히 장난질이야?”

에드막은 진우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자신을 향해 마나 개입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꼈는지 얼굴을 검게 물들이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진우는 그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장검을 들어 에드막을 가리켰다.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닐로와 미슬란트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에드막을 향해 돌아갔다. 에드막의 실체화된 대도에 제법 커다란 흠집이 생겼다가 차츰 본모습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플레비크 인들만을 노예로 삼아서 나름 한 가지 특성의 마나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그런대로 마나 개입을 막아내기는 하는군. 하지만 그러자니 마나의 운용이 썩 원활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노르호지와 벨푸의 전투 능력 자체는 플레비크 본성의 세 지도자에 비해 크게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우의 마나 개입에 저항하지 못한 반면에 에드막은 그것을 막아냈다. 다만 그 역시 진우의 마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심력을 소비해야 하는 것 같았다.

다른 두 상급 전사가 무난하게 진우가 쏘아 보낸 반월형의 마나를 막아낸데 반하여, 에드막의 대도에는 그의 공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증표가 뚜렷했다.

“이건 내가 블리젠 인들이 사용하던 마나 구속 필드를 보고 연구하다가 개발한 기술인데 말이야. 마지막 싸움이 될 지도 모르니 한 번 경험해 보라고.”

진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몸 주변에 마나막이 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마나막과는 달리 진우의 몸 주변에서 다양하게 빛을 굴절시켰다. 결정화된 마나막이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우윳빛 장검 역시 뚜렷한 결정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닐로를 비롯한 세 명의 상급 전사는 그것을 보고 다급히 진우를 향해 마나를 실체화시켜 쏘아 보냈지만, 그들의 공격은 진우의 칼 짓 한 번에 모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건 내가 조르크에서 배운 기술이야.”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진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타앗.”

닐로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나 장검을 휘두르는 진우의 검을 막기 위해 다급하게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까앙

두 사람의 실체화된 마나검이 부딪히면서 닐로의 검 일부가 퍽 하고 쪼개져나갔다. 진우는 첫 번째 공격을 마친 뒤 일단 처음의 자리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고.”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플레비크의 세 지도자들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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