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18. 행성 플레비크
플레비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낀 사실은 공기가 무겁다는 것이었다. 계측기에 나타난 플레비크의 중력은 지구의 1.2배 정도였고, 기압은 그보다 조금 더 높았다. 하지만 진우는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어깨가 무거울 정도로 내리 누르는 듯한 느낌이 단지 중력이나 기압이 높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굉장하군.”
플레비크는 그가 지금까지 다녀 본 어떤 행성보다 마나의 농도가 짙었다.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습도나 주변의 기온으로 볼 때, 지구라면 기껏해야 발목을 덮을 정도의 풀이 자라고 있어야 할 곳이 어깨에 이를 정도로 길게 자란 이름 모를 식물들로 온통 채워져 있었다.
짙은 마나가 생물들의 생장을 촉진시킨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으로는 이곳보다 더 마나가 풍부한 행성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진우는 앞을 가리는 풀들을 헤치며 미리 정해둔 방향을 향해 한 시간 가량 나아갔다. 그러자 어느 순간 갑자기 무성하던 풀들이 사라지면서 고운 모래가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근사한 백사장이 나타났다. 폭이 이백 미터는 충분히 넘어 보이는 넓은 해변이 크게 휘어지며 십 킬로미터가 넘게 이어져 있었다.
부서지는 파도와 모래 위에서 맑은 햇살이 반짝이고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이게 해수욕장이고 내가 지금 휴가 중이라면, 마지막 날까지 절대로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일 거야.”
정말 멋진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 무시한다면, 진우는 행성 무니악의 남쪽 바다보다도 이곳이 더 마음에 드는 휴양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플레비크 인들도 해수욕을 즐겼던가?
해변의 한 가운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우뚝 솟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섬이 보였다. 플레비크 행성의 제1지도자인 닐로의 저택이 있는 곳이 바로 그 섬이었다.
섬은 해안을 향한 곳만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며 낮아지다가 좁은 해변을 드러내고 있을 뿐 사방이 모두 기어오르기도 힘들만큼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진우는 해변을 지나 그 섬을 향해 바다 위를 걸었다.
토비르에서의 수련 이후 그는 물 위를 마치 땅을 걷는 것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투르가의 말에 의하면 섬의 해안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는 평평하면서도 넓은 분지가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섬의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게 지어진 닐로의 커다란 저택이 있을 것이다 바다 위를 걸어가는 진우의 눈에는 저택의 지붕만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이렇게 드러내 놓고 가고 있으니 설마 마중 정도는 나와 주겠지?”
진우는 일부러 자신의 마나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마나 탐색을 이용해 주변을 넓게 살피는 한편 섬 위에 보이는 건물의 지붕을 향해 마나를 강하게 쏘아 보내고 있었다.
만약 닐로가 그곳에 있다면 자신이 도착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번 싸움에는 기습이나 암습 같은 것은 소용없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그런 얕은 술수로 승리를 바라기에는 가지고 있는 실력이 너무 높았다.
그가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마치 땅 위를 지나듯 걸어서 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백사장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 잡은 섬의 좁은 해변 위에는 플레비크 인 특유의 짙은 갈색 피부를 한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플레비크 인 치고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키를 가진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가 강진우라는 지구인인가?”
그는 진우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한 손을 들어 흔들면서 니코레임어로 크게 소리를 쳤다. 한 손을 들어 흔드는 것은 플레비크 인들이 친구나 가까운 아랫사람을 반길 때 하는 인사였다. 진우 역시 씩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마주 흔들어주었다.
“몸에서 풍기는 마나의 기운을 거친 것을 보니 당신이 닐로라는 상급 전사겠군. 마중을 다 나와 주다니, 영광이로군.”
진우가 자신을 향해 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마주 소리치자 닐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몸을 옆으로 틀어 자신의 저택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자네가 마나를 이용해 하도 아프게 찔러대니 모른 척 할 수가 있어야지? 제나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내 친구들에게도 전했네. 모두 이리로 오라고 했지. 지금쯤이면 다들 도착했을 테니까 일단 우리 집으로 올라 가세나.”
말을 하는 사이에 진우가 섬의 해변에 도착했다. 그의 발에는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그런 진우의 모습을 힐끗 살핀 닐로의 얼굴에 은은한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진우는 그의 반응을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제1지도자인 닐로의 친구라... 미슽란트와 에드막을 말하는 건가?”
진우의 물음에 닐로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닐로는 진우에게 등을 보인 채 자신의 저택을 향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방심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진우는 그가 이미 자신을 향해 강한 마나를 쏘아보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를 공격하려 한다면 미처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닐로의 반격이 먼저 시작될 것이 틀림없었다.
진우는 그를 쫓아 언덕을 올라가며 무심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급 전사들은 모두 같은 자격 아닌가? 그들 말고도 아직 세 명의 상급 전사가 더 있을 텐데? 내가 알기로 플레비크 인들 가운데에는 열 명의 상급 전사가 있었지. 그중 네 명이 내 손에 죽었... 아, 그 어설픈 루살카까지 합하면 다섯 명인가? 그럼 아직 여섯 명이 남은 셈이군. 이곳을 지배하는 세 명의 지도자를 제외하고도 아직 세 명이 더 있잖아. 그들은 친구가 아닌가?”
진우의 말에 앞서 가던 닐로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내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격이 많이 낮지. 자네도 알잖은가. 그 녀석들은 이곳에 있어도 오늘 일어날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블리젠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미 보고를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건 나를 상대할 때만 그렇지. 조르크를 제외한다면 다른 외계인들을 상대하거나 당신들과 승부를 겨룰 경우는 다르잖아? 전투 실력만 따진다면 그들도 당신들과 비교해서 그다지 부족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앞서 가던 닐로의 발걸음이 잠시 멎었다. 그는 몸을 틀지 않은 채 고개만 돌린 상태에서 진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열 명의 외계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 보다는 세 명의 플레비크 인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훨씬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지. 외계 행성을 정복하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더 다양하게 되기는 하지. 하지만 전사의 강함은 단순히 허접한 기술 몇 가지를 더 알고 있다는 것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잖아. 자네도 그건 알 텐데?”
진우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 그러니까 당신 말은 외계 행성의 지배자인 상급 전사들은 절대로 본성의 지도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군.”
닐로가 당연하다는 듯이 픽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돌려 다시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지. 절대로 안 되지. 외계 행성에 나가 있는 상급 전사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그들이 중급 전사가 될 때까지 만이었어. 그 뒤로는 줄곧 외계 행성을 정복하고 다녔지. 한 번 오염된 전사는 절대로 본성의 상급 전사를 이길 수 없어. 그렇지 않다면 플레비크의 위계질서는 진즉에 무너졌겠지. 우리는 힘으로 정의를 결정하는 종족이니까.”
진우와 닐로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은 어느 새 섬 위의 저택에 도착했다.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섬의 꼭대기는 오히려 평평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분지의 한 가운데에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차분하고 품격 있게 지어진 저택이 오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다만 색깔이 플레비크 인들이 좋아하는 짙은 갈색으로 되어 있어 조금은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저택의 주변에는 플레비크에서 자라는 것으로 보이는 꽃과 식물들로 꾸며진 잘 만들어진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들 사이사이에는 조그만 연못들도 보였다. 연못 옆을 지나는 길은 이름 모를 돌들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예쁜 물고기들이군.”
길을 따라 걸으며 들여다 본 연못 안에는 여러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맛도 괜찮지.”
진우는 닐로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택의 입구에는 두 사람의 상급 전사가 미리 나와 있었다. 진우는 그들이 닐로가 말하던 다른 두 명의 지도자, 미슬란트와 에드막임을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던 닐로가 진우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인사하지. 이쪽은 나와 함께 플레비크를 다스리는 두 명의 지도자들이네. 오른쪽에 있는 키 큰 친구가 미슬란트고, 왼쪽의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는 친구가 에드막일세.”
진우를 바라보는 미슬란트의 눈에는 호기심이 드러나 있었지만, 에드막은 그와는 달리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에드막의 눈길을 무시하고 미슬란트를 향해 밝게 웃으면서 한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시오? 지구에서 온 강진우라고 하오.”
미슬란트는 진우의 인사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마주 흔들었다.
“미슬란트라고 하네. 이 넓은 우주에서도 보기 드문 강자를 만나 반갑군.”
진우는 그가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도 그저 싱긋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미슬란트의 옆에 있던 에드막은 진우가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한 손만을 들어 인사를 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손을 흔들지도 않고 대놓고 진우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지구인이라고 했나? 마나가 전혀 없는 보잘 것 없는 행성에서 자란 친구가 운이 좋군. 그 나이에 벌써 상급의 경지에 오르다니 말이야.”
진우는 그의 도발에 가까운 말에도 그냥 미소를 지었다.
“나름 열심히 노력을 한 덕분이지. 물론 운도 아주 좋았던 것도 사실이야. 그래도 당신만큼이야 하겠소? 동족을 잡아먹는 것만으로도 힘이 세질 수 있다니. 남의 힘을 받아 강해질 수 있는 운을 따라가려면 나는 한참 멀었지.”
“이 주제도 모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에드막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서려 하자 옆에 있던 미슬란트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아 만류했다.
“어차피 우리하고 한 판 승부를 할 녀석이다. 서두르지 마라.”
그의 말에 닐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으르렁대는 에드막을 진정시키고 일행을 1층의 손님 접대용 거실로 안내했다.
“그 말이 맞아. 어차피 오늘 일은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차나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어차피 싸움이 시작되면 더 이상 서로 대화를 할 기회는 없을 테니까.”
진우는 화가 나서 얼굴이 검게 변한 에드막의 곁을 지나 닐로를 따라 먼저 거실 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야. 지금은 서두를 필요가 없지. 그리고 싸울 기회도 이번 한 번 뿐이고.”
닐로와 진우를 비롯한 네 사람이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시종이 다가와 찻잔을 놓고 사라졌다. 닐로는 그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마치 차향을 음미하듯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진우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위기가 제법 살벌하기는 했지만 흥분이 저절로 가라앉을 정도로 좋은 차였다.
“먼저 노르호지와 벨푸에 대해서 좀 묻겠네. 블리젠의 노예 전사들이 급히 연락을 해 왔더군. 자네가 그들을 사로잡아 포털을 타고 이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그런데 연락을 받은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자네가 이곳에 온 것을 보니 그들은 이미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겠군 그래?”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재가 되어 사라졌지. 아마 시간이 지나면 블리젠과 니코레임에 만들어 두었던 노예들이 모두 종속의 낙인으로부터 풀려날 거야.”
닐로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진우를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빛에 날카로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그런 건가?”
진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인들이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외계인들의 목숨까지 그렇게 신경을 쓸 줄은 몰랐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진우가 닐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굳이 죽일 필요가 없거나,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랬을 뿐이야. 그들이 죽는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얻을 것도 없지 않은가? 내가 당신들처럼 그들을 노예로 삼아 힘을 강화시킬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닐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미슬란트가 진우를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럼 이곳에서는 어떻게 할 건가? 여기서도 우리를 제압하면 굳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건가?”
진우는 미슬란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지. 모든 싸움은 이곳에서 시작해서 이곳에서 끝날 거야. 내가 죽든가, 아니면 너희들 모두가 죽든가. 그 밖의 선택은 없어.”
순간적으로 거실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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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단 한 편만 올립니다. 뒷 편 썼던 것을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있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