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노르호지와 벨푸는 포털을 빠져나오자마자 거친 소리를 내며 황량한 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들은 갑자기 전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중력에 그렇잖아도 마비된 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또 다른 포털을 통해 진우가 빠져나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플레비크 전사를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이곳은 어디냐? 우릴 어디로 데리고 온 거지?”
벨푸가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진우에게 물었다. 진우는 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토칠라크 행성이다. 동물은 하나도 없고 식물들만 사는 재미있는 행성이지. 중력은 내가 사는 지구의 4배가 조금 넘어. 예전에 루살카라고 하던가? 갓 상급 전사가 되었다던 플레비크 전사였는데, 이곳에서 한 판 붙었었지. 뭐,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녀석은 진짜 상급 전사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지만 말이야.”
노르호지가 코웃음을 쳤다.
“루살카라. 알고 있지. 노예를 많이 거느리고 마나만 잔뜩 모으면 저절로 상급 전사가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얼치기 녀석이었지. 그때 네놈이 루살카가 아니라 나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진우가 노르호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르호지라고 했나? 네 말이 맞아. 그런 방식으로는 진짜 상급 전사가 될 수 없지. 그런데 말이야, 너희들 그건 아냐?”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도 내가 보기에는 루살카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근본적으로 플레비크 행성을 벗어나 다른 외계인들을 노예로 삼아 힘을 키우려고 한 순간부터 너희들은 성장 호르몬을 잔뜩 처먹고 키만 훌쩍 자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얘기지. 어른 흉내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진짜 어른은 될 수 없어.”
진우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은 노르호지와 벨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벨푸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녀석이 뭘 안다고 함부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노예를 만들어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은 우리 플레비크 인들의 고유 특성이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열 명이나 되는 상급 전사를 길러낼 수 있었어. 네가 사는 그 허접한 행성처럼 상급 전사라고는 네 놈 하나가 고작인 곳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라.”
진우는 무릎을 굽혀 벨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벨푸는 지지 않으려는 듯 눈을 사납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게 당연한 거라면 왜 플레비크 본성을 다스리는 세 명의 지도자라는 녀석들이 절대로 그곳을 떠나지 않을까? 어째서 녀석들은 수많은 전사들을 노예로 만들어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몽땅 다른 이들에게 양보했을까? 그들이 욕심이 너무 없어서? 다른 전사들에게 상급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아낌없이 베풀고 싶어서? 그들에게 사실은 엄청난 동족애가 있어서?”
“그, 그건...”
“그만해라, 벨푸.”
벨푸가 진우의 말에 쉽사리 대꾸를 못하고 말을 더듬자 옆에 함께 쓰러져 있던 노르호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벨푸를 저지했다. 그는 진우를 바라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외계인들을 노예로 삼을 경우 우리에게 약점이 생긴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진우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 배낭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배낭에서 또 다른 간이 포털 장치를 꺼내어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번 것은 완전히 분해된 상태로 부피를 최소화시킨 것이라서 모두 조립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는 포털 장치를 조립하면서 무심한 목소리로 노르호지를 향해 말했다.
“조르크에서 수련을 하는 동안 전대의 마구스들이 남긴 여러 가지 기록을 읽을 기회가 있었지. 그 기록들 가운데 너희들이 디키오 마을을 쳐들어왔을 때의 일에 대한 것이 있더군. 별로 분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너희들이 왜 디키오 마을에서 힘도 쓰지 못하고 몰살을 당했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어. 당시의 마구스가 남긴 기록이었는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지.”
포털 장치의 조립을 마친 진우가 그것을 작동시킬 준비를 마치고 다시 뒤돌아섰다.
“너희들은 몹시 잡스러웠다고 하더군.”
진우의 목소리는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의 그것처럼 준엄했다. 노르호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 체념하는 얼굴빛을 했지만 벨푸는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진우를 노려보았다.
“다양한 마나를 받아들이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냐?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잘 운용하고 있다. 노예를 만들면 상대의 마나 운용능력까지 함께 얻을 수 있단 말이다.”
진우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너희들이 상대를 노예로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해서 강해지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알고 있겠지만 누군가를 노예로 만들면 주인은 그의 마나를 직접 가져오는 게 아니야. 마나를 잔뜩 가져와 봤자 어차피 자신의 수용력을 넘어서는 마나는 몸에 이상을 일으키거나 다시 밖으로 빠져나갈 뿐이니까. 주인이 가져오는 건 마나가 아니라 마나 수용력과 운용능력 자체야. 그래서 노예가 늘어날 때마다 주인은 더 많은 마나를 몸에 품을 수가 있지.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늘어나고. 주인과 노예의 경지가 비슷할수록 늘어나는 마나 수용력과 운용 능력이 더 커지지. 반대로 차이가 많이 나면 거의 늘어나는 게 없고 말이야.”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거냐?”
벨푸는 여전히 진우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진우는 그의 태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같은 행성의 동족끼리 주인과 노예 관계를 만들 때에는 별 문제가 없어. 근본적으로 같은 체계를 밟아가니까. 하지만 외계인을 노예로 삼을 때는 얘기가 달라지지. 너희들은 스스로의 몸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나를 수용하고 운용하게 된단 말이야. 당장은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많아지고 새로운 기술도 배우게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마나들이 몸속을 흐르게 되는 거지. 그건 네모난 그릇에 동그란 물건을 억지로 구겨 넣는 것과 다름이 없어. 몸속에서 폭탄을 키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마나 수용력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아예 바뀌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결국 터지게 되어 있다고.”
“거짓말 하지 마라. 그렇게 해서 상급 전사가 된 이들 가운데 여태까지 문제가 되었던 이들은 아무도 없어. 터지기는 뭐가 터진다는 말이냐.”
진우는 벨푸의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되었던 이가 없다고? 사백년 전에 너희들이 디키오 마을에 쳐들어갔을 때에 모조리 몰살을 당할 뻔했었는데도? 내가 하나 물어보자. 디키오 마을의 참사가 발생한 뒤로 플레비크 본성을 다스리던 지도자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외계 행성을 정복하러 나섰던 놈들이 있었나?”
“없었지.”
노르호지가 진우의 말에 대신 대답을 했다. 그는 벨푸를 향해 간신히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향해 타이르듯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만해라. 벨푸. 우리는 저 녀석이 조르크 행성에서 뭔가를 배워오기 전에 차라리 지구로 바로 진격하는 게 나았어.”
그는 다시 진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외계인도 조르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이 없었지.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어떻게 그들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거지?”
진우는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는 마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지. 하지만 조르크에서는 방법을 달리했지.”
그는 바닥에 누워있는 벨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나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내 머리에서 마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디키오의 마구스가 마스바로크에게 그렇게 답답해하며 가르쳐주려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진우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나가 조용히 벨푸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불리젠 행성에서 그가 사용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마나 개입이었다.
벨푸의 머릿속에 있던 종속의 낙인이 지워지면서 순식간에 그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마나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마나들이 미친 듯이 그의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벨푸는 전신이 뒤틀리는 고통에 입을 딱 벌렸다.
그는 한동안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잠시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개의 행성을 지배하던 상급 전사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조르크 인들의 마나는 특별한 흐름이나 움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간적으로 이동하지. 그건 운동의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의 마나에 자연스럽게 간섭할 수 있었지. 그들의 공간 이동 기술은 몸만 순간적으로 이동시키는 게 아니야. 마나 그 자체를 움직일 수도 있어. 플리베크 전사들이 디키오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주변의 마나를 전사들의 몸 안으로 옮기고, 반대로 머릿속에 있던 너희들의 종속의 낙인을 밖으로 꺼내버렸지. 덕분에 디키오에 쳐들어갔던 전사들은 주인이건 노예건 모두 종속의 낙인이 지워지고 말았던 거야.”
진우는 죽어버린 벨푸의 몸에 강력한 양의 마나를 쏟아 부어 순식간에 하얀 재만 남겨버렸다. 노르호지는 쓰러진 채로 벨푸의 몸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우는 벨푸를 처리한 다음 노르호지에게 다가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은 꼭 너희들을 해치려고 했던 게 아니야. 그저 마나의 움직임을 해제시켜 힘을 쓸 수 없게 만들려고 했던 것뿐이지. 하지만 그게 너희들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던 거야. 주인이든 노예든, 머릿속에 있던 종속의 낙인이 해제되면서 모두 온몸의 마나가 흩어지고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면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지.”
진우의 손이 이번에는 노르호지를 향했다. 노르호지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디키오 마을의 마구스는 너희들에게 연민을 느꼈다고 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이용해서 억지로 능력을 키운 너희들은 결국 그것 때문에 모두 자멸하고 말았던 거지. 만약 너희들이 동족 간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맺으면서 플레비크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거야. 하지만 자신들의 강력한 특성을 믿고 무리하게 외계 행성으로 정복을 나서는 바람에 결국 급속히 강해지는 한편, 치명적인 약점을 함께 가지게 된 거지.”
노르호지의 머릿속을 진우의 마나가 강력하게 파고들어 개입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종속의 낙인이 순식간에 지워지면서 몸속의 마나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노르호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플레비크 본성의 지도자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방법을 쓸 수 없을 거다. 그들은 모두 동족들만을 노예로 삼았으니까.”
“알아.”
진우는 그의 말에 무심하게 대답했다. 노르호지는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마지막 말을 뱉었다.
“아니... 너는 몰라....”
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그 말을 마치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진우는 그의 시체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내가 미처 모르는 너희들의 숨은 비기가 또 있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나로서는 플레비크 인들을 그냥 둘 수가 없어. 그건 지구인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거든.”
진우는 노르호지의 몸에도 양의 마나를 퍼부어 그의 시체를 하얀 가루가 될 때까지 태워버렸다. 노르호지의 시체는 결국 흰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어지고 말았다. 진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첼스본이 남겼던 기록의 마지막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구스의 말에 의하면 디키오를 침략했던 플레비크 전사들은 외계인을 노예로 삼은 덕분에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마구스는 그들이 노예로 삼아도 아무런 이상 없이 강해질 수 있는 외계인들이 있다고 했다. 만약 마나가 하나도 없는 행성에서 자란 외계인이 헌터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의 마나 운용 방식에는 특정한 장벽이 없게 된다.
그런 헌터들은 플레비크 인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천적이 될 수도 있다. 만약 플레비크 인들에 의해 니코레임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마나가 전혀 없는 행성 출신의 헌터를 찾아라.
그런 곳에서 자란 이가 헌터가 될 수 있을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찾을 수만 있다면 유일한 대안이 될 것이다.’
진우는 그 기록을 읽었을 때 타르코스와 콴톤 의장을 비롯한 이들이 하필이면 마나가 전혀 없는 지구에서 와서 헌터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한 피엔다 행성에서 발견된 첼스본의 마지막 기록은 니코레임에 전해지지 않았다. 물론 첼스본이 니코레임으로 돌아간 뒤에 일종의 비망록을 남기기는 했지만 타르코스가 진우에게 준 그 비망록에는 그런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니코레임 행성을 회복시키면 외계인들과의 싸움에서 손을 떼고 싶었는데, 결국은 플레비크를 그냥 둘 수 없게 되었어. 그들이 자신들과 지구의 관계를 알든 모르든 말이야.”
지구에는 이미 적지 않은 헌터들이 존재했다. 차라리 지구에 헌터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면 플레비크 인들이 당장 지구를 점령한다고 해도 그들이 실제로 얻어갈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만약 단 한 명의 지구인 헌터라도 그들의 노예가 된다면 플레비크 인들이 지구인 헌터와 자신들의 특별한 관계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었다. 진우는 그런 위험을 그대로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진우는 간이 포털 장치에 플레비크의 좌표를 입력시켰다. 좌표는 플레비크의 제1지도자인 닐로의 거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맞추어져 있었다.
과거 매덤 행성에서 맞붙었던 투르가의 패드에서 얻어낸 정보였다. 잠시 후 포털에 검은 구멍이 생기자 그는 서슴없이 배낭을 메고 포털을 통과했다.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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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종장을 향해 갑니다. 끝까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