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플레비크 행성을 지배하고 있는 세 명의 지도자가 모두 제1지도자인 닐로의 집무실에 모였다. 그들은 다탁이 놓인 발코니에 앉아 닐로가 직접 끓인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발코니 너머의 정원에는 갖가지 모양과 색깔을 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 발코니에 내리쬐는 햇살이 제법 따가웠지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적당히 식혀주고 있었다.
좋은 날씨였다.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군. 가끔씩 내려다보면 피로가 풀리겠어.”
제2지도자인 미슬란트가 정원을 내려다보며 한가로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진우라는 자가 지구로 돌아왔다더군. 조르크 행성에서 공간 이동 기술을 배웠다고 들었네. 하찮은 지구인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녀석인 것은 틀림없어.”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제3지도자로 불리는 에드막이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닐로와 미슬란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미안. 오랜만에 모였으니 나도 조금 더 잡담을 하고 싶지만, 녀석이 언제 블리젠으로 쳐들어갈지 몰라서 말이야. 본론부터 먼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경치를 즐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에드막은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자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별로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닐로가 짧게 혀를 차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머지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노르호지와 벨푸가 진우라는 지구인을 막아낼 수 있을까?”
미슬란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조르크에서 공간 이동 기술을 배웠다지 않은가? 녀석이 만약 디키오의 마구스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블리젠에 있는 그 두 녀석으로는 진우를 처리하지 못할 거네.”
그의 말을 들은 닐로와 에드막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막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녀석이 블리젠의 두 바보를 처리하면 거기서 멈출까, 아니면 이곳까지 쳐들어올까?”
에드막의 말에 닐로와 미슬란트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뜻의 물음이 담긴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닐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거야 진우라는 녀석이 어디까지 생각하느냐가 문제겠지. 만약 지금까지 상대했던 오염된 상급 전사들과 우리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고 대뜸 이곳으로 쳐들어온다면 그게 녀석의 마지막이 될 거야. 물론 우리가 힘을 합친다는 전제에서 말이야. 반면에 우리가 칠백 년 전의 선조들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거꾸로 우리가 당하고 말겠지.”
그 말에 에드막이 신경질적으로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아직도 자네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어. 우리는 칠백 년 전의 선조들과도 다르고, 과거 조르크 행성에 쳐들어갔다가 몰살당했던 그 작자들과도 전혀 같지 않아. 자네도 그건 알잖아? 꼭 힘을 합해 녀석을 상대해야겠나?”
미슬란트가 손을 들어 씨근대는 에드막을 말렸다.
“우리가 비록 지금까지 어떤 외계인도 노예로 삼지 않았다고 해도, 각각의 힘으로 녀석과 일대일로 승부를 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녀석과 일대일로 싸우지 않을 거야.”
닐로가 미슬란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미슬란트와 에드막의 고개가 동시에 그를 향해 휙 돌아갔다. 에드막의 얼굴에는 어딘가 분노의 기운이 서려 있었지만, 닐로를 지지하던 미슬란트 표정 역시 그리 달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닐로의 말은 단호했다.
“녀석이 만약 블리젠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직접 찾아온다면, 그 때는 반드시 우리 셋이 함께 놈을 상대해야 해. 만약 우리가 플레비크를 통째로 내주고, 이곳의 동족들을 몰살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에드막이 인상을 찌푸리며 닐로의 말에 항의했다.
“그럼 내가 먼저 혼자 녀석을 상대해 보겠네. 만약 내가 실패하면 그때 가서 자네 둘이 함께 녀석을 상대하는 것은 어떤가?”
닐로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실렸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에드막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분노와 비웃음, 짜증과 답답함 등의 기색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칠백년 전에 마스바로크가 우리 행성에 찾아왔을 때, 이곳에는 무려 다섯 명의 지도자가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 명씩 일대일로 그와 대결을 벌여 모두 패했어. 만약 그때 마스바로크가 대결에서 승리한 권리를 사용하여 다섯 명의 지도자를 모두 죽였다면, 우리는 그대로 몰살을 하고 말았을 걸세. 그랬다면 지금 여기서 이렇게 잘난 척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자네들과 나는 존재할 수 없었겠지.”
미슬란트와 에드막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닐로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체념한 듯한 표정을 읽은 닐로가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당시 단 두 명이라도 한꺼번에 마스바로크에게 달려들었다면 녀석의 여행은 이곳 플레비크에서 끝났을 거야. 하지만 선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덕분에 당시 우리는 이길 수 있는 전력을 가지고도 어처구니없이 모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지. 만약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나는 절대로 동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야.”
닐로의 말에 에드막이 다시 반발했다.
“이봐, 닐로. 하지만 진우 녀석이 예전의 마스바로크보다 더 강자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노르호지와 벨푸가 실력 있는 상급 전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전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자네도 잘 알잖아? 이건 자존심과 명예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고.”
에드막의 말에 닐로가 피식 웃었다. 그는 에드막을 바라보며 마치 타이르듯이 이야기를 했다.
“이봐, 에드막. 마스바로크가 우리 행성을 다녀간 뒤로 플레비크 인의 자존심은 근본적으로 파괴당했어. 우리가 니코레임을 정복했다고 해서 그게 다시 회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도 결국 우리는 나르호지와 벨푸라는 두 명의 상급 전사를 동원해서야 레비스 그 자를 쓰러트릴 수 있었지. 만약 계속해서 레비스에게 일대일 대결을 고집했다면 결국 지금 여기 있는 우리까지 모두 그의 손에 죽고 말았을 거야. 인정하라고. 진우라는 그 자식은 예전의 레비스보다 더 강해. 자존심을 살리고 싶나? 그럼 먼저 목숨부터 살릴 생각을 해. 우리가 죽으면 플레비크 인들이 죄다 죽는 거라고.”
닐로의 말에는 비장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미슬란트와 에드막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어떤 반론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확신이 드러나 있었다. 미슬란트는 그의 얼굴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닐로를 향해 물었다.
“자네, 혹시 금기마저 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물론이고 자네마저 미치고 말 수도 있어. 심할 경우 싸움에 이기고 나서도 동족이 몰살당하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그건 칠백년 전에 마스바로크에게 패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야.”
닐로가 몸을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미슬란트에게 바짝 가져다 대었다.
“장담하지만, 진우라는 녀석은 블리젠에서 멈추지 않을 거야. 반드시 이곳으로 올 거라고. 나는 녀석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생각이다. 자네들은 어떻게 할 건가? 칠백 년 전의 선조들처럼 체면을 지키다 몰살을 당할 텐가? 아니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서 동족의 생존을 지킬 텐가? 나는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아. 그럴 수 있는 자격도 방법도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들은 이 행성의 지도자야. 지도자면, 지도자에 걸맞은 생각을 하길 바라네.”
닐로의 발코니에 불어오던 바람이 뚝 멈췄다. 꽃향기조차 집어삼킬 것 같은 무거운 침묵만이 햇살이 따가운 발코니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러자 에드막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깨려고 했다.
“자자, 너무 심각해하지 말자고. 블리젠에 있는 노르호지와 벨푸가 진우라는 녀석을 쓰러트리면 우리가 이렇게 헛된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잖아?”
그 말에 닐로가 비웃음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놈들이 진우를 쓰러트린다고? 이봐, 자네도 알잖아. 외계인을 노예로 삼은 자들은 절대로 조르크 인들을 이길 수 없어. 진우가 만약 조르크에서 뭔가를 얻었다면, 이 싸움은 결과를 보지 않아도 뻔해. 그들은 절대로 진우를 이길 수 없어.”
닐로의 집무실에 다시 차가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 * * * *
진우가 포털을 통과해서 블리젠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침의 차가운 기운이 모두 가시고, 하늘의 태양이 한참 하늘 꼭대기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진우는 벨푸가 자신의 노예전사를 통해 보내었던 편지에 적힌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애초에 포털 이동 장소를 약속 장소와 멀지 않은 곳으로 잡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진우는 발목 근처까지 오는 풀들이 깔린 넓은 벌판에 이를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 명의 블리젠 하급 전사가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군.”
진우는 그들을 향해 공간 이동을 통해 다가갔다. 갑자기 눈앞에 사람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는 전사들에게 진우는 니코레임어로 이야기를 했다.
“지구에서 온 진우라고 한다. 가서 너희 주인에게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라.”
미리 들은 얘기가 있었는지 그들은 진우에게서 황급히 멀어지더니 어딘가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대략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멀리서 먼지 구름을 일으키면서 달려오는 무리들이 보였다. 진우는 태연히 제 자리에 선 채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이천여 명에 달하는 블리젠의 전사들이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그를 에워쌌다.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으로 볼 때, 그들 중의 일부는 중급 전사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하급 전사들이었다.
진우는 이곳의 하급 전사라고 해도 지구의 중급 헌터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행성 전체에서 끌어 모았다고 할 수 있겠군. 내 생애 가장 드센 적들을 상대하게 되는 셈인가?”
진우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블리젠 인들과는 외모가 전혀 다른 두 명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노르호지와 벨푸였다.
“부르기는 했지만 정말 올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는데 다소 뜻밖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만나서 반갑다. 나는 노르호지다. 옆에 있는 전사는 벨푸라고 하지. 니코레임과 이곳 블리젠을 지배하는 상급 전사들이다.”
노르호지가 먼저 진우를 향해 자신들을 소개했다. 진우는 그들을 향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불렀으면 당연히 오리라고 기대했어야지. 알겠지만 난 지구에서 온 진우다. 그런데 이게 다 뭐지? 대충 보니 이천 명은 되어 보이는군. 나를 상대로 집단전이라도 벌일 셈인가? 개싸움을 하자고 나를 부른 거야?”
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노르호지가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 이들은 모두 관람객들이네. 싸움이 끝나고 나면 증인이 되기도 하겠지만 말이야.”
“그냥 구경하라고 이들을 불렀다고?”
진우가 웃기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번에는 벨푸가 나섰다.
“물론 단순히 구경하는 건 아니지. 이들은 모두 우리를 응원할 거야. 아주 열심히.”
진우의 눈길이 벨푸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그 응원에는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나를 직접 전해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겠군.”
진우의 말에 노르호지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호오~.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 없잖아. 원래 이곳을 다스리던 투르가가 내 손에 죽음을 당했는데. 하지만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왔지. 싸움도 일대일이었고 말이야. 플레비크의 전사들은 자존심이 강해 집단전은 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그동안 많이 오염이라도 된 건가?”
진우의 말에 노르호지와 벨푸의 얼굴이 잠시 검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안색을 회복하고 진우를 향해 말했다.
“한 사람으로 안 되면 두 사람이 상대한다. 그건 우리가 과거 니코레임을 점령할 때부터 이미 써 온 방법이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지. 그만큼 네 녀석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지. 영광으로 알아라.”
진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번에는 단순한 이대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네 말이 맞아. 아주 복잡하게 변했지. 너를 없애지 않으면 우리도 살 길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벨푸의 말이 끝나자 진우는 자신이 메고 있던 배낭을 벗어 멀찌감치 던져두었다. 그는 이번에 오면서 검과 활 같은 무기를 전혀 들고 오지 않았다. 앞으로 나서는 그의 손에 실체화된 마나검이 생겼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시작하자고.”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살벌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