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17. 행성 블리젠
조승운은 하루 만에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이틀이 지나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 퇴원했다. 진우는 그 며칠 동안 줄곧 병실을 지켰다.
조승운이 계속해서 그만 돌아가서 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최근 몇 년 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수련은 잘 끝났느냐?”
“네. 이젠 마무리 된 것 같습니다.”
“원하던 것은 얻었느냐?”
“뭔가 얻기는 얻었는데, 그게 원하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우의 대답에 조승운은 미소를 지었다. 대견한 녀석이었다.
진우는 헌터 학교 기숙사 뒤편의 언덕에서 날마다 혼자 연습을 할 때부터 자신을 놀라게 했었다. 정말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녀석이었고, 가르치는 내내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가 평생 동안 키워낸 제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늦게 얻어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게 해 준 제자가 바로 진우였다. 그리고 지금 그 막내 제자가 자신의 입으로 이제는 동조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네가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지 않았느냐. 그런 경지라는 게 거기 가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무엇이 어떨지 알 수가 없지.”
“그런 것 같습니다.”
조승운은 미소를 띤 얼굴로 진우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병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현이에게 이야기 들었다. 블리젠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네. 조만간 떠날 생각입니다.”
“거기 있다는 두 명의 플레비크 상급 전사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냐?”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면?”
진우는 그 말에 선뜻 대답을 못했다. 조승운이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현이에게는 말 하지 마라. 네가 블리젠으로 간다는 것만으로도 그 녀석은 밤에 잠도 거의 자지 못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
조승운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한 명을 죽이면 수천, 수만 명이 함께 죽는다니... 그 녀석들은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진화한 것일까? 화엄경에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는 말이 나온다. 서양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고 하더군. ‘One for all, All for one.’이라고 하던가?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하더라.
뭐, 어찌 보면 전혀 다른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난 그 말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게 플레비크 녀석들처럼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묶여버리면 아주 끔찍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그는 손을 뻗어 진우의 손을 잡았다.
“블리젠에서의 일이 끝나면 다시 이리로 오지 않고 바로 플레비크로 떠날 거냐?”
“네. 그럴 생각입니다. 일을 끝까지 마무리 짓고 나서 돌아오겠습니다.”
“생각보다 괴로울 거다. 이겨낼 자신이 있느냐?”
진우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힘든 싸움이 될 지는 자신으로서도 쉽게 예측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자신이 직접 상대할 사람이 숫자만 따진다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는 되도록 플레비크의 상급 전사들만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결국 수많은 외계인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묶인 그들의 특별한 존재 방식으로 볼 때, 상급 전사들을 처리하면 그 밑의 노예전사들은 다른 행성에 나가 있지 않은 이상 모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비크의 경우 한 행성의 종족이 몰살을 당하는 결과를 낳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각오를 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과연 자신이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조승운은 진우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자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항상 옳은 일만 하려고 하지 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라. 그냥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거라. 제아무리 현명한 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방법 밖에 없다. 어떤 일이든 그저 네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하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 가거라. 소현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다.”
진우는 조승운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그의 주변에는 볼 때마다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자신은 그들에게 돌려준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갚으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지구를 떠나면 스승에게 돌아와서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할 수 있을까? 갚을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 *
진우가 지구로 돌아온 지 오 일 째 되던 날 소현은 케이튼으로 떠났다. 그 며칠 동안 소현은 아버지 장박사와 함께 대전에 머물렀다.
진우는 소현의 몸속에 있는 마나의 흐름을 다시 조정해주고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그녀에게 마나 시술을 해 주었다. 덕분에 소현의 몸은 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체내의 마나 수용력 역시 조금 더 늘어났다.
“완전한 중급 헌터가 될 때까지 케이튼에 머무를 거야. 그 뒤에는 최현 교관님과 함께 직접 헌팅을 다닐 생각이야.”
소현은 지구를 떠나기 전에 장박사와 함께 진우의 집을 찾아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최현 선생님하고?”
최현은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 있는 상급 헌터였다. 게다가 그는 이니스프리에서 있었던 일 덕분에 많은 돈을 벌었다.
굳이 위험한 헌팅에 나서지 않아도 평생을 놀고먹으며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전에도 그랬지만 최현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남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서 돌아다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소현과 함께 헌팅에 나선다는 말을 듣자 진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권일도 교관님하고 나르샤 교관님도 함께 하기로 했어. 조세연 박사님과 하는 수련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 모두 그게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고 했거든.”
권일도와 나르샤는 진즉에 교관을 그만두고 몇몇 헌팅 팀과 함께 계속해서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나르샤는 아직 중급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권일도만 해도 어엿한 상급 헌터였다.
그들이 소현과 함께 하나의 팀을 만든다면 제법 괜찮은 사냥 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단순히 괜찮다고만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팀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진우는 소현의 손을 꼭 쥐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내가 꼭 좋은 선물을 할게.”
소현이 방긋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선물은 필요 없고 약속만 지켜주면 돼. 돌아오면 나하고 함께 외계 생물을 탐사하러 다니겠다고 한 거 잊지 않았지?”
진우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 *
소현은 다음날 케이튼을 향해 떠났다. 진우는 며칠 더 지구에 머물면서 정태와 도훈, 차연희와 남희정까지 모두 헌터 아파트 단지에 있는 수련실로 불러 모았다. 거기서 그는 며칠 동안 그들의 몸에 일일이 마나 시술을 해 주고, 상태가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정태는 그 동안 자신이 도훈보다 더 경지가 높다는 사실에 으스대며 지냈는데, 이번의 마나 시술로 인하여 콧대가 조금 주저앉고 말았다. 도훈과 차연희, 심지어 남희정마저 진우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비율이 정태보다 높았던 것이다.
시술이 모두 끝나고, 며칠의 안정 기간이 지나자 네 사람은 모두 하급 헌터가 될 수 있었다.
“저 녀석 꼭 어디 죽으러 가는 것 같네.”
도훈은 진우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머지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죽으러 가다니?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도훈의 말을 들은 정태가 볼 멘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차연희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도훈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주변을 정리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그동안 계속 미뤄왔던 일을 처리한다고 할까?”
“그럼 우리가 정리해야 하는 주변 일이었다는 거야?”
정태가 차연희의 말조차 싫은 기색을 내보이자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다. 우리가 말 잘못 했다. 네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그거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정태가 발끈해서 소리를 쳤다. 도훈은 그냥 고개만 저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개중에는 거의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 * * * *
진우가 타르코스 소장을 찾은 것은 소현이 케이튼 행성을 떠나고, 친구들에게 마나 시술까지 모두 해 준 다음이었다. 타르코스 소장은 그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부터 만나자고 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진우는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정리될 때까지 일부러 그를 찾지 않았다.
타르코스 소장과는 지구를 떠나기 전에 반드시 만나야 했지만, 당분간은 자신의 일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구로 귀환한 지 열흘 정도 지나서야 진우는 헌터 양성소로 타르코스 소장을 찾아갔다.
“자네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네.”
타르코스 소장은 진우가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다짜고짜 그의 손을 붙잡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자신이 직접 그의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얘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다려달라고만 했던 진우였다.
타르코스로서는 그런 진우의 반응이 자못 불안하기까지 했었다. 진우는 복잡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선언하듯 용건부터 툭 내뱉었다.
“내일 블리젠으로 가겠습니다.”
타르코스는 진우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자네 혼자 가겠다는 건가?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네. 현재 니코레임을 지배하고 있던 두 명의 상급 전사가 모두 블리젠에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노르호지와 벨푸 두 명입니다.”
타르코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니코레임은 저절로 해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겠군.”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구에 와서 수십 년 동안 계획했던 일들이 모두 마무리되는 것이고 말이야.”
“그런 셈이지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진우는 타르코스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후우~. 미안하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군. 고맙네.”
진우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니코레임 인들은 지구에 와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장기간의 계획을 세워 지구에 발전된 문명을 전해주고, 그 대가로 헌터 학교를 건설해서 지구인들을 상대로 수많은 헌터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 모든 계획의 끝에 진우가 있었다.
만약 진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계획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미루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부족하더라도 지구의 헌터들에게 도움을 청해 니코레임 인들과 함께 자신들의 고향을 향해 무모한 진격을 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우의 선언은 그들조차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니코레임 인들은 물론, 지금도 지구의 정지 궤도 상에 위치하고 있는 수많은 비행선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니코레임 인들이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블리젠에 함께 갈 수 있겠나?”
타르코스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굉장히 많은 헌터들을 훈련시켰네. 모두 장래가 유망한 니코레임의 젊은이들이지. 그들은 지구 주변의 정지 궤도에 있는 비행선 안에서 수십 년 동안 훈련을 받았네. 고향을 되찾는 싸움에서 설사 목숨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 싸움은 저 혼자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차피 상대해야 할 적이 상급 전사 둘 뿐이니까요. 많은 인원이 참여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우는 타르코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되찾는 최후의 싸움에 자신들도 참여하고 싶어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명분을 쌓는다는 점 이외에는 그들이 특별히 도와줄 일이 없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노르호지와 벨푸, 그리고 자신의 싸움에 의해서 결말이 날 일이었다.
니코레임 인들의 피가 거기에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곳에 있는 하급 노예 전사들이 노르호지와 벨푸에게 힘을 보태주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알겠지만 블리젠 인들에게는 동료에게 마나를 전송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있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기술도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어차피 쓸만한 전사들은 모두 노예로 만들었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니?”
진우는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자기보다 약한 전사를 노예로 만들어 주인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은 플레비크 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들이 전 우주를 상대로 침략과 정복을 시도할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장점이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겁니다.”
타르코스는 말없이 진우를 바라보았다. 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진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제가 동조의 단계를 벗어나면서 확실히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저는 노예가 된 모든 전사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는지는 묻지 마십시오. 굉장히 긴 설명이 필요하고, 어떤 것은 설명을 드리기도 힘든 것도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저를 믿어주시고 그냥 혼자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니코레임의 젊은 헌터들은 본성을 회복했을 때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반대해도 자네는 내일 무조건 블리젠으로 떠나겠군.”
“네. 그럴 겁니다. 니코레임의 헌터들이 블리젠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싸움이 모두 끝나 있을 겁니다.”
타르코스는 진우의 눈을 한참동안 주시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콴톤 의장에게 자네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타르코스와의 대화를 마친 진우는 다음날 블리젠을 향해 포털을 통과했다. 포털에는 타르코스 소장과 급히 연락을 받고 대전에 도착한 콴톤 의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배웅했다.
콴톤 의장은 아무 말 없이 진우의 손을 꽉 잡았다. 진우 역시 말없이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포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타르코스와 콴톤은 그가 포털을 통과해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