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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헌터-222화 (222/235)

222화

진우는 그날 저녁 침실로 쓰였던 방 하나를 간신히 정리해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다음날은 하루 종일 집을 청소하고 수리하느라 보내야 했다.

워낙 오래된 집이라서 수리하느니 차라리 전부 부수고 다시 짓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몇 군데 꼭 필요한 부분을 손보고 나자 그런대로 당분간 지낼 만할 상태가 되었다. 지붕을 고쳐 비가 새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노천에 천막을 치고 자는 것보다는 나았다.

“후우~. 이번에는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리려나.”

진우는 피엔다 행성에서 가져온 통역기를 이용해서 칼체와 마스바로크의 대화를 번역했다. 하이뇰이 천 년 전의 사람이라서 그런지 통역기는 칠백 년 전의 조르크 문자를 별 어려움 없이 해석해 냈다.

진우는 니코레임 어로 번역된 두 사람의 대화를 날마다 읽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세 개의 달이 뜨면 밤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에 들었다.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에 올랐던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대화의 내용이 어렵네.”

처음 그들의 대화를 읽었을 때는 굉장히 쉬운 말로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그다지 난해한 단어나 개념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심오했다. 더구나 대화 중간 중간에 시도 때도 없이 주제가 여기저기로 가지를 치며 갈라져나가는 바람에, 한참을 읽다보면 간혹 정신이 멍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하루에 한 번은 그 두루마리를 읽으며 명상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씩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냥이나 채집을 하는 것 이외에는 조용히 독서와 명상으로 소일하는 은거 기인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  * * * *

두루마기에 적힌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그 가운데에는 지배의 단계에 대한 문답이 많았다. 가령 이런 것이었다.

“마구스께서는 어떻게 해서 지배의 단계에 오르셨습니까?”(마스바로크)

“지배의 단계가 무엇인가?”(칼체)

“마구스께서 현재 계신 곳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 내 조그만 집에 있네.”

“마구스께서는 하늘에 떠 있는 세 개의 달에 모두 가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나는 녹티카, 자나, 이그니스를 모두 구경했네.”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가려면 지배의 단계에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자네가 말하는 그 단계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네. 우리는 아무도 단계를 따지지 않네. 어린아이와 어른은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무슨 단계를 뛰어넘듯이 변하는 건 아니네.”

“그럼 단계의 도약이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마도 자네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겠지.”

진우는 이 대목에서 조금 헷갈렸다. 자신은 분명 신체적 변화까지 겪으면서 일종의 도약을 경험했다. 그런데도 칠백년 전의 마구스인 칼체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단계가 정말 없다는 건가, 아니면 겉으로 드러나는 단계가 있어도 그것이 진정한 도약은 아니라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조르크 행성의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마구스께서는 마나를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마구스께서 달에 가실 때에는 몸속의 마나를 어떻게 움직이셨습니까?”

마스바로크의 질문은 진우로서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체내의 마나 운용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칼체의 대답은 다소 엉뚱하기까지 했다.

“나는 어떻게도 마나를 사용하지 않네. 물론 마나가 나를 사용하지도 않지.”

“하지만 달에 가시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분명히 몸속의 마나가 특별한 방법으로 움직이셨을 거 아닙니까?”

“움직였지. 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았네. 자네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아는가?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네. 하지만 작년의 봄은 올해의 봄과 같지 않지. 살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삶의 바뀌어 죽음이 오고, 죽음이 지나면 다시 삶이 시작되네. 하지만 지금의 삶은 예전의 삶과는 또 다르지. 마나 역시 그러하네. 내가 지금 다시 달에 가려 하면 내 몸의 마나가 움직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전에 내가 달에 같을 때의 움직임과는 다르네. 거기에 특별함이 있는가? 나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마나의 움직임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까? 마구스의 마음이 일면 그에 따라 마나가 움직이겠지요. 마구스의 마음이 늘 일정하다면 마나의 움직임 역시 그럴 것입니다.”

“내 마음은 일정하지가 않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몸의 마나가 나를 배반한 적은 없었네. 달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지.

그럼 도대체 마구스는 어떻게 자신의 마나를 통제한다는 말인가? 진우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나는 몸속에 존재하고 또 흐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가 생각한 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마음이 일정하지 않고, 마나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은데 달처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순식간에 도달하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고? 그리고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아무런 이상 없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마구스께서는 마나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내가 보니 자네들은 마나를 뜨겁고 차가운 두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고 거기에 다시 조화를 넣어 셋으로 나누기도 하더군. 그렇게 하고자 마음 먹으면 다섯 가지나 열 가지, 혹은 백 가지로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마나는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니며 조화의 구애를 받지도 않네. 마나가 있는 곳에는 해와 달도 비추지 않고 추위와 더위가 범하지도 못하며 변화도 없고 오고 가는 것도 없다네. 그러면서도 위로는 저 푸른 하늘을 뚫고 달에 이르고 아래로는 이 행성의 반대편까지 한 번에 도달할 수 있지. 마나는 끝없이 비어서 채울 수 없기도 하고, 조그만 틈도 없어 아무런 간격이 없네. 자네는 마나를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마나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네는 이미 마나에서 벗어나게 될 걸세.”

진우는 날마다 명상을 계속했다. 피스쳅스는 이따금 진우가 머무는 작은 집에 들러 그를 살피다 돌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진우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명상에 빠져 깨어나지 않자 그 역시 집 앞에 있는 개울 건너편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머물기 시작했다.

깨지 않는 명상에 들어간 뒤부터 진우는 물도 마시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피스쳅스 역시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진우의 집 앞에서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디키오의 다른 노인들이 피스쳅스의 곁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천여 명이라고 얘기되는 마을의 노인들 전부가 그의 집 부근에 자리를 잡고 진우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들은 서로 별말 없이 인사를 나누고는 조용히 앉아 진우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  * * * *

벨라토르는 미칠 듯한 답답함을 꾹꾹 참으며 무려 두 달을 비카리토의 집에 머물며 그의 일을 도왔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을 도왔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진우의 흉내를 내어 마을 사람들이 우물을 파거나 커다란 바위를 옮기는 등의 큰일을 할 때마다 자기 일처럼 나서 돕기도 했다. 마을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우와는 달리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공간 이동 기술을 배울 수도 없었다.

그는 진우가 두 달 만에 공간 이동 기술을 배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도 최소한 두 달은 이곳에 머물 각오를 했다. 만약 그런 각오가 없었다면 두 달은 고사하고 불과 이틀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르크에서의 나날이 그에게는 수련이 아니라 형벌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두 달 간의 고행 아닌 고행을 마친 그가 결국 더 이상의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비카리토에게 귀환을 알리자, 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생각보다 오래 참았군. 내가 보기에도 자네는 우리의 기술하고는 큰 인연이 없는 것 같네.”

“덕분에 그동안 먹고 자는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잘 가게.”

그것으로 끝이었다. 벨라토르는 두 달이라는 기간이 완전히 헛수고였던 것으로 판명이 나자 어찌나 화가 나던지 하마터면 비카리토에게 살기를 뿜어낼 뻔 했다.

조르크 행성인들에게 절대로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말라던 벨푸의 당부가 없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화를 꾹꾹 참으며 조르크 행성을 방문한 뒤 두 달 만에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블리젠 행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고 초라한 귀환이었다.

*  * * * *

“벨라토르라는 그 멍청이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조금 전에 들었네.”

노르호지는 벨푸의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다. 벨푸는 자신의 집무실 책상을 등진 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제 돌아왔지. 진우라는 녀석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두 달 동안 라우라에서 있었다는군.”

그는 노르호지에게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노르호지가 그의 책상 앞에 있는 손님용 소파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그 한심한 자식은 도대체 진우도 없는 라우라에서 두 달 동안 뭘 하고 있었다던가?”

노르호지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벨푸는 창을 떠나 노르호지의 맞은편 소파에 앉더니 피식 웃었다.

“그곳 사람들 일을 도와줬다더군. 함께 밭을 매고, 물을 긷고, 아이들을 쳐다보고... 뭐 그런 일을 하면서 보냈다고 했네.”

노르호지는 기가 막혔다. 뭘 했다고?

“도대체 그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게으른 노예 자식은 어째서 그런 해괴한 짓거리를 하면서 두 달씩이나 시간을 낭비했다는 거야?”

“진우 그 자가 그런 식으로 공간 이동 기술을 배웠다더군. 그래서 결국은 벨라토르가 라우라 마을에 갔을 때에는 이미 디키오로 떠난 뒤였고 말이야.”

노르호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공간 이동 기술을 배웠다고? 진우 그 녀석이?”

“그래.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다시 입을 연 노르호지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그전에...”

벨푸는 두 손을 깍지 껴서 자신의 턱밑에 받쳐 들었다.

“자네가 보냈던 밀레스는 어떻게 된 건가? 아직 소식이 없나?”

노르호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당한 것 같아. 설마 지구 같은 허접한 행성에 중급 전사를 상대할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어. 지구에 있는 전사 가운데 쓸 만한 놈이 진우 그 자 하나뿐이 아니라는 게 증명된 거지.”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벨푸의 물음에 노르호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아. 먼저 우리가 노예 전사들을 모두 이끌고 지구로 쳐들어가는 방법이 있지. 만약 그렇게 하면 진우라는 녀석도 지구로 돌아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거야.”

“가능은 하지. 이제 하급 전사들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는 것도 거의 완료가 되었으니까. 천 명 정도는 동원할 수 있을 거야.”

“차라리 니코레임에 있는 노예들을 끌고 가는 게 낫겠군. 두 곳 모두를 동원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양쪽의 지배권을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마 본성에서 허락하지 않을 공산이 커. 그렇다고 한쪽의 노예만 동원하면 솔직히 승산이 분명하지 않아. 마나를 보충할 방법도 없고, 그곳에 있는 니코레임 인들도 모두 상대해야 하니까. 만약 지구에 있는 하급 전사들의 수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다면 굉장히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어.”

“조르크로 쳐들어가는 건?”

벨푸의 말에 노르호지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거야 말로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격이지. 녀석이 지금 디키오 마을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곳에 가는 순간 우리는 몇 백 년 전의 치욕을 되풀이 하게 될 거야.”

“그럼 니코레임으로 다시 물러나서 마냥 기다려야 하나?”

“거기서 지구에 있는 니코레임인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걸 기다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블리젠에 대한 지배권은 영원히 포기해야 하네.”

벨푸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가 노르호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벨라토르 녀석을 디키오 마을로 직접 보냈네.”

노르호지의 눈이 커졌다.

“왜? 놈은 진우라는 자를 상대할 실력이 안 돼.”

“진우와 싸우라는 뜻이 아니야. 놈은 전령으로 간 걸세.”

“전령이라니? 무슨 말을 전한다는 건가?”

벨푸가 씩 웃음을 지었다.

“진우라는 녀석은 우리가 지구에 있는 녀석의 지인들을 죽이거나 납치하려고 했던 시도가 실패했다는 걸 아직 모르지. 그래서 벨라토르에게 가서 본래 하려던 협박을 하라고 했네. 블리젠으로 당장 오지 않으면 우리가 실패했던 그 일을 지금부터 하겠다고 말이지. 여차하면 자네와 나 둘이서 지구에 갈 수도 있다고 전하라고 했어.”

“그러다가 녀석이 이곳이 아니라 지구로 먼저 가면?”

노르호지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에 벨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자신의 지인들이 습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이리로 쳐들어올 수도 있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 만약 녀석이 그때 가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말 지구로 직접 가야할지도 몰라. 그게 아니면 이곳을 포기하고 니코레임으로 물러나야 하니까. 정 안 되면 플레비크 본성에 있는 지도자들과 새로 담판을 짓든가 해야겠지.”

두 상급 전사는 서로를 마주보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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