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디키오 마을은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넓었다. 천여 명의 노인들 가운데 백 명 정도는 섬 동쪽의 커다란 호숫가에 거처를 정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섬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혼자만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 면적이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정도의 넓이였다. 한 마디로 평소에는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디키오 마을이 있는 섬에는 다른 마을이 없었다.
라우라 마을의 비카리토처럼 디키오의 마구스인 피스쳅스 역시 차를 좋아했다. 진우는 그의 거처에서 붉은 색이 감도는 홍차와 비슷한 차를 함께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수련을 하고 있다는 거군. 그 지배의 단계인가 하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피스쳅스는 진우에 대해 큰 호기심을 나타냈다. 외계인이고,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데도 나이가 너무 젊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우가 언급한 지배의 단계라는 말도 그에게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었다. 그는 진우가 디키오를 찾아온 이유를 궁금해 했다.
“지금은 동조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고?”
“네.”
“그 동조의 단계라는 건 어떤 것인가?”
“몸 밖의 마나를 제 의지에 따라 실체화시키거나 조종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진우는 자신의 주변에 십여 개의 마나 송곳을 만들어 띄워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마나를 움직여 작은 토끼 모양의 동물을 실체화시켰다. 상대의 몸에 있는 마나를 조종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걸 보여주려면 피스쳅스의 몸에 무례를 범하는 수밖에 없었다.
피스쳅스는 진우가 보여준 기술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더니 이내 껄껄대며 웃었다.
“대단하군. 자넨 정말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그는 숨김없이 감탄을 드러내며 진우의 솜씨를 칭찬했다. 아마 조르크에 오기 전이었다면 진우 역시 자신의 재주에 자부심을 드러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은 어린 아이들조차 공간 이동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이곳 사람들이 더 신기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어린아이들조차 자연스럽게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그 기술을 배웠지만 솔직히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도 자신이 없어요.”
“아니야. 자네는 제대로 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진우는 정말로 자신의 공간 이동 기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르크 인들의 공간 이동 기술은 이동하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나의 소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하지만 피엔다의 하이뇰은 지배의 단계에 들 경우 아무리 먼 거리를 이동해도 마나를 크게 쓸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이뇰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판단에는 어느 정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고 보았다.
피엔다는 마치 재미있는 친구를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흠... 나이에 비해 너무 빨리 성취를 얻으면 대개 교만해지기 쉬운데 자네는 오히려 그 반대로군. 정 그렇게 불안하면 나에게 한 번 자네의 기술을 보여주지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그럼 어디 다른 곳으로 가서 할 텐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너무 부끄러워서 남들에게는 보여주기도 싫은 건가?”
“아닙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스쳅스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바위 옆에 나타났다. 그러자 피스쳅스가 손뼉을 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단하군. 정말 깔끔한 공간 이동이야. 그만하면 내가 보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데?”
진우는 피스쳅스의 집으로 돌아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목표는 지배의 단계에 드는 것이었다. 그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의 기술은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그런데 자네는 오늘 공간 이동을 몇 번째 하는 건가?”
피스쳅스는 진우에게 차 한 잔을 더 따르며 물었다.
“세 번째입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 오늘 벌써 두 번이나 공간 이동을 했거든요.”
“그럼 앞으로 몇 번 더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글쎄요. 이동 거리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아마 멀지 않은 거리라면 두세 번 정도는 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흠... 그것 역시 대단하군. 몸에 지닌 마나가 도대체 얼마나 많기에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 자네 어디 가서 괴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겠군.”
진우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칭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구스께서는 하루에 몇 번이나 공간 이동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나 말인가? 흠.. 어디 가만 있자. 글쎄, 한 열 댓 번 정도? 그걸 세 본 지가 정말 오래되었군. 아마 지금이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진우는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열 댓 번이라고? 그건 진우도 불가능한 횟수였다.
지금 그의 몸 안에는 마나 크리스털 다섯 개에 해당하는 마나를 지닌 마나 기관이 있었다. 게다가 몸 안에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마나량 역시 웬만한 마나 크리스털보다 많았다.
그동안의 수련으로 인해 마나 수용력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노인은 그런 자신보다 더 많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겉으로 느껴지는 마나량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이 영감님도 이미 동조의 단계에 들어 자신의 마나를 숨길 수 있는 건가?“
진우가 경악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피스쳅스는 손을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군. 하지만 아닐세. 내 몸의 마나는 지금 자네가 느끼는 그대로야. 우리 조르크 인들은 몸 안에 그다지 마나를 많이 갈무리하지 못하네. 내가 공간 이동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어.”
“그럼 어떻게...?”
진우가 차마 대놓고 묻기 애매해 말을 흐리자 피스쳅스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한가? 그럼 나를 따라오게. 자네에게 구경시켜 주고 싶은 곳이 있네.”
피스쳅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진우가 자신을 따라오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진우는 얼떨결에 일어나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를 따라갔다.
* * * * *
벨라토르는 라우라 마을에서 며칠을 더 묵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촌장인 비카리토에게 공간 이동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을 했다.
진우라는 지구인이 배웠다면 자신이 배우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오기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며칠 동안 노인의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카리토는 진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하루에 한 번씩 공간 이동 기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벨라토르는 그의 시범을 통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진우라는 자가 정말로 이렇게 촌장님의 시범을 보는 것만으로 그 기술을 배웠다는 말씀입니까?”
벨라토르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약간 짜증이 실린 목소리로 비카리토에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그러자 촌장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 친구는 매일 마을 사람들을 구경하더군. 특히 어린 아이들을 말이야. 나와 함께 밭을 매거나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지. 그러더니 두 달 만에 갑자기 공간 이동 기술을 쓸 수 있게 되었네.”
벨라토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블리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촌구석의 사람들과 함께 일을 도우면서 어린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한다고? 자신은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블리젠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주인인 벨푸에게 뭐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그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그 자와 똑같이 해 보겠습니다.”
“그러시든가.”
비카리오는 그의 말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미를 들고 밭을 향해 나섰다. 그의 입에서 귀가 밝은 벨라토르도 얼핏 알아듣기 어려운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면 말든가. 내 생각에는 후자 쪽을 추천하고 싶지만... 자네는 진우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쯧쯧.”
뒤에서 급히 창고 속의 호미를 꺼내들고 자신을 뒤쫓아오는 벨라토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 * * * *
피스쳅스가 진우를 데리고 간 곳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그의 집과는 정 반대편에 있는 낮은 구릉 위였다. 그곳에는 호수를 향해 작은 실개천이 조그만 폭포를 만들며 흐르고 있었다. 폭포 옆으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것 같은 작은 집이 기울어진 지붕을 위태롭게 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내 전전 대 마구스가 사시던 곳이네. 칼체라는 분이셨지.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이 6백 년 전인데, 그 뒤로는 아무도 이곳에서 살지 않았어. 경치가 참 좋은 곳이기는 한데,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로 일부러 비워놓았지.”
낡은 집의 뒤편으로 조금 더 올라가자 금방 구릉의 꼭대기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서서 바라보자 구릉 너머의 좁은 벌판과 함께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보였다. 정말 속이 탁 트이는 것처럼 시원한 풍경이었다.
“확실히 경치가 좋군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아마 디키오 전체에서 이보다 더 마음을 씻겨주는 장소는 찾기 어려울 걸세.”
“그런데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신 이유가 뭡니까?”
진우는 구릉을 떠나 피스쳅스가 서 있는 오래된 집으로 내려오면서 물었다.
“그 분은 달 위를 걸었던 최초이자 마지막 조르크 인이네.”
진우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달이라고요? 하늘에 떠 있는 저거 말입니까?”
피스쳅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진우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서는 이제 막 희미한 달 하나가 엷은 구름을 헤치며 떠오르고 있었다.
조르크에는 세 개의 달이 있었다. 지상에서 볼 때에는 지구의 달 절반 정도 크기였는데, 실제의 크기와 거리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난 게 큰 게 아니라면 대기가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칼체라는 사람이 그 먼 곳에 있는 달까지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러고도 살아남았다는 게 더 신기했다. 그런데도 피스쳅스는 자신의 전전 대 마구스인 칼체가 그곳까지 공간 이동을 해서 다녀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진우의 목소리가 떨려나오고 있었다. 만약 피스쳅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칼체는 지배의 단계에 든 인물일 가능성이 있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대략 38만 5천 Km이었다. 조르크의 위성이 지구의 달 만큼만 떨어져 있다고 해도 현재의 진우로서는 공간 이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먼 거리였다. 그런데 그곳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은 칼체가 완숙한 동조의 단계 이상의 수준에 올라섰었다는 뜻이었다.
“우린 모르네. 자네가 한 번 알아보지 그러나?”
피스쳅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쳐들었다.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진우의 말에 피스쳅스가 씩 웃으며 그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진우가 이게 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칼체님이 살아계실 때 마스바로크라는 외계인이 이곳을 방문했었네. 그는 칼체님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당시에는 많은 분들이 이곳을 드나들었지. 당시 옆에 함께 있었던 분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대화 내용 일부를 기록으로 남겼네.”
“보통 그런 대화를 기록으로 남깁니까?”
“아니네. 우리는 무언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드물지. 하지만 칼체님은 살아 계실 때에 많은 원로들에게 존경을 받던 분이었어. 당시 그분과 외계인이 나누었던 대화를 들었던 분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지.”
진우는 피스쳅스가 쉽게 건네준 두루마리가 사실은 엄청나게 귀중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피스쳅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우의 인사를 웃으며 받아들인 피스쳅스가 자신의 집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섰다.
“아, 그리고 자네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만큼 이곳에서 머물러도 되네. 칼체님이 머물던 집이 많이 낡기는 했어도 적당히 손을 보면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할 거야.”
피스쳅스의 말에 진우는 급히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아닙니다. 고인의 집인데 제가 어떻게 함부로...”
하지만 그의 말에 피스쳅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굳이 이곳에 머물지 않는 것은 칼체님에 대한 공경의 표시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무슨 금지 같은 곳은 아니야. 다른 목적이 아니라 수련을 위해서라면 자네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그 분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그럼 수고하게.”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이번에는 진우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듣기로 천 년 전쯤에 이곳에 하이뇰이라는 외계인이 머물렀던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때 일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까?”
피스쳅스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군. 내가 돌아가서 역대 마구스들에게 전해지는 기록들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지. 만약 기록이 남아 있다면 보고 싶은가?”
“네. 가능하면 꼭 보고 싶습니다.”
“알겠네. 가서 한 번 찾아보도록 하지.”
피스쳅스는 그 말을 남기고 공간 이동을 통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진우는 칼체의 낡은 집을 힐끗 돌아보았다.
“청소를... 무지하게 열심히 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