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밀레스가 진우와 관련된 인물을 찾기 위해 지구를 방문했을 때에, 또 하나의 중급 전사가 조르크를 향해 블리센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가 갈 곳은 조르크의 라우라 마을이다. 그곳에 관한 기록은 잘 살펴봤겠지?”
벨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녹색의 중급 전사, 벨라토르를 향해 말했다. 벨라토르는 지구로 파견된 밀레스와 함께 블리젠에서는 쌍벽을 이룬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강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위아래 두 쌍의 팔에 각각 두 개의 검과 두 개의 도를 들고 휘두르는 그의 연속 공격은 일품이었다. 폭풍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공격을 마주한 상대는 대개 방어에만 치중하다 결국 무릎을 꿇기 일쑤였다.
벨라토르는 벨푸의 질문에 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여러 번 읽고 완벽하게 머리에 담아 두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곳의 주민들을 함부로 자극하지 말고 진우라는 녀석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가 오면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지?”
“블리젠으로 찾아오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나와 노르호지가 직접 지구를 방문할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마라.”
“물론입니다. 확실히 전하겠습니다.”
“그래 네 역할이 중요하다. 전달 사항을 똑똑히 명심했으면 이제 출발해라.”
벨푸는 이야기를 끝내고 자신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자리를 뜨려던 벨라토르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주인님, 죄송하지만 여쭐 것이 있습니다.”
벨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돌려 자신의 노예 전사를 바라보았다.
“뭐냐?”
“진우라는 지구인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강제로 제압해서라도 이곳으로 데리고 옵니까?”
벨라토르의 말에 벨푸는 피식하고 웃었다.
“네가 제압할 정도의 상대라면 굳이 이곳으로 오게 만들려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냥 거기서 죽이면 그만이지. 허튼 생각하지 말고 너는 그냥 가서 말만 전하고 오면 된다. 그가 요구에 응할지 어떨지를 네가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의 말을 들은 벨라토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말이 없이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가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본 벨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을 때, 시종이 들어와 노르호지의 방문을 알렸다. 잠시 후 노르호지가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벨푸. 수련은 잘 돼 가나?”
노르호지의 인사를 겸한 질문에 벨푸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잘 된다고 말 하긴 어려워. 아직은 마나를 전송하는 게 순조롭지 않아. 이 기술이 생각보다 쉽지 않군 그래. 자네는 어떤가? 잘 되나?”
벨푸의 반문에 노르호지 역시 인상을 그었다.
“아니, 나도 아직은 쓸 만하지 않아. 마나가 전송되는 속도도 느리고, 양도 많지가 않아. 더 수련을 해야 할 거 같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블리젠 인들 가운데 종속의 낙인을 찍은 것은 아직 중급 전사들뿐이었다.
나머지 하급 전사들은 중급 전사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노예들을 통해 마나 전송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블리센 인들의 그 기술은 생각보다 익히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꽤 노력을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실전에서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숙달시키려면 여전히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시종이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차를 놓고 나가자 노르호지가 중급 전사 파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다보니 벨라토르 녀석이 배낭을 지고 포털 장치가 있는 쪽을 향해 가더군. 녀석도 이제 조르크 행성으로 떠나는 건가.”
“그래. 조금 있으면 출발할 거야. 밀레스는 어제 보냈다고 했었지?”
“응. 되도록 약하면서도 진우라는 녀석과 가까운 놈들을 제압하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조승운이라는 녀석을 골라 덤벼들 가능성이 많아. 블리젠 전사들도 어지간히 호전적이니까 말이야.”
“걱정이 되면 조승운은 상대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지 그랬어?”
벨푸의 말에 노르호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지기야 하겠어? 조승운은 실력도 좋지만 진우라는 녀석의 스승이라고 하잖아. 죽이거나 잡아오면 더 큰 자극이 되겠지.”
노르호지의 얘기에 벨푸는 그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이 선택한 벨라토르 역시 진우를 직접 상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강한 호승심을 보여주었다.
녀석한테 진우를 상대하지 말고 말만 전하라고 했으니 일단은 그의 말대로 할 것이다. 하지만 벨라토르가 뭔가 시비를 걸어 진우로 하여금 먼저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경우 주인의 명령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싸움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뭐, 겁 없이 덤비다 죽어도 할 수 없지. 어차피 말을 전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어쩌겠나? 당장 보낼 수 있는 하급 전사도 없잖아. 노예가 된 중급 전사 녀석들이 하급 전사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을 수 있으려면 아직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하니, 아깝지만 별 수 없지.”
벨푸의 말을 듣던 노르호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벨라토르에게 디키오 마을에 관한 이야기도 했나?”
노르호지의 입에서 디키오라는 말이 나오자 벨푸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걸 어떻게 말하나. 우리 플레비크 인들의 수치를 내 입으로 떠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진우라는 지구인이 설마 그곳을 찾아갈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녀석이 공간 이동 기술을 배웠을지도 모르니.”
벨푸는 노르호지의 말에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까지 어떤 외계인도 공간 이동 기술을 배우는데 성공한 자가 없다는 걸 잘 않잖은가. 우리도 한두 번 그곳에 전사를 보낸 게 아닌데, 결국 아무도 그걸 배우지 못했잖아.”
노르호지는 벨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수백 년 전 조르크로 쳐들어갔을 때 하필이면 첫 도착지가 디키오 마을이었던 건 정말 운이 없었지. 공격에 참여했던 전사들이 순식간에 마나가 흩어져버려 몰살을 당하다시피 했으니까. 덕분에 플레비크 역사에서 공략을 포기한 유일한 행성이 그곳이 되어 버렸지.”
“그래. 우리하고는 상극인 곳이니까. 녀석들이 자기들 행성 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는 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이야기를 하는 두 플레비크 상급 전사의 얼굴에 떨떠름한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시간 이미 진우가 라우라 마을을 떠나 디키오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 * * * *
사백년 전에 활발하게 외계 행성을 정복하여 그곳의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다니던 플레비크 전사들은 조르크 행성에서 최초로 참혹한 패배를 경험했다. 당시 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디키오라는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불과 천 여 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디키오 마을에는 어린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주민들이 머리가 허연 노인들이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그곳은 행성 곳곳에서 은퇴한 마을의 원로들이 남은 생을 보내기 위해 모여드는 일종의 양로원 같은 곳이었다.
사백년 전, 기세등등하게 디키오에 도착했던 플레비크 전사들은 변변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디키오 마을의 노인들 앞에 나서 그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전사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종속의 낙인이 일제히 풀리면서 급격한 마나 꼬임 현상이 발생했다.
그 바람에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던 몇몇의 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화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디키오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온몸이 뒤틀리고 근육이 터져나가는 끔찍한 죽음이었다.
살아 돌아온 소수의 전사들로부터 참상을 보고받은 플레비크에서는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전사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주인이든 노예든, 종속의 낙인에 의해 연결된 이들은 모두 디키오의 노인들 앞에 서는 순간 마나가 뒤틀리면서 목숨을 잃었다.
플레비크 인들은 어쩔 수 없이 조르크에 대한 공략을 일시적으로 멈추어야 했다.
플레비크 인들은 좌표를 바꾸어 조르크 행성의 다른 지역에 대해 탐사를 시도했다. 그러나 섬이 아닌 곳에는 마수들과 보통의 생물들 밖에 없었고, 그들은 제압해 봐야 노예로 삼을 수조차 없는 상대들이었다.
간신히 다른 섬들의 좌표를 확인해 전사들을 보냈지만, 거기서도 마을을 점령하거나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마을에서는 디키오처럼 순식간에 종속의 낙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조르크 행성의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플레비크 인들에게 공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레비크 인들 역시 그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적대적인 마나를 일으키기만 해도 몸속의 마나가 저절로 흩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한 번 흩어진 마나는 플레비크로 돌아온 뒤로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조르크에 대해 공격을 시도했던 수많은 전사들이 폐인이 되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육체적인 힘만으로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플레비크 전사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드는 순간, 조르크 인들은 공간이동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버렸다.
도무지 싸움 자체가 불가능했다. 텅 빈 마을을 점령하고 기뻐하는 것은 플레비크 인들의 특성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조르크에 대한 정복 계획은 전면적으로 폐기되었다.
조르크 인들은 남들과 싸우거나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동시에 누구도 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 수도 없었다.
* * * * *
진우는 라우라를 떠난 지 엿새 만에 디키오 마을에 도착했다. 그가 공간 이동 기술을 이용해 섬과 섬 사이를 뛰어넘어 디키오 마을 근처에 이르자, 그의 앞에 머리와 수염이 온통 허연 노인 한 명이 나타났다. 외모만으로 보아서는 라우라 마을의 촌장이었던 비카리토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런, 어느 마을에선가 새로운 친구가 오는 줄 알았더니 자네는 은퇴한 마을 원로나 촌장으로 보기에는 너무 젊군. 생긴 걸 보니 조르크 인 같지도 않아. 외계인들이 즐겨 사용한다는 그 포털인가 하는 것을 이용해서 이곳에 온 건가?”
노인은 진우를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눈에 띄는 동요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고, 말소리도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진우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다른 행성에서 온 진우라고 합니다. 라우라 마을의 비카리토님이 이곳으로 가보라고 권하시기에 찾아왔습니다. 편히 쉬시는데 공연히 소란을 끼친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진우는 자신이 지구에서 왔다는 것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름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노인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라우라의 비카리토라. 그 친구도 조만간에 이곳으로 와야 할 텐데, 자신보다 앞서 젊은 현자를 먼저 보냈군. 반갑네. 나는 피스쳅스라고 하네. 나발레라는 마을 출신의 어부지.”
“어부시라고요?”
진우가 깜짝 놀라 되묻자 피스쳅스의 얼굴에 장난기 섞인 웃음이 떠올랐다.
“왜? 어부라고 하니 이상한가? 디키오에는 토박이가 없네. 모두가 이곳저곳에서 늘그막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찾아온 외지인들이지. 이곳에도 제법 커다란 호수가 있다네. 요즘도 가끔씩 물고기를 잡으며 소일하고 있으니 아직 어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세.”
“아... 네.”
디키오에도 호수가 있는 줄은 몰랐다. 첼스본의 기록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피스쳅스라는 노인이 어부라는 사실보다도 그가 비카리토를 알고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그가 라우라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조르크 행성 사람들이 섬을 넘나들며 서로 왕래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비카리토를 알고 있는 게 이상한가?”
진우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피스쳅스가 씩 웃으며 물었다.
“네? 아, 네. 비카리토 촌장님이 다른 마을 분들하고 교류하시는 걸 본 적이 없었거든요.”
진우의 대답을 들은 피스쳅스가 껄껄거리며 웃더니 그를 향해 물었다.
“자네는 라우라에 얼마나 있었나?”
“네. 두 달 조금 넘게 있었습니다.”
“응? 정말? 허어. 그건 놀라운 일이군 그래.”
진우는 외계인이었다. 그리고 외계인이 디키오 마을에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들이 디키오에 오려면 포털을 이용해 직접 건너오거나, 마을 촌장의 허락을 받아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럴 경우 촌장이 외계인을 데리고 공간 이동을 시도할 만큼 실력이 좋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외계인 스스로 공간 이동 기술을 익혀 찾아오는 방법이었다.
과거의 플레비크 인들은 첫 번째 방법으로 디키오 마을로 직접 쳐들어왔다가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물러섰던 적이 있었다. 첼스본의 경우에는 머물렀던 마을 촌장의 인정을 받아 디키오를 방문해 한동안 머물렀었다. 그러나 외계인이 직접 공간이동 기술을 익혀 디키오로 건너온 것은 그가 기억하는 한 눈앞의 진우라는 젊은이가 처음이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진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불과 두어 달 만에 공간 이동 기술을 익혔다는 뜻이었다. 조르크 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공간 이동 기술이었지만, 외계인이, 그것도 불과 두어 달만에 그 기술을 배웠다는 것은 피스쳅스에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곳에서 특별히 볼 일이 있나?”
피스쳅스의 물음에 진우가 얼른 대답했다.
“마구스라는 분을 뵙고 싶습니다. 그 분을 꼭 찾아보라는 말을 하신 분이 있어서요.”
“마구스? 그건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직책 이름인데? 그래 누가 마구스를 찾으라고 하던가?”
“아... 제가 옛날에 이곳을 방문했던 분이 남긴 기록을 보았는데요. 그 기록에서 마구스라는 분을 만나보라는 당부가 있어서요.”
피스쳅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이 누구였나?”
“삼백년 전의 사람입니다. 니코레임이라는 행성에서 온 첼스본이라는 분이 디키오 마을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피스쳅스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그랬군. 참 그리운 이름이야. 잘 왔네. 내가 바로 첼스본이 말한 마구스라네.”
“네?”
진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본인이라고? 시간이 삼백년이나 지났는데? 진우는 자신의 앞에 무려 삼백 년, 아니 그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소현의 행동이 마땅치 않은 분들이 많으신 것 같네요. 뭐 사실 저도 이런 전개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뒤의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요. 불편한 속을 조금만 가라앉히시고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