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218화 (218/235)

218화

소현은 아파트 출입구에 서서 조승운을 기다리면서 포털 관리 위원회를 비롯해 몇 곳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포털 관리 위원회에서는 그가 한 시간 전에 퇴근했음을 확인해 줄 뿐이었다. 그녀는 최현과 김상곤을 비롯해 몇몇 지인들에게도 전화를 했다. 혹시 조승운이 차의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는 큰 일이 생겼는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조승운에게 특별한 약속이나 큰 일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는 말만 전했다.

덕분에 소현의 전화는 공연히 그들의 걱정만 불러일으킨 셈이 되었다.

소현이 다소 과도하게 걱정을 하는 것은 최근 조승운이 위원장으로 있는 포털 관리 위원회와 관련해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포털 관리 위원회는 사실상 최근에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그동안의 작업으로 인해 포털 관리에 대한 윤곽은 거의 잡혔는데 정작 포털을 넘겨받으려면 앞으로도 몇 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최근 포털 관리 위원회는 겉으로 보아서는 가장 편한 정부 부서가 되고 말았다. 당장 급하게 처리할 일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상황을 끌고 가려는 사람들로 인해 여러 가지 암중모색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소현 역시 조승운이나 아버지인 장박사 등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게 있었다.

조승운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본질은 무술인, 혹은 헌터였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순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완고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돈독하면서도 유연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친구와, 그보다 훨씬 많은 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몇몇 기업이나 정부 관료들하고도 사이가 많이 나빠지셨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테러나 납치같은 일이 생길 가능성은 적었다. 총기나 도검으로 어설프게 조승운을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최근 일체 사냥을 다니지 않았다고는 해도 한국에서 그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진 이는 진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대전차 미사일 같은 것을 가지고 덤벼들지 않는 이상 그를 위협할 방법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한두 번 와보신 것도 아닌데 설마 길을 잃으셨을 리도 없고...”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오시다가 차가 고장 나거나 사고가 나서 누구 다른 사람이 다쳤나?”

그녀의 머리속에 길거리에 차를 세운 채 응급차를 기다리고 있는 조승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사람이 다쳐서 누워있고, 그걸 살펴보기 위해 조승운이 차에서 내렸다면? 그리고 전화기는 차 안에 있는 상태라면? 조승운은 평소에는 헌터 패드도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물론 전화기를 잘 챙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좀 찾아봐야겠네.”

소현은 자신의 특성을 치료형 헌터로 잡고 있었다. 아직 발현이 가능한 중급 헌터에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출혈을 멈추게 하거나 외상을 아물게 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진우의 무중력 자동차를 꺼내 조승운이 자주 이용하는 도로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의 전용 차량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만약 단순히 길이 엇갈린 것이라면 조승운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 것이고, 그때 얼른 돌아오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  * * * *

조승운은 정말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우와 대련을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포털 관리 위원회를 맡은 뒤로는 사냥을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외계인이 나타났는데, 다짜고짜 싸움을 거는 녀석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녀석이 휘두르는 두 개의 창은 그로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고 빨랐다.

게다가 변화도 만만치 않았다.

“이 사마귀 같은 자식이 늙은이 뼈에 골병이 들게 하네.”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그가 휘두르는 검은 물 샐 틈 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의 창을 막아내고 있었다. 간간히 틈을 노려 상대의 사각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그의 검술에 밀레스 역시 등골이 서늘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밀레스의 입장에서는 늙은이를 자처하는 조승운의 말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창 두 개를 모두 꺼내 본모습을 드러내어 덤비는데도 도무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정도로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이는 것은 그에게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플레비크 상급 전사와의 싸움에서는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쉽게 제압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 밖의 블리젠 전사들 중에는 자신보다 더 실력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조승운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노르호지의 경고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한 꼴이었다.

“차앗.”

밀레스가 날카로운 기합을 지르며 허리의 팔에 들린 창을 조승운을 향해 곧게 찔러갔다. 조승운은 그의 창을 막지 않고 몸을 빙글 돌려 피하며 오히려 밀레스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밀레스는 마치 그것을 노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나머지 창 하나를 조승운이 파고드는 자리를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미처 피할 시간이 없었던 조승운은 아쉬움에 혀를 차며 할 수 없이 찔러가던 검을 휘둘러 상대의 창을 막았다. 이제까지도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지루한 공방이 끝없이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그렇다고 몸을 돌려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어느 한 쪽이라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상대의 공격에 등부터 꿰뚫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그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도착한 소현은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을 목격하고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습격이 실제로 발생했던 것이다.

그녀는 조승운이 상대하고 있는 괴한이 외계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정확히 어떤 곳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생긴 모습만 보아도 절대 지구인은 아니었다.

밀레스의 공격을 피하며 그의 빈틈을 노리던 조승운은 갑자기 들려온 소현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순간 조승운의 눈에 무중력 자동차가 정지하며 소현이 차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소현아 안 돼. 돌아가라.”

그는 차문을 열고 내리는 소현을 향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 바람에 밀레스가 창 두 개를 거세게 휘두르며 공격해 오는 것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찌익

그의 왼쪽 옷소매가 길게 찢어지면서 밀레스의 창이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으윽.”

그다지 깊은 상처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길게 찢어진 상처를 통해 적지 않은 피가 방울져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소현은 조승운이 팔에 상처를 입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돌아가라니까!”

조승운은 마음이 다급해서 그녀를 향해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팽팽하게 이어지던 대결이 순식간에 위태롭게 변했다. 밀레스는 얼굴 가득히 초조감을 드러내며 안절부절 하는 조승운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군.’

밀레스는 조승운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몸을 움직여 소현을 향해 물러났다. 생각 같아서는 단창이라도 꺼내 소현에게 던지고 싶었지만 가지고 있던 단창 두 개를 운전수들을 처리하느라고 다 써버린 상태였다.

손에 들고 있는 창 가운데 하나를 던져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도 하나의 무기를 잃는 셈이었다.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창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소현과의 거리를 좁혀 조승운을 위협하기로 했다.

밀레스가 소현을 향해 물러나자 그의 생각을 눈치 챈 조승운이 땅을 차고 도약했다. 밀레스를 뛰어넘어 자신이 먼저 소현에게 다가가려는 생각이었다.

“흥.”

하지만 짧은 코웃음과 함께 밀레스가 창 두 개를 맹렬히 휘두르며 그의 길을 막는 바람에 다시 밀레스의 앞으로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조승운은 계속해서 눈앞의 상대를 뛰어넘거나 우회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이를 악물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밀레스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오히려 녀석과 소현의 거리만 점점 가까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에 눈이 뒤집힌 조승운의 검이 어지러워졌고 싸움은 밀레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밀레스에게 전해지는 마나의 느낌으로 볼 때, 그 뒤에 있는 소현이라는 여자는 하급 전사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굳이 배후를 공격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약한 전사라는 뜻이었다. 밀레스의 얼굴에 점차 여유 있는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반면에 조승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 * * *

소현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지금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 보았자 조승운과 싸우는 외계인을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차를 포기하고 재빨리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건 안 되지.”

소현이 몸을 움직이자 밀레스는 조승운의 검을 창으로 밀어내면서 자신 역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로 뒤를 향해 도약한 밀레스의 창 하나가 등 뒤로 낮게 휘둘러졌다.

“꺄악.”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현의 왼쪽 다리가 밀레스의 창대을 얻어맞고 뚝 부러졌다. 그녀의 다리를 감싸고 있던 근육이 터져 나가면서 하얀 뼈가 살짝 드러났다. 소현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망할 놈의 자식이.”

소현이 쓰러지는 것을 본 조승운의 얼굴에 핏대가 솟아오르고 눈이 충혈되었다. 그의 검 위에 솟아있던 마나가 순간적으로 더 길어지면서 시퍼런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죽일 놈.”

조승운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눈으로 뿜어내면서 전력을 다해 밀레스의 머리를 노리고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조승운의 사력을 다한 공격을 보는 밀레스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걸렸군.”

밀레스가 자신의 창 가운데 하나를 머리위로 올려 떨어지는 조승운의 검을 비스듬히 비껴 막았다. 조승운의 검에는 짙은 마나가 맺혀 있었지만 그의 창을 자르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아차.’

조승운이 다급하게 헛바람을 마시는 사이에 밀레스의 또 다른 창이 조승운의 복부를 향해 깊숙이 파고들었다.

푸욱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창이 조승운의 왼쪽 배를 뚫고 나와 등 뒤로 빠져나왔다. 밀레스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웃음이 맺혔다.

“전사가 싸움 중에 냉정을 잃으면 안 되지.”

그의 눈빛을 빛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얼굴에 승리의 기쁨으로 인한 웃음이 저도 모르게 배어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조승운의 왼 팔이 자신의 배를 뚫은 밀레스의 창대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너도 걸렸다, 이 자식아.”

씹어뱉듯 말을 한 조승운의 검이 밀레스의 심장을 향해 똑바로 찔러 들어왔다. 설마 배가 관통된 상황에서도 상대가 계속해서 공격을 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밀레스가 다급하게 나머지 창 하나를 들어 그의 검을 막으려고 했다.

그때 그의 팔뚝을 작은 손 두 개가 확 잡아채었다. 그다지 힘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방심한 가운데 팔을 붙잡히는바람에 창을 들어 막으려던 밀레스의 움직임이 아주 잠깐 동안 멈칫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뚫고 조승운의 검이 밀레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컥.”

밀레스의 입에서 검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검을 찌른 조승운의 입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고개가 일제히 밀레스의 왼쪽 팔을 향했다. 거기에는 다리 하나가 부러진 소현이 한 발로 땅을 디딘 채 몸을 일으켜 두 팔을 뻗어 밀레스의 한쪽 손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이런 바보같은...”

평소의 소현이라면 절대로 밀레스의 손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력 차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승운의 배를 꿰뚫은 순간, 드디어 이겼다는 기쁨으로 인해 밀레스의 집중력이 살짝 흐트러졌다.

게다가 찰나의 방심을 노리고 그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조승운의 검을 너무 다급하게 막으려던 참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설마 다리가 부러진 뒤편의 소현이 자신의 팔을 잡아채려는 것을 살피지 못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고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한 실수를 범하게 만들었다.

털썩

숨이 끊어진 밀레스의 몸이 주저앉듯 무너졌다. 그때까지도 녀석의 손을 잡은 소현은 팔을 놓지 않고 있었다. 밀레스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조승운은 입에서 왈칵 피를 쏟으며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할아버지!”

소현은 다급히 쓰러진 조승운에게 다가가 치료용 마나를 일으켜 그의 출혈을 막았다. 워낙 큰 상처라서 피가 금방 멎지는 않았지만 일단 조금씩 출혈이 적어지게 할 수는 있었다.

소현은 전화기를 들어 헌터 병원에 연락해 위중한 환자가 생겼음을 알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김상곤의 부인인 박화정에게도 전화를 했다. 전국이 조승운의 부상으로 인해 발칵 뒤집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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