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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헌터-217화 (217/235)

217화

조승운의 검 위로 푸른색의 마나가 선명한 빛을 띠고 솟아올랐다. 그는 밀레스와 한 차례 격돌을 하고 나서는 망설임 없이 단숨에 검 위에 마나를 실체화시켰다. 상대가 보통의 헌터가 아님을 한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달리던 택시의 지붕을 그대로 뚫고 나와서 앞서 가던 무중력 자동차의 지붕을 창으로 꿰뚫는 것은 웬만한 솜씨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가용을 빠져나오는 다급한 와중에도 적지 않은 마나를 실어 휘두른 검이었는데, 상대는 별 어려움 없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게다가 녀석은 일반인이 분명한 두 명의 운전수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죽여 버렸다. 빼어난 실력과 함께 그에 못지않은 잔인성을 동시에 가진 놈이었다.

“네 녀석이 어디서 뭘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조승운의 검 위로 솟은 마나가 길게 뻗으면서 또렷해졌다.

“오늘 적당히 도망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몸이 밀레스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갔다. 첫 격돌이 있은 뒤에 빙글대며 여유 있는 웃음을 웃던 밀레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날아오는 조승운의 공격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는 다급하게 창을 놀려 자신의 목을 향해 찔러오는 상대의 검을 막아야 했다.

차앙~

두 사람의 무기에서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충돌음이 들렸다. 최초의 격돌과는 달리 창과 검 모두에 실체화된 마나가 덧씌워져 있어 불꽃이 날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음보다 더 거센 충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몸은 뒤로 튕겨나가지 않았다.

“타앗.”

조승운은 두 발이 땅을 파고 들 정도로 힘을 주면서 밀레스의 창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자신의 검을 얼굴 앞에서 작게 돌렸다. 흐름을 따라 코앞에서 방향을 돌린 그의 검이 좁혀진 간격을 헤집으며 상대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베어 내려갔다.

“큭.”

밀레스는 창대의 끝을 쳐올리며 조승운의 검을 막았지만 생각보다 빠른 상대의 연격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한 창이 살짝 밀렸다. 그의 어깨 바로 밑에 작은 검상이 생기며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히 창대의 끝을 당기며 반대편의 창끝이 자연스럽게 상대의 목을 비스듬히 찔러 들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조승운은 짧은 코웃음과 함께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상대의 몸을 벤 검을 끌어당겨 찔러오는 창을 막았다.

밀레스는 조승운의 검을 밀어내어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상대의 창끝으로 길게 뻗어 나온 마나를 의식한 조승운은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서며 상대의 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으려 했다.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면서 강력한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밀레스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싸움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처음 자신만만하게 택시의 지붕까지 뚫고 나가 선공을 취했던 밀레스는 예상치 못한 조승운의 실력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지구는 마나가 없는 행성이라고 하더니, 어떻게 이런 강자가...’

수십 년 동안 니코레임 인들이 지구에서 헌터라고 하는 전사들을 길러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다. 그러나 지구는 마나의 불모지였다. 밀레스는 그런 곳에서 아무리 훈련을 시켜보았자 얼마나 강한 전사가 나오겠냐는 생각을 하고 이곳에 왔었다.

패드에 있는 정보에 의하면 눈앞의 노인은 진우라는 희귀한 지구인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제일 강하다고 했다. 자신들의 기준에 따르면 충분히 강한 중급 전사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심 자신보다는 한 수 아래일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일격에 죽이거나 제압할 수는 없더라도 그리 어려운 상대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직접 무기를 맞대 상대해 보니 조승운은 절대 자신의 밑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척박한 행성에서 어떻게 자신과 대등한 수준의 전사가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놀라기로 따지자면 밀레스를 상대하고 있는 조승운이 더 심했다. 그는 아직 밀레스가 외계인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헌터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긴 것은 분명 동양인인데... 어디서 이런 놈이? 나이로 봐서는 이제 겨우 상급 헌터가 되었다고 해도 과분할 지경이다. 중국이나 일본에 진우 같은 녀석이 또 있던가?’

그의 제자인 진우는 이미 자신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괴물이라는 말이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규격 외의 존재였다. 조승운은 평생을 끊임없이 수련하면서 자신의 자질과 노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우도 아닌 외국의 젊은 놈이 자신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그로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챙~

다시 한 번 거칠게 격돌한 두 사람은 잠시 무기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조승운은 심호흡을 크게 하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네 놈은 어디서 왔느냐? 중국이냐? 아니면 일본?”

그러나 그의 물음에도 밀레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이야 통역기를 통해서 알아 들을 수 있었지만, 의사를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조승운에게는 건방지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싸가지 없는 놈.”

조승운은 내렸던 검을 고쳐 잡고 마나를 잔뜩 불어 넣은 뒤, 상대의 심장을 향해 수평으로 베어갔다. 검이 찌르기에 좋은 무기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상대 역시 찌르기가 특기인 창을 들고 있었다.

그의 경지가 무기의 길이에 구애받는 단계를 훨씬 지나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상대 역시 창끝으로 마나를 길게 실체화시킬 수 있는 강자였다. 그는 일단 거리를 좁히면서 찌르기보다는 베기로 상대의 허점을 끌어내기로 했다.

밀레스는 조승운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자, 몸을 허리 높이까지 숙이면서 상대의 두 발을 노리고 창대를 커다랗게 휘둘렀다. 그러자 조승운은 검을 베어가던 자세 그대로 도약했다. 발 아래로 몸을 숙인 상대의 등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쳇.”

밀레스는 이대로 공격해 들어가다가는 오히려 등을 내줄 상황이 되자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뒤집었다. 그의 등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춰지자,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발끝으로 땅으로 차며 뒤에서 자신을 향해 공격해 오는 조승운을 향해 창대를 비스듬히 찔러 올렸다.

“합.”

상대의 역습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 조승운은 다급하게 기합을 지르며 밀레스의 등을 포기하고 아래에서 솟아 올라오는 상대의 창을 먼저 막았다.

차창

한 사람은 바닥에, 한 사람은 공중에 뜬 자세에서 서로의 창과 검이 두세 번 연이어서 부딪혔다. 검과 창을 든 두 사람의 팔뚝 위로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야압~”

조승운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대로 밀레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가볍게 나풀거리며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조승운이 오직 진우에게만 가르쳐주었던 나름의 비기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런 살기도 품지 않은 그의 검들이 누웠던 자세에서 막 일어나고 있던 밀레스의 가슴과 배를 동시에 노렸다.

“타앗.”

밀레스는 상대의 공격이 노리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되자 이를 악물고 창대의 중간을 잡아 빠르게 회전시켰다.

따다다다당

그의 몸을 파고들려던 조승운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대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어림없다.”

조승운은 창대에 막힌 검을 살짝 거두었다가 밀레스의 창이 회전을 멈추는 순간을 노려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밀레스는 동작과 동작 사이의 빈틈을 노린 상대의 공격에 당황했다.

그는 다급하게 어깨를 빼며 창대를 당겨 조승운의 검을 막으려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조승운의 검이 그대로 옆구리를 길게 베어버렸다.

“아악.”

조승운의 검은 밀레스에게 치명상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의 옷자락과 함께 옆구리의 살을 제법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자 갈라진 허리 부근의 옷 사이로 밀레스의 두 번째 팔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의 허리를 껴안듯 감싸고 있던 한 쌍의 팔 가운데 하나가 검상으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밀레스는 그동안 다른 지구인들에게 자신이 외계인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한 쌍의 팔을 옷 아래에 숨기고 있었다. 조승운과 마주친 뒤로는 더 이상 팔을 숨길 필요가 없었지만, 다소 성급하게 전투를 시작하는 바람에 미처 그것을 꺼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조승운의 공격으로 인해 옷이 찢어지면서 숨겨두었던 팔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허리의 두 팔을 옷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는 품 안에 감춰두었던 분리된 창을 꺼내 조립했다. 두 쌍의 팔에 두 자루의 창이 들렸다.

“이제부터 진정한 블리젠 전사의 위력을 보여주지.”

그는 두 자루의 창을 고쳐잡 으며 조승운을 향해 씩 웃었다.

밀레스의 허리에서 튀어나온 한 쌍의 팔을 본 조승운은 기겁을 할 만큼 놀랐다. 녀석의 실력이 나이에 비해 너무 강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눈앞의 상대가 외계인이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녀석은 뭐지? 두 쌍의 팔이라. 지구인은 아닐 테고, 플레비크 전사라는 녀석들하고도 들은 것과는 생긴 게 달라. 어느 행성에서 왔나?”

밀레스는 씩 웃으며 자신의 신체 변형을 풀었다. 그의 키가 한 뼘 정도 더 커지면서 팔과 다리의 길이도 더 길어졌다. 변형을 마친 그의 몸은 마치 커다란 사마귀가 두 자루의 창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항복하고 종속의 낙인을 받아들이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싸움 도중에 느닷없이 패드를 꺼내 자신에게 보여주는 밀레스를 보고 조승운이 피식하고 웃었다.

“종속의 낙인이라. 그럼 네 녀석도 플레비크 인들의 노예로구나. 보아하니 상급 전사는 아닌 것 같은데 간덩이만 경지에 오른 건가?”

조승운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그의 뜻을 짐작한 밀레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패드를 다시 집어넣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그럼 네 놈의 목만 가져가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밀레스의 몸이 조승운을 향해 덮쳐왔다. 그의 팔에 들린 두 자루의 창 가운데 하나가 조승운의 머리를 노리고 빠르게 찔러드는 동시에, 다른 하나가 횡으로 하체를 쓸었다.

조승운은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가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지나가는 창을 따라 다시 앞으로 나갔다. 그 순간 머리를 노리던 창이 그의 왼쪽 귀 옆으로 지나갔다.

“하압.”

조승운은 밀레스의 어깨 죽지를 노리고 검을 곧게 찔렀다. 큰소리를 쳤지만 창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자를 상대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는 먼저 밀레스의 팔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잘라내거나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생각이었다.

“흥.”

그러나 그의 공격은 밀레스가 조승운의 머리를 노리고 찌르던 창을 재빨리 당기면서 튕겨내는 바람에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의 검이 왼쪽으로 밀리는 틈을 타서 다리를 노리고 휘둘렀던 창이 다시 거의 허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조승운은 검을 찔러가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몸을 굴리며 다리를 들어 상대의 창을 막아냈다. 그의 다리에도 어느새 마나가 덧씌워져 있었다.

*  * * * *

조승운과 밀레스가 사력을 다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시각, 진우의 집에서 조승운을 기다리고 있던 소현은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조승운이 도착하기로 했던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왠일이시지? 시간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 아닌데...”

식탁 위에는 이미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밥만 푸면 되는 상태에서 조승운이 약속 시간에서 30분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음식이 식는 것이야 다시 데우면 되긴 했지만 10분만 있으면 도착할 거라고 전화한 지 40분이 지난 상태였다. 곧 도착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조승운은 전화를 걸 때 이미 자가용을 타고 자신의 집으로 오고 있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가 난 게 아닌 이상 훨씬 전에 이미 도착했어야 했다.

“정말 사고라도 나신 건가?”

조승운은 최상급 헌터였다. 설사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더라도 크게 부상을 입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현은 걱정을 하며 기다리면서도 설마 지금 그가 누군가와 사력을 다해 싸움을 벌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벌써 전화를 두 번이나 걸어보았지만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그러자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조승운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으니 그가 전화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최상급 헌터가 벨소리를 듣지 못해 전화를 받지 못한다는 것도 굉장히 가능성이 적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사정이 있다는 얘기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전화를 받지도 못할 정도의 일이 10분 사이에 갑자기 생겼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소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외출복을 걸쳐 입고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 입구에서라도 기다릴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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