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조르크 행성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진우는 라우라 마을 사람들이 공간을 이동할 때 마나가 어떻게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했었다. 하루 종일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살피는 것은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특유의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였지만,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발견은 오히려 그런 집착에 가까운 집중 상태를 놓아버렸을 때 그를 찾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라우라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비로소 그들이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마나와 어울리는지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집중력을 놓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진우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관찰했다. 거기에는 어떤 노력이나 의지도 없었고, 다만 자연스러운 몰입과 즐거움, 평범한 기쁨만이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공간 이동 기술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을 놓고, 순수하게 기뻐하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그게 다였다. 그때부터 그 역시 마음을 놓고 아이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자 아이들 몸 주위를 뛰노는 마나가 전보다 더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시켜야만 보이던 마나가, 마음을 풀어놓은 상태에서도 선명하기 보이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 주변을 감도는 마나는 매우 복잡하고 불규칙해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마나 자체가 아니라 마나의 결이 보였다. 마나의 움직임이 아니라 그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마나와 마나 사이의 공간이 보였고, 그 공간은 절대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채워지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문득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나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있는 것이고, 그들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팔과 다리를 쓰듯 자연스럽게 마나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마나, 자유로운 헌터’라는 헌터 학교의 표어는 정말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마나를 자연스럽게 보게 된 이후로 진우는 지구에 와서 헌터 학교를 세웠던 니코레임 인들이 정말로 그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자유롭다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시간, 공간, 나, 너, 우리 모두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헌터는 그냥 신체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마나를 사용해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헌터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나를 구속하지 않을 수 있어야 했다. 마나를 구속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다.
굳이 마나를 의식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우의 경우에는 마나를 의식하지 않는 일이 오히려 남들보다 어려웠다. 조금만 집중하면 눈에 마나가 빤히 보이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월등히 빠른 성장을 거듭할 수 있게 했던 그의 능력이, 정작 마지막에 가서는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는 커다란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이들이 그에게서 족쇄를 벗겨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진우가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공간을 가로질러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를 뛰어넘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간적으로 자신이 있는 곳을 바꾸었다. 어디에도 움직이는 마나는 없었지만 마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아무데도 없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마나’
노인이 한 말의 뜻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런 마나를 구속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함께 하려면 자신도 그처럼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반대로 마나를 구속하지 않으면, 그래서 자신과 마나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간적으로 옮겨 다닐 수 있었다. 그게 마을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익히는 공간 이동 기술의 본질이었다.
장자에 ‘포정해우’라는 말이 나온다. 포정이라는 백정이 소를 잡아 살을 발라내는 모습이 도의 경지에 오른 것을 두고 감탄하는 이야기다.
포정은 칼 하나를 가지고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이 전혀 상하지 않고 늘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멀쩡했다. 하늘의 이치에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렸기 때문이었다.
장자에서 포정은 삶을 온전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양생(養生)의 도리를 깨우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소의 가죽과 고기 사이에는 원래 빈 틈새가 없다. 살과 뼈 사이에도 빈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포정은 날을 상하지 않고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릴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진우는 과거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그냥 웃고 말았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실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실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지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자에 나오는 포정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예전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조르크의 어린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에서, 혹은 라우라의 마을 사람들이 밭을 갈고 물을 긷는 방식에서, 마나와 마나 사이의 빈 곳을 보았다. 진우는 그 동안 마나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문득 마나는 그냥 있었고, 어디에나 있었고, 동시에 어느 곳에도 없었다.
진우는 그것을 마을 아이들을 보다가 문득 알아차렸다.
* * * * *
진우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찻잔을 손에 든 채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노인은 그저 허허 하고 웃었다.
“나는 자네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네.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나?”
노인은 그 말과 함께 진우의 이야기를 듣느라 반쯤 식어버린 차를 한 번에 마셔 버렸다. 그리고 한 마디를 했다.
“마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그러나?”
진우는 말없이 자신의 찻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노인의 찻잔에 새로 차를 채워주고, 자신의 빈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두 사람의 찻잔에서 엷은 김이 피어올랐다. 진우와 노인은 건배하듯 서로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진우의 미소가 노인의 그것과 많이 닮아 보였다.
차를 마신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우를 향해 말했다.
“이제는 디키오 마을을 찾아가도 되겠군.”
진우는 노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진우를 바라보며 노인은 그저 잔잔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는 알겠지?”
“네.”
“자네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공간을 건너 뛸 수 있을 테니 잘 찾아가기를 바라네. 그곳에 가면 마구스라는 현자를 찾아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노인과의 두어 달에 걸친 인연이 끝났다. 노인은 진우를 향해 다시 한 번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준 뒤 화덕과 찻주전자를 비롯한 다기를 챙겨 주방으로 들어갔다.
진우는 자신의 방에서 배낭을 챙겨 나와 노인의 집 앞에 섰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지만, 주방에서 다기를 씻는 듯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디키오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첼스본은 자신의 기록에 디키오 마을의 좌표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단지 라우라 마을의 좌표만을 적어 두었는데, 그것은 첼스본이 디키오 마을에서 만났던 현자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진우는 이제 굳이 디키오 마을의 좌표나 위치를 알 필요가 없었다. 공간을 이동하는 법을 깨닫고 난 뒤 멀리서 전해지는 강력한 마나의 이끌림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레비크 전사들이 대뜸 디키오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이었군.”
그는 마나의 이끌림이 전해지는 방향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그의 몸과 마나의 구분이 사라지고, 그의 존재를 담고 있던 공간이 멀리 떨어진 어느 한 곳과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나가 마치 소멸되듯 사라지는 바람에 잠시 어지러웠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앞에는 벼랑 너머로 푸른 하늘이 펼쳐진 레스보스 대륙의 끝자락이 놓여 있었다.
* * * * *
계룡산을 나온 밀레스는 택시를 타고 포털 관리 위원회가 있는 건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리스트의 제일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 진우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조승운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가 타고 있던 택시가 막 포털 관리 위원회의 건물 앞에 정차하려는 순간, 건물의 출입구를 빠져나오는 노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밀레스는 품 안에서 패드를 꺼내 목록에 있는 사진과 노인을 비교해 보았다.
“조승운이군. 헤매지 않고 일찍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
그는 조승운이 전용 기사가 운전하는 무중력 자가용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택시 기사의 눈앞에 들고 있던 패드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앞에 가는 검은 색의 무중력 자가용을 쫓아가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고액의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택시 기사는 패드를 힐끗 보더니 백미러를 통해 밀레스에게 히죽 웃어보이고는 지폐를 집어 들었다. 택시가 방향을 돌려 조승운의 자가용을 뒤쫓기 시작했다.
조승운은 진우의 아파트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소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진우가 일 년 중 대부분을 집을 비우기도 했거니와, 소현은 진우가 조르크 행성으로 떠난 뒤 아예 그의 집으로 자신의 짐을 옮겼다. 진우가 사는 헌터 아파트가 다른 곳에 비해 보안이 잘 되어 있기도 했거니와, 헌터 관리 위원회가 있는 곳으로부터도 거리가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현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미리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나다.”
“할아버지 퇴근하시는 거예요?”
“퇴근은 무슨. 요즘은 할 일도 별로 없어. 그냥 사무실만 종일 지키다가 나오는 거지. 한 십 분 있으면 도착할 거다.”
“네. 제가 저녁 차려놓고 있을게요. 얼른 오세요.”
조승운은 진우를 따라 자신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려는 소현에게 굳이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도록 했다. 최근 그녀에게 이따금 칼 쓰는 법을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니 스승님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내심 결혼도 않고 혼자 늙어가는 마당에 그녀에게서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진우의 집을 자주 들르는 것도 소현을 보살펴주겠다는 약속을 따른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녀가 차려주는 밥상을 마주하는 것이 자못 흐뭇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마음 편히 저녁을 먹기는 어려운 날이었다.
조승운을 태운 무중력 자가용이 대전 외곽을 따라 순환하는 도로를 벗어나 야트막한 구릉을 끼고 진우의 아파트로 진입하는 도로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뒤를 따르던 택시의 지붕이 터져나갔다.
꽝
폭탄이 터진 듯 지붕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과 동시에 밀레스의 몸이 택시에서 튀어나와 앞서 가는 조승운의 자가용을 향해 비스듬히 허공으로 도약했다.
“어이쿠.”
조승운의 차를 운전하던 기사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순간 뒷자석에 편안한 표정으로 기대있던 조승운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차 세우게.”
“네? 하지만...”
“당장 세워.”
조승운의 차가 도로변에 급정거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밀레스는 이미 길쭉한 창을 뽑아들고 자가용 뒤편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쾅
조승운이 뒷좌석 등받이 뒤에 놓아두었던 검을 집어 들고 무중력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밀레스가 내리찍은 창이 뒷좌석의 지붕을 뚫고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깊숙이 꽂혔다.
“이런 황당한 놈이 있나.”
조승운은 자가용에 찍혔던 창을 다시 뽑아들고 자신을 향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그것을 휘둘러오는 밀레스를 향해 마나가 실린 검을 비스듬히 쳐올렸다.
쨍
창과 검이 서로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불꽃을 튀겼다. 한 차례 격돌을 한 두 사람의 몸이 도로 양편으로 거칠게 튕겨나갔다.
도로 한 복판에서 칼과 창이 난무하는 싸움이 벌어지자 밀레스를 태웠던 택시 기사는 차문을 열고 나와 허둥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반면에 조승운의 자가용 운전수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꼭 쥔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냥 차 몰고 가. 얼른.”
조승운은 밀레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가용 운전수를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운전수는 급히 시동을 걸고 차를 앞으로 움직였다.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밀레스는 품안에서 두 자루의 뾰족한 단창을 꺼내더니 도망치는 택시 기사와 운전석의 자가용 운전수를 향해 던졌다. 순식간에 택시 기사와 운전수가 단창에 꼬치가 꿰듯 몸이 뚫렸다.
“이런 무도한 놈.”
조승운의 이마 위로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나왔다. 그를 바라보는 밀레스의 눈에도 살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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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동안 푹 쉬...지 못하고 차 안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더니 정신이 멍하네요. 오늘은 한 편밖에 올리지 못합니다. 내일부터 다시 연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