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213화 (213/235)

213화

진우가 포털을 통과해 조르크 행성에 도착할 무렵, 블리젠 행성에 있던 노르호지와 벨푸는 종속의 낙인에서 풀려난 그곳의 주민들을 다시 노예로 만드느라 몹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블리젠 행성을 지배했던 투르가는 그곳의 주민들 대부분을 죽이지 않고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 다스렸었다.

덕분에 투르가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나던 날, 행성 전체에서 엄청나게 많은 블리젠 인들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

아무도 폭동을 일으킨다던가 하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를 다시 노예로 거두는 일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블리젠 인들에게도 그랬지만, 그들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어야 하는 두 명의 플레비크 상급 전사들 역시 혼돈과 혼란으로 이어지는 나날을 극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먼저 중급 전사들 가운데 핵심이 되는 자들을 중심으로 재빨리 종속의 낙인을 찍어 갔다. 중급 전사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고 나면 하급 전사들은 다시 노예가 된 중급 전사들로 하여금 종속의 낙인을 찍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직접 노예로 만드는 것에 비해서는 힘이 강화되는 효율이 다소 떨어졌지만, 시간을 고려한 전체적인 상황에서는 그 편이 훨씬 나았다.

“지구로 보낼 전사는 정했나?”

노르호지는 오랜 만에 고된 일과를 마치고 자신의 개인 수련실로 가던 길에서 벨푸를 만났다. 그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벨푸 역시 며칠 동안 중급 전사들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느라 심하게 소비된 마나를 회복하려던 참이었다.

“한 명 골랐지. 자네는?”

벨푸는 상급 전사답지 않게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노르호지가 씩 하고 웃었다.

“나도 한 명 골랐어. 그럼 후보자가 두 명이군.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각자 마나 회복에 신경 쓰고 내일 다시 만나서 둘 중에 누구를 보낼지 결정하도록 하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그들이 지구로 파견할 전사를 고르기 위해 회의실에 모였을 때에는, 이미 논의의 주제가 바뀌어 있었다.

“니코레임에서 연락이 왔어. 이 자료와 함께 말이지. 지구에서 온 것이기는 한데, 재밌는 것은 자료를 보낸 자가 콴톤이 아니라는 거야. 내용은 더 재미있지. 조르크 행성에 지배 단계에 이를 수 있는 비밀이 있다는 군.”

노르호지는 회의실로 향하던 도중 얼마 전에 노예로 만들었던 중급 전사가 허겁지겁 들고 왔던 자료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뱉듯이 말을 했다.

“나한테도 같은 자료가 왔네. 진우라는 지구인이 그 비밀이 있다는 조르크 행성에 이미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미리 와서 자리에 앉아 있던 벨푸 역시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자료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이건 우리더러 조르크 행성으로 오라는 뜻이겠지?”

노르호지의 말에 벨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 모든 플레비크 인들에게 출입 금지 명령이 내려진 곳이라는 걸 알고 보낸 걸까? 상급 전사를 포함해서 누구도 절대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기에 무엇 때문인지 궁금했는데, 혹시 이 자료의 내용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하지만 이 자료가 사실이라면 가지 않을 수도 없잖아. 우리의 목적에 부합하는 두 가지가 모두 그곳에 있는 셈이니까.”

벨푸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런 그를 노르호지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갈 건가?”

벨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야겠지. 이렇게 정중하면서도 유혹적인 초대를 거절할 수야 없잖아. 물론 그 전에 먼저 전사를 하나 보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겠지만 말이야.”

“결국 우리가 고른 두 명의 중급 전사를 모두 써야 한다는 얘기군. 한 명은 지구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조르크로.”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그들은 상급 전사를 노예로 만들 경우 지배의 단계에 성큼 다가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들이 플레비크 본성을 차지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금기라고? 자신들이 가장 강한 전사가 될 수 있다면 그런 금기쯤은 다시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길 것이다.

벨푸는 노르호지의 눈이 반달처럼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 자료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직접 가야겠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뒤에.”

두 사람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그들은 아직 블리젠 인들에게 마나 전송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진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하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기술을 다 익히더라도 자신들 둘만 조르크 행성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이미 플레비크 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일대일 대결은 본성의 지도자들에 의해 깨어졌다. 그렇다면 굳이 이대일을 고집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노예로 만든 블리젠의 나머지 중급 전사들을 그들의 마나 저장고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  * * * *

진우가 도착한 곳은 조르크 행성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었다. 레스보스라는 이름의 섬은 한반도의 전체의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크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공중에 떠 있었다.

진우는 포털을 빠져나와 섬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멜코르 산 중턱에 서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서쪽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마을을 바라보았다.

섬 전체를 구불거리며 흐르는 강물이 마을의 외곽을 크게 감돌며 지나는 모습이 마치 그림 속의 풍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라우라 마을이라고 했지?”

조르크에는 피엔다 행성처럼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도시조차 없었다. 조르크 인들의 거주지는 모두 마을이라 불리었는데, 실제로 크기도 모두 작은 편이었다. 직위가 세습되지 않는 촌장이 마을의 대소사를 통치할 뿐 특별한 권력이라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소국과민(小國寡民). 작은 나라에 백성의 수는 적은 곳. 작은 공동체의 이상이 실현되어 있는 곳이라고 했지?”

인구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고 해도 만 명이 간신히 넘을 뿐이었다. 그런 마을들이 섬 전체에 아주 먼 거리를 두고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도로도 그다지 발달하지 않아 먼 거리를 이동할 때에는 그들 특유의 공간 이동 기술을 사용했다. 이곳은 조르크 행성이었다.

진우는 경비병 하나 서 있지 않은 입구를 그냥 통과해서 라우라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을 구경하는 동안 호미나 삼태기 등을 들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지만 누구하나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낯선 진우에게 미소를 띠며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긴 것만으로도 이방인이 분명해 보이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경계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고, 인사 이외에는 말을 거는 사람 역시 한 명도 없었다.

마을의 집들은 모두 한 채씩 독립되어 있었다.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집들도 붙어 있는 일이 없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철저하게 개인의 생활을 보호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집마다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진우는 10분 이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치 마을 한 가운데에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는 생소한 분위기를 무릅쓰고 마침 지나가던 라우라 마을 사람 하나를 붙잡고 길을 물었다. 진우는 피엔다 행성에서 구했던 통역기를 그냥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통역기에는 조르크 행성의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기능이 담겨 있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마을 사람은 진우의 물음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곳의 촌장님 댁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은 손을 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집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조그만 집 한 채를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한 번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제 갈 길을 갔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던 진우는 어느 새 뒷모습을 보이며 멀리 걸어가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친절했다. 하지만 너무 무관심했다.

*  * * * *

마을 사람이 촌장의 집이라고 가르쳐 준 곳에 도착한 진우는 집 한 켠에 있는 조그만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 노인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밭을 매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노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웃는 얼굴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일을 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가 혹시 이 마을 촌장님 댁이 맞습니까?”

진우가 그렇게 묻자 노인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바로 이 마을 촌장인 비카리토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저는 진우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아주 먼 데서 온 이방인입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진우의 말을 들은 노인은 호미를 든 채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들어오십시오.”

노인은 그를 크지 않은 집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대청마루처럼 생긴 곳으로 안내했다. 집 규모에 비해 제법 넓직한 마루 위에는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조그만 다탁이 놓여 있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차를 내 오겠습니다.”

진우가 미처 사양의 말을 하기도 전에 주방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사라졌던 노인은 잠시 후 숯을 담은 화덕과 찻주전자, 그리고 조그만 찻잔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비카리토라고 자신을 밝힌 노인은 다탁 위에 화덕을 올려놓더니 그 위에 잠시 손을 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화덕 안의 숯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나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네.’

진우가 잠시 놀라는 사이에 노인은 화덕 위에 찻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는 주전자의 물이 끓자 그것을 화덕에서 내려놓더니 뚜껑을 열고 흑갈색의 찻잎을 조금 집어넣었다.

차가 적당히 우러나올 때까지 말없이 기다리던 노인은 진우와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그 모든 일을 하는 동안 노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진우 역시 왠지 뻘쭘해진 상태에서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청마루에는 오후의 따뜻한 햇살 아래 찻잔에서 솟아오르는 수증기만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릴 뿐 고즈넉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차 한 잔 드시지요.”

노인이 진우를 향해 차를 권하자 진우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이 미소를 잃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부탁을 하고 싶다는 일이 어떤 일입니까?”

“이곳에 있는 마을들 가운데 디키오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디키오라는 지명이 언급되자 촌장의 눈이 잠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진우를 쳐다보았다.

“디키오는 최고의 현자가 머무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다른 섬에 있지요. 거기 가시려면 섬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방법은 아십니까?”

노인의 부드러운 눈이 진우를 향했다.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그것부터 배우셔야 하겠군요.”

“저기... 그걸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러자 노인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어디서나 배울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 됩니다.”

“하지만 그게 귀한 기술이라...”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쉽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바람에 오히려 진우가 당황했다. 그가 평소와는 달리 말을 더듬으며 눈치를 살피자, 촌장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귀한 기술이라... 차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촌장은 씩 웃고나서는 말없이 찻주전자를 다시 화덕에 올리놓더니 아까와 한치도 다름이 없는 동작으로 다시 진우의 잔에 차를 따랐다. 그의 웃음, 동작 하나하나에서 진우는 헌터나 전사들의 기세와는 전혀 다른, 그러나 역시 거부하거나 저항하기 힘든 묘한 압력이 느껴졌다.

진우는 묵묵히 그가 차를 따르기를 기다렸다.

그가 찻잔을 들어 새로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촌장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세상의 어떤 귀한 기술도 지금 마시는 차 한 잔보다 더 귀하지는 않습니다. 섬을 건너 뛰어 움직이는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까?”

“네.”

“그럼 배우십시오.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제가 너무 죄송해서.... 대신 제가 해 드릴 일이 있습니까?”

“차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진우의 찻잔은 아직 반도 비워지지 않은 채였다.

“아닙니다. 차는 아직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제가 바라는 것이 없으니 보답을 하실 것도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배우십시오. 시간은 우리 둘 모두에게 귀한 것이지요. 조금이라도 일찍 익히시면 그만큼 우리 모두에게 귀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제부터 배우면 되겠습니다.”

“제가 가르칠 때부터입니다.”

“그게... 그럼 언제부터 가르쳐주실...”

“앞에 놓인 차를 다 마시고 나서부터입니다.”

“감사합니다.”

진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날부터 진우는 촌장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에게 공간 이동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촌장의 가르침이 처음 시작되던 순간, 진우는 문득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 기술을 배우는 데에 성공했던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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