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진우가 돔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트란메토이 방송국 직원들이 그를 향해 엎어질 듯 달려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도전을 한 겁니까? 성공하셨어요?”
가제타를 대신해 임시로 현장 지휘를 맡았던 인터뷰 책임자가 아나운서를 제치고 그를 향해 직접 마이크를 들이대었다. 진우는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낼 기세인 그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의 손이 자신을 향해 찌를 듯이 내밀어진 마이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몸을 가리켰다.
“도전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는 며칠 뒤에 하지요. 당분간은 인터뷰보다 몸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
그제야 책임자의 눈이 만신창이라는 말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몸을 향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진우는 그의 말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하지만 며칠 쉬겠습니다. 몸이 좀 나아지면 제가 연락을 하지요.”
“저기, 병원에 모셔드리...”
진우는 사람들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용사의 관 건물 밖을 나서며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방송 스텝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떠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진우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너무 강렬했다. 아무도 그를 붙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 * * * *
호텔 건물의 1층에는 메심헤네스 일행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진우의 몸을 호위하듯 감싸 사람들이 덤벼들지 못하도록 보호하면서 그가 방으로 무사히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공했냐?”
진우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파토스가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질문을 던졌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진우를 향해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뇰은 사라졌습니다. 조각 하나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부숴 버렸어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방의 분위기가 일시에 눈 녹듯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잠시 호텔 전체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진우는 그들의 기쁨을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메심헤네스 일행들이 떠드는 소리만으로도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그들과 다르게 진우는 그다지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굉장히 어려운 일을 마침내 끝냈다는 안도의 감정과, 이제는 정말 좀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는 며칠 좀 쉬겠습니다. 몸을 추슬러야 하니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지요. 그 동안 여러분은 끊어놓았던 통신선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병원에는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가제타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피투성이가 된 진우의 몸을 보며 물었다.
“제가 알아서 치료할 겁니다. 병원보다 나을 거예요. 지금은 죄송하지만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빨리 이 방을 비워주시는 게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메심헤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짓에 따라 일행이 모두 방을 나섰다. 그제야 진우는 옷을 벗고 샤워를 할 수 있었다. 피가 얼마나 많이 묻어 있었는지 씻고 또 씻어도 핏물이 끝도 없이 욕실 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몸을 씻은 뒤 옷도 걸치지 않은 채로 마나를 돌려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마수로 인한 상처는 겉으로 보기에는 심각해 보여도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무리한 마나를 동원함으로 인해 엉망이 된 뱃속의 상태가 더 위험했다.
다음날 저녁까지 그는 몸을 회복시키는 데에만 전념했다. 엄청난 양의 식사가 진우의 방으로 배달되었지만, 나올 때는 모두 빈 그릇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먹고 치료하고 쉬었다.
* * * * *
“부서진 장치를 수리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해요.”
이틀 뒤에 연락을 받은 메심헤네스 일행이 다시 호텔로 진우를 찾아왔을 때 그는 다른 일보다 먼저 자신이 파괴시킨 마나 공급 장치를 수리하는 일이 가장 급하다고 말했다.
“하이뇰의 본체가 파괴당했다고는 하지만 용사의 관이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시설들은 멀쩡합니다. 마나만 충분히 공급되면 앞으로도 900관까지는 마수들을 상대로 한 도전이 가능할 거예요. 물론 901관 이후는 사라졌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이상의 단계에서 등장했던 마수들은 원래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었어요. 모두 하이뇰이 만들어내었던 놈들이니까요. 놈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 마수들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겁니다.”
“포털을 열어달라는 부탁은 했나?”
메심헤네스가 초조한 기색으로 진우를 향해 물었다.
“아니요. 용사의 관 도전이 성공하자마자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하이뇰이 파괴되었으니까요. 새로운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 하이뇰 대신 용사의 관 전체를 관리하게 되면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절대 금기의 성격도 조금 변했을 것 같아요. 하이뇰이 사라진 지금 절대 금기는 원칙적으로 사라졌다고 봐야 하니까요. 그래도 제 부탁은 들어줄 겁니다. 그게 용사의 관 정복에 대한 대가라는 것은 새로운 시스템도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 포털 제작이 가능한 지의 여부는 언제쯤 알 수 있겠는가?”
“하이뇰이 아니더라도 용사의 관을 운영하려면 여전히 막대한 마나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일단은 해저에 있는 마나 공급 장치부터 고쳐야지요. 그 일이 끝나면 제가 다시 용사의 관으로 가겠습니다. 시스템이 저에게 셔퍼를 통해 먼저 연락을 취해올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제가 직접 용사의 관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과학자인 켄세타르가 적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우를 향해 물었다.
“자네 혼자 그걸 다 수리할 수 있겠나?”
진우는 그의 질문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해저에 있는 장치잖아요. 저 말고 여기서 바다 밑으로 잠수해서 그걸 고칠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장이 났을 때 수리를 하는 로봇들도 거의 없잖아요. 최대한 가용한 로봇들을 빌려주세요. 녀석들을 데리고 제가 고쳐놓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부터 진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다 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로봇들이 작업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중요한 일은 어차피 그의 몫이었다. 부술 때는 한 순간이었지만, 그것들을 모두 수리하는 데에는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도 진우라는 초인적인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 * * * *
통신선이 회복되고 마나 공급 장치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쯤 해서 진우의 몸 역시 완전히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이 행성에서의 마지막 일을 해결하기 위해 용사의 관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진우님. 저는 용사의 관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종합 관리자입니다. 진우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진우가 돔 앞에 서자 출입구가 활짝 열리면서 그를 환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영상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하이뇰보다 훨씬 멋있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의 시스템이 새롭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돔의 중앙에 서서 지하로 마나를 흘려보냈지만, 바닥에서는 어떤 마나의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다만 본래 마수를 실체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던 보조 시스템에서 예전처럼 활발하게 마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새로운 시스템이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제가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십시오.”
“진우님은 용사의 관에 998회 도전했고, 모든 도전에서 성공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999관까지 통과한 것으로 되어 있군요. 마지막 도전에서 두 개의 관에 동시에 도전하셨고, 그 도전에서 진우님은 성공하셨습니다. 진우님이 최초로 크리켄데르 용사의 관을 모두 정복하셨음을 확인합니다.”
“그럼 저에게 절대 금기 중의 하나를 해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그 말에 시스템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제가 절대 금기 중의 하나를 해제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진우가 두 번째로 같은 질문을 하자 비로소 시스템이 응답했다.
“먼저 진우님의 질문 가운데 적절치 않은 항목이 있어서 그에 대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현재 절대 금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우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시스템을 정지시켜 달라거나, 야생에서 살아가는 마수들을 복원시켜 달라는 것, 그리고 외계 행성으로 이동할 수 있는 포털 장치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것이 과거에 절대 금기라는 항목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절대금기는 이미 폐기 처분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절대 금기가 아닙니다.
일정한 절차를 거치면 언제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용사의 관 정복에 대한 대가로 세 항목 가운데 하나는 별다른 절차 없이 지금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항목이 있습니까?”
절대 금기는 역시 사라졌다. 게다가 진우가 용사의 관을 정복한 대가로 한 가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역시 살아 있었다.
“일정한 절차라는 게 뭘 뜻하는 겁니까?”
“방금 말씀드린 세 항목은 크리켄데르 뿐만이 아니라 행성 전체의 주민들의 의사가 수렴이 되어야 변경될 수 있는 사항입니다. 적절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삼분의 이 이상의 주민들이 요구하면 변경이 가능합니다.
시스템을 정지시키거나, 마수를 복원하는 일, 그리고 행성 이동용 포털을 제작하는 것이 모두 그렇습니다.”
“삼분의 이? 과반수가 아니고요?”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주민의 삼분의 이가 동의할 것이 요구되는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몇 가지가 더 주민들의 요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군요.”
결국 시스템의 중추 역할을 하던 하이뇰의 인공지능이 사라진 지금, 본래 절대 금기로 분류되었던 것들이 주민들의 투표와 같은 절차를 통해 해제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것이 하이뇰이 처음 시스템을 만들 때의 본래 의도였겠지. 나중에 그가 자신을 복제한 인공지능을 만들었을 때 바꾸었겠지만.’
복제된 하이뇰은 그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생각이 바뀐 뒤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었다. 하이뇰이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완료한 뒤에, 지배 단계에 대한 지나친 열망으로 인해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뒤의 모습이 인공지능의 정체성을 결정한 셈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월이 현명함을 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하이뇰의 경우는 후자 쪽이었던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행성 이동용 포털을 제작하여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외계 행성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개방하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대가 없이 포털을 이용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며칠 내로 의논을 거쳐 결정한 뒤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참 다른 것도 부탁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것입니까?”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외계 행성의 좌표를 저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시스템이 다시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예의 멋진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우님이 요구한 것이 행성 이동용 포털의 제작이었으므로, 좌표를 알려드리는 것은 그에 따른 부가사항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가능합니다.
본래 요구하신 항목이 절대 금기로 분류될 만큼 엄중히 보호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과도하지 않은 부탁이라고 판단합니다. 지금 시스템이 보유하고 있는 외계 행성의 좌표를 전송하겠습니다.
가지고 계신 셔퍼로 전송할까요?”
진우는 품에서 헌터 패드를 꺼내들었다.
“이곳으로 전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가지고 계신 장치가 무선 연결이 가능한 장치입니까?”
“가능합니다.”
“그럼 해당 장치를 셔퍼와 연결해 주십시오. 확인하겠습니다.”
진우는 셔퍼와 헌터 패드의 무선 송수신 장치를 공조시켰다. 잠시 후 헌터패드에 대한 검사를 마친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료 수신이 가능한 장치입니다. 지금 좌표를 전송할까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 셔퍼에 저장되어 있던 자료도 모두 패드로 이동시켜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송과 이동을 시작합니다.”
좌표의 전송과 함께 셔퍼에 저장되어 있던 첼스본의 기록이 모두 헌터패드로 이동되었다.
* * * * *
“고맙다.”
파토스는 행성 이동용 포털 제작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듣자 진우를 꼭 끌어안고 감사를 표시했다.
“포털 이동 대가는 말씀드린 대로 정했습니다. 제가 있던 곳을 기준으로 해서 정한 것이니 비교적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진우는 지구를 기준으로 포털 이동장치의 대가를 책정했다. 대가가 너무 과한 것은 문제였으나, 그렇다고 아무나 함부로 포털을 이용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고향 별로 돌아갈 건가?”
가제타가 진우를 향해 물었다.
“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서요.”
진우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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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