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메심헤네스와 파토스를 비롯한 그들 일행 9명은 모두 용사의 관 주의를 둘러싼 여러 곳의 장소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이 차단해야 하는 주요 통신선은 모두 15군데였다.
하이뇰이 다른 시스템을 강제로 장악하거나 자신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전에 반드시 통신선을 끊기로 약속했지만, 한꺼번에 15 군데나 되는 곳의 통신선을 9명의 인원으로 동시에 자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S급 용사 세 사람을 비롯해 용사 양성 학교 출신인 6명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을 두 군데씩 맡았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히 기다리던 그들은 약속한 시간이 되자 메심헤네스의 신호에 따라 먼저 9곳의 통신선을 일제히 잘라버렸다.
“뛰어.”
두 군데의 통신선을 차단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어폰을 통해 메심헤네스의 비명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음 차단 장소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지하통로가 아닌 지상을 통한 이동이었다.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크리켄데르의 도로 위에는 그들의 미친 듯한 질주를 가로막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덕분에 지하보다는 지상으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도착이요.”
“도착.”
“도착했습니다.”
메심헤네스의 이어폰에 다음 장소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속속 전달되었다. 모든 일행이 다음 장소에 도착했다는 것이 확인되자 메심헤네스는 지체 없이 명령을 내렸다.
“잘라.”
여섯 명이 커다란 절단용 도구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미리 보호용 파이프를 벗겨 놓은 여섯 곳의 통신선 가닥들이 신호와 함께 한꺼번에 잘렸다.
* * * * *
쿠웅~
용사의 관에서 내려다보이는 크리켄데르의 바다에서 굉음과 함께 수십 개의 물기둥이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진우가 용사의 관에 도전하기 전에 미리 설치해 놓은 마나 폭탄들이 일제히 터지는 모습이었다.
마나 폭탄들이 터지자 용사의 관 앞바다는 순식간에 바닥이 뒤집어지며 올라온 흙탕물에 의해 갈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하이뇰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마나의 90 퍼센트가 순식간에 날아갔다는 것을 뜻했다.
진우는 하이뇰의 영상이 사라지자 급히 돔의 중앙으로 달려갔다. 아직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을 움직일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지금은 바닥을 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피를 쏟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달려야 했다.
용사의 관에서 가장 큰 건물인 돔의 바닥은 전체가 두터운 흙으로 덮여 있었다. 대리석과 같은 암석이나 쇠로 만들었다가는 오히려 마수나 용사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돔 중앙에 도착하자마자 마나 탐색을 통해 돔의 바닥 밑을 살폈다.
“잡았다.”
희미하지만 마나가 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이뇰의 본체가 있는 곳이 틀림없었다. 마나는 도시 중심지를 향한 방향을 통해서만 몰려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곳에 하이뇰의 본체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오는 마나들이 다 끊겼으니까.”
진우는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마나를 움직여 손끝에 느껴지는 토양의 성질을 변형시켰다. 토바르와 매덤 행성에서 숱하게 연습을 했던 물질 변형 기술이었다.
진우가 마나를 이용해서 물질 변형 기술을 사용하자, 단단한 흙으로 덮여 있던 바닥이 부드러운 고무처럼 변했다. 진우는 그 위에 앉아 물구나무를 섰다. 그러자 그의 몸이 마치 늪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부드럽게 바닥을 파고들었다.
* * * * *
진우의 몸은 돔 바닥을 뚫고 무려 일 킬로미터 가량을 내려갔다. 아직 안정이 되지 않은 몸으로 끊임없이 마나를 운용하느라 몸이 죽을 듯이 아팠고, 시간도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렸다.
“지독한 자식.”
애초에 놈의 본체가 돔의 지하에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었다. 진우는 그 동안 마수에게 도전할 때마다 주변의 마나 움직임을 탐색했지만, 돔의 건물 어디에서도 뚜렷하게 마나가 모여 있거나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하에 묻혀 있다는 거지.”
동조의 기술을 쓰고 난 뒤부터는 마수들을 일찍 쓰러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간간이 돔의 지하를 향해 마나 탐색을 했었다. 그 결과 돔의 바닥 중앙에서 유난히 마나가 많이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신호가 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깊이 묻혔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깊은 곳에 숨어 있을 줄이야.”
진우의 물질 변형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동조 단계에 든 헌터들 가운데에서는 발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진우의 능력으로도 1Km나 되는 지하를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밑으로 내려갈수록 위에서 전해지는 압력 역시 무시무시했다.
한참을 밑으로 내려가던 진우의 손끝에 지금까지와는 성질이 다른 느낌이 전해졌다.
“인공 암석이로군.”
금속이나 콘크리트와는 달랐다. 그것은 암석이기는 했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하이뇰이 뭔가 수작을 부려 놓았는지 진우의 물질 변형 기술도 잘 통하지 않았다. 그는 인공 암석을 뚫는 데만 10분가량을 소비한 끝에 간신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으챠.”
인공 암석 뒤는 커다란 공동이었다. 진우가 공동의 벽에 해당하는 암반을 뚫고 나오자마자 그의 몸이 텅 빈 공간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떨어지는 도중에 몸을 돌려 바로 세운 뒤 부드럽게 공동의 바닥에 착지했다.
“돔 밑의 돔이라...”
공동은 또 하나의 거대한 돔이었다. 그리고 지름이 백 미터 가량 되는 그곳에는 거대한 장치가 공동의 절반가량을 채우고 있었다. 하이뇰의 본체였다.
* * * * *
진우는 뒤집힐 것 같은 뱃속을 달래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허공에 열 개의 마나창을 띄웠다. 마나를 있는 대로 퍼부어서 두 마리의 최상급 마수를 박살내고, 엉망이 된 몸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물질 변형을 이용해 땅 속을 1Km나 파고든 뒤였다.
마나 기관에 저장되어 있던 막대한 마나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동조 기술을 사용하자 또다시 엄청난 통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회복시키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마나창을 이용해서 하이뇰의 본체를 부숴버리려는 순간, 진우의 앞에 하이뇰의 실체화된 몸이 나타났다.
“아직 견딜 만 한가 보구나. 홀로그램 영상도 아니고 직접 실체화시키다니.”
나타난 하이뇰의 표정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넌, 나를 파괴하면 안 돼.”
“호오~. 이제야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기계 장치라는 걸 이해하셨나? 죽이는 게 아니라 파괴한다고 말을 하는군.”
“넌 아무것도 몰라. 넌 내가 왜 인공지능을 이용하면서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는지 모른다고. 지난 천 년 동안 수없이 마수들을 만들고 부수면서 내가 무엇을 실험하고 있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야. 지금 나를 파괴하면 천 년을 이어온 원대한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거야. 그러지 마. 절대로 그러면 안 돼.”
녀석의 음성은 분노에 차서 떨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었다. 천 년을 이어온 원대한 계획? 코웃음을 치며 하이뇰의 본체를 박살내려던 진우의 손이 잠시 멈췄다.
“천 년의 계획? 그게 뭐냐?”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그래? 그럼 나도 더 이상 기다려 줄 수 없겠군. 잘 가라.”
진우의 손이 다시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가 손을 막 앞으로 뻗으려는 찰나, 하이뇰이 비명을 지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말할 게. 다 말해 줄 게. 그러니 제발 나를 부수지 마.”
진우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이뇰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나는 지배의 단계에 들 수 있어. 더 이상의 깨달음이 없이도 말이야. 그걸 위해 지난 천 년 동안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실험해 왔다고. 이제 완성이 코앞에 다가왔어. 지금 나를 파괴하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과 실험이 죄다 물거품이 된다고.”
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깨달음이 없이도 지배의 단계에 들 수 있다고?”
“그래. 정말이야. 단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네가 원하면 그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어. 그럼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나처럼 시스템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육신의 한계를 초월한 시간을 보내면서 지배의 단계를 노릴 수가 있다고.”
진우는 아무 말 없이 하이뇰을 바라보았다.
“네가 조르크 행성에 있을 때 머물렀다는 마을 말이야.”
진우가 갑자기 조르크 행성을 입에 올리자 하이뇰의 표정이 흠칫하며 굳었다.
“그 마을의 이름이 혹시 디키오였냐?”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진우의 말이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디키오라는 지명이 나오자 하이뇰은 인공지능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반응을 본 진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알지. 조르크 행성의 디키오. 플레비크 인들이 정복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유일한 행성. 아니, 유일한 마을. 네 녀석이 이곳을 탈출한 뒤에 머물렀다는 곳이 바로 그 마을이었군.”
“네가 그 마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잖아!”
하이뇰의 눈이 다시 사납게 변했다. 녀석은 어느새 진우에게 사정하는 듯하던 말투를 버리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진우는 코웃음을 쳤다.
“첼스본이 남긴 기록에서 언급되었던 곳이지. 그가 가장 강조했던 곳이기도 해. 나에게 반드시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 지배 단계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 하지만 가짜일 가능성도 많은 곳. 첼스본은 니코레임 인들 가운데 누군가 그곳의 비밀을 파헤쳐 주기를 바랐어. 그렇잖아도 이곳의 일이 끝나면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뜻밖이로군. 네 녀석이 머물며 수련을 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니.”
“첼스본이 말했다고? 그 자식은 디키오를 어떻게 알았는데?”
하이뇰은 거의 악을 쓰다시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머리 위로 올려졌던 진우의 손이 앞을 향해 수평으로 뻗었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열 개의 마나창이 쏜살같이 하이뇰의 본체를 향해 날아갔다.
“첼스본이 이곳에 오기 전에 먼저 들렀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거든.”
진우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나 하이뇰은 진우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녀석의 본체는 그순간 진우의 마나창을 맞아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우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녀석의 실체화된 몸이 안개처럼 흩어져 마나로 돌아갔다.
“하이뇰이 왜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몸을 버려 가면서까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애썼는지 궁금했었는데, 그런 거였군. 녀석은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비록 인공지능의 형태라도 지배의 단계에 올라설 수 있다고 믿었던 거였어.”
첼스본이 진우에게 남겼던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로 언급했던 것이 바로 다음 수련의 예정지인 조르크 행성에 들르거든 꼭 한 번 디키오라는 마을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첼스본은 그 자료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는 우연히 그곳을 발견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우연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마나의 이끌림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것 같다. 나는 거기서 예전에 그곳을 침략했던 특이한 외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플레비크 인들이 과거에 이곳에 쳐들어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사나운 침략자들은 몰살을 당하다시피 비참한 패배를 하고 도망갔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그 뒤로 다시는 디키오는 물론 조르크 행성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는 것이다.
”
첼스본은 디키오에 머무는 동안 플레비크 인들이 어떻게 몰살을 당했고, 왜 다시는 다시 공격해오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물어도 그 부분에 대해 디키오 사람들은 한 마디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결국 조르크 행성을 떠나 피엔다에 왔던 첼스본은 용사의 관 도전을 포기하고 돌아가기 전에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나중에라도 니코레임 인들이 조르크 행성을 찾아가 그곳의 비밀을 확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왜 니코레임으로 돌아간 뒤에는 디키오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느냐는 거지.”
타르코스가 전해 준 자료에는 조르크 행성에 관해 많은 내용이 있었고, 첼스본을 비롯한 예전의 헌터들이 남긴 기록들도 그대로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디키오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방법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것 뿐이지.”
진우는 아픈 몸을 이끌고 손과 발에 마나를 덧씌워 이미 산산이 부서진 하이뇰의 본체를 다시 하나하나 정성껏 조각을 내었다. 그리고는 잠시 머물면서 몸을 회복시킨 다음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돔의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서의 수련의 완료를 의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