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하이뇰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진우는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우월의식과 오만함을 느꼈다. 그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들에 대해 근본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로 하여금 그의 존재를 없애버릴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던 것은 녀석이 지구에 자신의 시스템을 심으려고 한 부분이었다.
‘하이뇰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에게 있어서 합리성의 기준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생존과 유지지. 스스로의 존재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퍼트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놈은 언제든지 이 행성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어. 녀석에게는 그게 바로 합리적인 선택일 테니까.’
그러나 메심헤네스와 파토스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진우의 착각이거나 독단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그들이 선택하기를 바랐다.
진우가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며 입을 다물고 있자, 파토스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우린 용사들이 다른 행성으로 진출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진우 너에게 용사의 관을 정복한 뒤에 포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던 거야. 하이뇰이라는 자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지만, 설사 그 자가 정말로 시스템의 중추라고 해도 그걸 멈추게 하거나 없애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어.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대표가 아니야.”
진우는 파토스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이곳에는 별다른 대표가 없어. 그게 피엔다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지. 굳이 유일한 대표를 꼽는면 오직 하이뇰 뿐이라고도 할 수 있지. 나는 당신들이 이곳의 대표이기 때문에 의견을 묻는 게 아니야. 그냥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내 계획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알고 싶을 뿐이야.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의견을 물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우리가 반대하면 자네는 하이뇰을 그냥 둘 생각인가?”
메심헤네스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제 생각하고는 맞지 않지만 어차피 저는 이곳의 주민이 아니니까요. 당신들의 운명은 당신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하이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의견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생각이라도 알고 싶은 것이지만, 다들 싫다고 하면 저도 굳이 간섭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거기서 말을 끝내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저에게 주신 첼스본의 기록 말이에요. 여러분은 그걸 전혀 해독하지 못하더군요.”
그러자 파토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연하지. 그건 진우 네 고향 행성의 언어로 작성된 것이라면서? 시스템에 번역이나 통역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이곳의 외국어를 바꿔줄 뿐이야. 어딘지도 모르는 외계 행성의 언어까지 번역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하지만 시스템은 그 문서가 어느 행성의 언어로 작성이 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지. 다만 가르쳐주지 않았을 뿐이야. 만약 당신들이 그 기록이 어느 행성의 언어로 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서 지목했다면 시스템은 분명 번역해 주었을 테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 당신들과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메심헤네스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정확히 하고 싶은 얘기가 뭔가?”
“이곳에는 삼백년 전의 첼스본 이후로도 몇몇 외계인들이 다녀간 적이 있어요. 알고 계시겠지만 그들은 용사의 관에도 도전했지요. 하이뇰은 그들에게 통역 기능이 제공되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다만 피엔다 행성인들에게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지요. 녀석은 이곳 사람들이 포털을 이용하는 것조차 가로막았습니다. 하이뇰이 없었다면 모두 진즉에 가능했던 것들이지요. 다시 말해 하이뇰이 시스템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끼어든 겁니다.
”
메심헤네스는 진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하이뇰이 원하면 각 시스템의 독립성이 무너지기도 한다는 뜻이군.”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것도 한계는 있을 겁니다. 녀석은 저 같은 외계인이 이곳을 방문해서 활동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으니까요. 녀석이 가지고 있는 울타리의 크기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아무튼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오늘은 일단 돌아가셔서 동료들과 의논을 해 보세요. 그래서 생각이 결정되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어느 쪽이든 저는 여러분의 의사를 따르겠습니다.”
메심헤네스와 파토스는 올 때와는 달리 무거운 표정을 하고 돌아갔다. 진우는 그날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바닷가에서 해가 질 때가지 파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하이뇰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생각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 * * * *
980관의 배경은 물속이었다. 발렌이라는 마수는 돌고래 정도의 크기였지만 몸무게가 10톤이 넘었다.
마나 창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가죽을 지니고 있는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헤엄을 치면서 진우를 공격했다. 속도나 무게 모든 면에 있어서 새들 행성에서 상대했던 천구보다 더한 놈이었다.
진우는 놈을 상대하다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상대의 몸뚱이를 두 조각으로 잘라 마나로 돌려보냈다. 발렌이 사라지자 돔을 가득 채웠던 물 역시 씻은 듯이 사라지고 진우는 도전에 성공했다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진우의 앞에 예고도 없이 하이뇰이 나타났다. 그의 앞에 나타난 하이뇰의 표정은 뭔가 잔뜩 불만에 차 있었다.
“너 어떻게 마수들을 그렇게 쉽게 처리하는 거지?”
녀석은 나타나자마자 진우에게 그렇게 따지듯이 물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른데? 998관에 도전할 때 만나기로 한 게 아니었어?왜 갑자기 다시 나타난 거야?”
진우는 녀석이 불만을 터트리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라. 내가 만든 마수들을 그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진우는 하이뇰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뭐가 불만인데? 네 장난감들이 생각보다 허접해서?”
“장난감? 내 위대한 작품들이 장난감이라고?”
하이뇰은 진우의 반응에 얼굴색이 변해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그런 하이뇰을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하이뇰을 냉정하게 바라보던 진우는 아무 말 없이 오른손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해서 하이뇰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 상태에서 마나를 운용하자, 잠시 후 그의 손바닥 위에 낮에 상대했던 980관의 마수, 발렌이 나타났다.
크기가 주먹만하게 작아지고 살아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생긴 모양은 영락없이 발렌이었다. 그것을 본 하이뇰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너, 너... 어떻게?”
“왜? 마나를 이용해서 실체를 구현시키는 기술을 너만 쓸 수 있는 줄 알았어? 아니면 시스템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생생하게 마수의 형상을 구현해 낼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어서? 너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 있는 것 아니야? 나도 동조 단계에 들었어. 이런 장난쯤 연습만 하면 못할 게 없다고.”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리 동조 단계에 들었어도 마수의 형상을 마나를 이용하여 실체로 구현하는 것은 결코 연습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동안 마수를 상대하고, 하이뇰의 마나 공급 장치를 공략할 계획을 짜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가며 죽자고 노력을 한 성과였다. 하지만 일부러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 내뱉은 진우의 말에 하이뇰은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봐. 삼백년 전에 첼스본을 속여 넘긴 것은 깜찍한 짓이었어. 솔직히 말하면 나도 922관을 돌파하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 하지만 901관부터 등장한 마수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야. 처음에는 내가 모르는 행성에서 사는 녀석들인지 알았는데, 제페를 상대하면서 알아차릴 수 있었지. 녀석들은 모두 네가 만들어낸 것들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엉터리 짝퉁 말이야.”
“엉터리가 아니야!”
진우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은 하이뇰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녀석은 어찌나 분한지 몸마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의 위대한 창조물들을 그렇게 모욕하다니. 네 놈이 어떻게 감히...”
“시끄러.”
진우는 하이뇰의 말을 단번에 잘라버렸다.
“마나크리스털을 흉내 낼 생각을 한 것은 칭찬해 주지. 하지만 네가 만들어 낸 것들은 너무나 어설펐어. 크기만 크고 담긴 마나의 양은 형편없었지. 헛수고야. 정말 지배의 단계에 들기 전까지는 절대로 진짜 마나 크리스털을 만들어낼 수는 없어. 솔직히 너도 알고 있었잖아? 지배단계란 시스템의 힘과 인공적인 마나 운용 장치를 이용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거야. 단순히 계산을 빨리하고 동시에 엄청난 마나를 운용할 수 있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진우의 말이 하이뇰에게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는 입을 딱 벌리고 한참동안 진우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이를 뿌드득 갈며 말을 내뱉었다.
“잘난 척 하지 마라. 그러는 너는 지배의 단계에 들었다는 거냐? 네놈이 내가 만든 마수를 끝까지 상대할 수 있다고? 그래. 어디 두고보자. 998관에서 좌표를 알려준다고 했지? 그곳에서 정말 제대로 된 최상급 마수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려 주마.”
그 말과 함께 하이뇰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음껏 비웃어주는 것처럼 녀석을 자극한 것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하이뇰이 사라진 빈자리를 바라보는 진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녀석은 그에게 있어 바질리크처럼 또 하나의 반면교사였다. 하이뇰의 능력은 어떤 면에서는 바질리크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훨씬 어렸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그의 오만함과 욕망을 더욱 증폭시킨 듯했다.
901관의 세리노부터 시작해서 진우가 그동안 돔에서 상대했던 80마리의 마수들은 그로서도 쉽게 쓰러트리기 어려운 놈들이었다. 녀석들은 최소한 하나 이상의 분야에서는 제아무리 상급 마수들이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다.
진우는 처음에는 단계가 높아졌으니 그만큼 마수들도 강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도전이 거듭되면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들에게서 일반적인 마나스톤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마나 운용이 감지되었던 것이다.
922관에서 보았던 제페의 움직임은 단순히 상급 마수의 뛰어난 비행능력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보통의 상급 마수라면 그 정도 크기의 돔에서는 차라리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하고 땅 위에서 진우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불리한 싸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좁은 건물 안에서 제페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아무리 상급 마수라고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제페가 비행할 때에 그의 주위로 강력한 마나가 발산되어 천장이나 벽에 몸이 부딪히지 않게 하는 것을 보았다. 마나를 볼 수 있는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피하는 데에 정신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동조의 기술을 사용할 생각을 하면서 심적인 여유를 갖게 되자 놈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마나의 양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사의 관에서 등장하는 마수들이 일반적인 마수가 아니라 시스템이 실체화시킨 가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901관부터 상대했던 마수들은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강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골탕먹이기 위해 하이뇰이 마수들을 일부러 강화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922관에서 제페를 상대하면서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강화시킨다고? 어떻게?’
마수들의 힘의 근원은 마나에 있었다. 마수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과 질을 높이거나, 마나 운용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제페는 분명 진우도 깜짝 놀랄 정도의 마나 운용능력을 보여주기는 했다. 놈은 덩치에 비해 비좁은 돔 내에서도 눈부신 비행 속도와 방향 전환 능력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몸 주위를 감싸고 발산되는 마나의 양 역시 너무 많았다.
‘짝퉁이기는 하지만 마나 크리스털을 흉내 낸 것이었지. 대단하기는 하지만 시스템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제페가 죽은 뒤에 마나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유심히 관찰한 진우는 하이뇰이 마수의 몸 안에 마나 크리스털을 구현시켰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보통의 마나 크리스털이라고 보기에는 형편없이 적은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어설프게나마 결정 구조를 구현한 것이었다.
‘대단하기는 하지. 하지만 덕분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고.’
진우는 스스로 마나를 결정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해 그 뒤로 만나는 마수들을 전보다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만큼은 서두르지 않았다. 공연히 하이뇰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모든 마수를 10분 정도 되는 시간에 쓰러트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래도 하이뇰 녀석 역시 대단한 것만은 틀림없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불쑥 찾아올 정도니까.’
생각할수록 대단하면서도 안타까운 녀석이었다.
============================ 작품 후기 ============================
음... 900대 이상의 용사의 관에서 등장하는 마수들에 대해서는 사실 이 파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설명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녀석들이 왜 그렇게 강한지 궁금해 하는 댓글이 달린 것을 보고 조금 고민하다가 그냥 이쪽으로 글을 옮기고 하이뇰을 등장시켜 미리 설명을 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스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서 댓글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묵묵부답하기도 난감했거든요.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서 그렇게 하기는 했습니다만, 간혹 독자들이 너무 날카로워 제가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