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204화 (204/235)

204화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한 채로 몇 분이 지났다. 대치를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하이뇰이었다.

“하려던 말을 마저 듣도록 하지. 어떻게 하기로 결정을 했나?”

진우는 하이뇰을 지긋이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하지. 좌표를 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

“뭐지?”

“크리켄데르 용사의 관은 최종 단계가 몇 관이지?”

“그걸 왜 묻지? 도전해서 알아보면 되잖아?”

하이뇰은 진우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녀석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눈을 치켜뜨며 더욱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진우는 그런 하이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러 과장되게 입술을 비틀었다.

“네가 나를 믿지 않으니 나도 너를 믿을 수가 없잖아. 좌표를 주고 난 뒤에 네가 먼저 포털을 통해 내 고향으로 로봇을 보내 시스템을 설치하면 어떡하라고? 일단 포털을 만들어 놓고 기다려. 그럼 내가 최종 단계에 도전하기 직전에 좌표를 주지. 그래도 네가 약속을 어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정도 위험은 내가 그냥 감수하는 것으로 하지.”

“마지막 관 하나 정도는 내가 마수를 강화시켜도 돌파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게 제일 어려운 관인데도?”

“거기서 마수를 더 강화시킬 수 있다고?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내가 마지막 관을 깰 때까지 기다려주든가. 그렇게 해주면 나야 더 좋지.”

하이뇰은 아무런 대답 없이 진우를 사납게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입을 떼었다.

“999관이다. 그게 마지막 단계야.”

“거짓말은 아니겠지?”

진우가 슬쩍 떠보는 듯한 말을 하자 하이뇰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정보를 주지 않을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너희들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야.”

완전해서가 아니라 거짓말을 할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거겠지. 너도 결국은 시스템이니까. 진우는 내심 천 번째 관이 마지막 단계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서 하나 모자라는 999관이 마지막 관이라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한다고 해도 더 이상 지배 단계에 오르는 수련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가짜야. 이 녀석이 만들어내는 것도 모두 엉터리지.’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일단은 하이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용사의 관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좌표를 알려주기 전에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진우는 하이뇰의 말에 조금 고민하는 척 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999관에 도전하기 직전에 좌표를 알려주지.”

그러나 이번에는 하이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네가 알려준 좌표가 실제로 네 고향인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 998단계에 도전하기 전에 좌표를 말해라. 로봇을 보내 그곳에 너와 같은 종족이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면 나도 최소한 하루 이틀 정도는 필요하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진우는 속으로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을 고민하는 척하다가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998관에 도전하기 직전에 좌표를 주겠다.”

“협상 완료. 네가 998관에 들어서면 내가 다시 나타나마. 카메라가 작동하기 전에 말이야. 그때 좌표를 말해라. 도전은 그 다음부터 시작될 거야.”

그 말과 함께 하이뇰은 사라졌다. 진우는 하이뇰이 사라지자 표시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로써 당분간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경우든 하이뇰에게 지구의 좌표를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 행성이나 적당히 좌표를 불러줄 수도 없었다. 그가 이미 알고 있는 행성의 좌표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 년 전에도 피엔다 행성인들은 수많은 외계 행성들을 탐사한 경험이 있었다. 하이뇰은 그 당시에 남겨진 자료를 모두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이뇰이 절대로 알지 못할 곳, 다시 말해 과거의 피엔다 행성인들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의 좌표를 불러줘야 했다. 나아가서 하이뇰의 로봇이 이동해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하더라도 충분히 그것을 막을 능력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시스템에 의한 지배를 받게 되더라도 진우로서는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곳이면 더욱 좋았다.

진우가 최악의 경우 하이뇰에게 알려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플레비크의 좌표였다. 그는 피엔다 사람들이 플레비크 행성에 가 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매덤 행성에서 투르가가 자신의 노예였던 이티삿에게 한 말이 맞는다면, 플레비크를 방문한 최초의 외계인은 칠백년 전의 마스바로크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방문한 또 다른 외계인으로 인해 플레비크 인들의 외계 행성 정복이 시작되었다.

만약 피엔다 인들이 플레비크를 방문했다면 당시 플레비크 전사들의 성향으로 볼 때 절대로 이곳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피엔다는 아직 플레비크 인들에 의해 정복되거나 침략을 당한 흔적이 없었고, 그것은 피엔다인들이 플레비크 인들이나 그들의 행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좌표를 알려줬다가는 하이뇰을 처리할 시간이 없어.’

좌표를 알려주면 하이뇰이 약속을 지켜 자신이 용사의 관을 모두 정복할 때까지 기다려줄까? 녀석은 합리성에 어긋나는 선택을 할 수 없게 설계된 인공지능이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진우를 속이는 게 더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결론을 녀석이 내린다면? 그로서는 적은 가능성에 불과하더라도 그런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  * * * *

하이뇰이 돌아간 뒤에 진우는 다시 용사의 관 도전을 재개했다.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지만 다른 누구보다 가제타가 그 사실을 기뻐했다. 진우는 용사의 관 도전을 다시 시작한 다음날 메심헤네스와 파토스를 호텔로 불렀다.

“이제 바깥에서 좀 오래 견딜 수 있게 되었나요?”

그들을 만나자마자 바로 호텔밖으로 데리고 나온 진우가 그렇게 묻자 메심헤네스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늘기는 했지만 아직도 40분 정도가 한계입니다.”

“그 정도면 일단 제 계획을 대충 설명할 정도는 되겠군요.”

“계획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파토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진우는 파토스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해변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꺼내도 될 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말을 하기로 했다. 이방인인 자신이 아니라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했고,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려면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하이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진우의 말에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 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메심헤네스는 파토스를 쳐다보았지만 그가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자 진우를 향해 물었다.

“아니, 없네. 그게 누군가?”

하지만 진우는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두 사람을 향해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이곳의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아시나요?”

“시스템을 만든 사람? 글쎄. 그런 사람이 따로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차피 시스템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생긴 지 천년 정도 됐다는 얘기는 들었어. 그때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만들었겠지.”

파토스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진우는 해변을 향해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시스템을 설계하고 처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이뇰이지요. 말씀대로 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 뒤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연구 결과가 덧붙여진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지금까지 시스템이 스스로를 발전시켜온 거예요. 그 결과가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거대하고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바로 그 시스템이고요.”

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있다고?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놀라운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 처음 시작한 사람이 있으니까 지금의 결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누군지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알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진우의 눈을 보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 *

메심헤네스와 파토스가 밖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진우는 하이뇰에 관한 이야기를 핵심만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고, 자신의 복수를 위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스템이 만들어진 목적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메심헤네스와 파토스는 진우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얼굴 표정이 점점 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진우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냥 믿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 하이뇰이라는 자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인가? 천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파토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없죠. 하이뇰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지금 스스로를 하이뇰 본인이라고 주장하는 녀석은 인공지능일 뿐이에요. 하이뇰이 자신의 성격을 반영시키고, 본인이 알고 있던 기술을 더 발전된 형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시스템이지요. 말하자면 시스템의 중추라고 할 수 있어요.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점은 다른 시스템과 같지만, 그들을 자기 판단대로 부릴 수 있다는 게 다르죠.”

“시스템의 중추라고? 시스템에는 중추가 없어. 그건 자네가 잘못 아는 거야.”

파토스는 진우의 말을 인상을 쓰면서 부정했다. 진우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파토스의 옆에 있던 메심헤네스는 그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진우는 두 사람을 향해 차분하게 달래듯 설명을 계속했다.

“시스템은 국가나 국왕의 권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안된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본래는 특별한 중추가 없어야 하지요. 하이뇰이 시스템을 처음 만들 때의 계획도 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저도 생각해요. 절대 권력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을 만든 하이뇰이 자신을 흉내 낸 인공지능이 또 하나의 절대 권력이 되게 하는 건 너무나 큰 모순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을 복제한 것이나 다름없는 인공지능이 다른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래야만 더 높은 단계를 흉내낼 수 있었으니까요. 복수를 마치고 난 뒤의 허탈함을 개인적인 욕망으로 채운 거지요.”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독립 운동을 했던 수많은 지도자들이, 정작 해방이 된 뒤에는 스스로 독재자가 되어 장기 집권을 시도했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부패와 향락에 빠져 나라를 피폐하기 만든 이들도 많았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부당한 권력이 되고 만 것이다. 진우는 지구에서 있었던 그런 어두운 역사가 우주를 넘어 이곳 피엔다에서도 벌어진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다.

하이뇰의 경우는 더욱 나빴다. 진우가 보기에 그는 절대 권력을 넘어선 절대 존재가 되려고 했다.

스스로를 신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자네가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는 이유가 뭔가?”

메심헤네스가 진우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진우는 두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는 하이뇰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했다. 메심헤네스는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을 뿐이었지만, 파토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너무나 위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뇰이 중추라면서? 그를 없앴다가 시스템이 정지되면 어떡하려고?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거의 모든 것들이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움직인다고. 잘못하면 대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

진우는 파토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의 기본적인 구조는 독립 분산형이야. 각각의 부분마다 그것을 관리하는 독립된 시스템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하지. 그들이 복잡한 그물구조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명령을 하거나 복종을 하게 되어 있지는 않아. 대신 하나의 시스템이 붕괴되거나 고장 나면 그 즉시 여유가 있는 다른 시스템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거야. 하이뇰은 그런 구조에 잘못 끼어든 이질적인 존재인 셈이지. 모순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어. 그렇다고 놈이 시스템의 기본적인 구조 자체를 바꾼 것은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하이뇰이 없어진다고 해도 시스템 자체는 문제없이 작동할 거야. 용사의 관에 있는 돔이 어떻게 될 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메심헤네스는 진우의 설명이 끝나자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우리에게 하이뇰을 없애는 일을 도와달라는 건가?”

그의 말에 파토스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함께 하겠다고 하시면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죠. 하지만 그것 말고도 두 분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외계인입니다. 제가 볼 때 현재 상태에서 이곳은 별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어요. 주민들도 큰 불만이 없는 것 같고요. 저는 이 일을 저 혼자 결정하고 처리하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문제가 없다면서 왜 굳이 하이뇰을 없애려고....”

파토스가 그렇게 말을 하는 찰나 메심헤네스가 그의 말을 막았다.

“절대적인 성군은 언제 절대적인 폭군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지. 자네는 하이뇰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고 생각하는군?”

그 말이 맞았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진우는 하이뇰의 존재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은 살아 있을 때에도 부모의 복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데에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진우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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