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진우가 960관마저 돌파했을 때, 드디어 하이뇰이 다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샤워를 마치고 가운 하나만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고, 식당으로 내려가기가 귀찮아 방으로 시킨 늦은 저녁 식사를 막 입에다 떠 넣으려던 참이었다.
하이뇰의 인공지능은 예전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식탁 위에 올려놓은 그의 셔퍼를 이용해 허공에 자신의 영상을 띄웠다.
‘싸가지 없는 놈.’
진우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지만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그의 영상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군.”
하이뇰은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나에게는 오랜만이 아니야.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늘 너를 지켜보고 있었거든.”
진우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녀석의 얼굴에 살짝 비틀린 웃음이 맺혔다.
“뭐, 가끔은 내 눈에도 띄지 않을 때가 있었지만 말이야. 너, 해변을 몹시 좋아하는 모양이더군.”
그 말을 하는 하이뇰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 드러난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불쾌감, 의심. 그리고 옅은 적대감. 진우는 순간 이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공지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향에는 넓은 바다가 있지. 개인적으로 내가 바다를 좋아하기도 하고.”
“첼스본도 바다를 좋아하기는 했었지. 그곳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는가? 아... 자네는 니코레임 출신이 아니지. 어디라고 했지?”
진우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이 어디서 함부로 유도 심문을... 진우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결정이 되면 나한테 먼저 찾아온다고 했으니, 이젠 결정이 된 모양이군.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
“그래 결정을 했지. 네가 용사의 관을 모두 정복하면 다른 행성으로 갈 수 있는 포털을 열어주기로 했어.”
하이뇰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시원스럽게 결단을 내린다는 표정으로 진우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정확하게 해야지. 내가 용사의 관을 모두 정복하면 무엇을 요구하든 너는 들어줄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은가?”
하이뇰의 웃음이 싸늘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 같아.”
“안전장치?”
“그래.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가 절대로 용사의 관을 끝까지 돌파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어. 조금 껄끄러운 얘기이기는 하겠지만 마수를 엄청나게 강하게 만들어 너를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스스로 지배의 단계에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무 자신만만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래서 봐주기로 결정했다는 얘기인가? 고맙고도 무서운 얘기군 그래.”
“진심으로 고마워해야 할 거야. 네가 요즘 크리켄데르의 몇몇 쥐새끼들과 수상한 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눈치 채고 있으니까. 네가 뭘 하든 상관은 없지만 너무 지나치게 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지만 가끔 화를 내기도 하거든.”
“그 안전장치라는 것에 대해서나 말을 하지 그래?”
“내가 너를 위해 포털 장치를 하나 열어 주지. 네 고향으로 향하는 포털 말이야. 그러면 내 귀여운 로봇 가운데 하나가 그곳으로 가서 시스템을 설치할 거야. 아주 작고 깜찍한 시스템이라서 배낭 하나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놈이지. 포털을 통과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너는 내 로봇이 그 시스템을 자네 고향의 적당한 장치에 설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주기만 하면 돼. 그럼 나머지는 그 시스템이 알아서 할 거야.”
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이 자식 봐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봐. 네가 만약 용사의 관을 정복한 다음에 시스템을 중지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네 말에 따라 시스템을 중지시킬 수밖에 없어. 그게 미리 설정된 규칙이고, 나는 그 규칙을 거부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너에게 배신당하고 얻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는 거잖아? 그렇게 무기력하게 상대의 손에 순순히 칼자루를 넘겨준 다음에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호소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라는 거지.”
진우를 바라보는 하이뇰의 입매가 잔뜩 비틀려 있었다. 그의 눈빛에 살기가 감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우도 더 이상 웃으며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이뇰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되지?”
“반대의 경우라니?”
“네가 시스템을 내 고향에다 설치한 뒤에, 용사의 관을 말도 안 되게 강화시켜 나를 죽이려고 할 경우 말이야.”
“글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믿으라는 것밖에 없군. 나는 지극히 정직하고 합리적인 존재야. 하지만 너는 아니지. 그럼 누가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는 분명한 거 아니겠어? 어떻게 할래? 고향으로 가는 포털을 먼저 열 수 있도록 협조할래, 아니면 그냥 자기 힘만 믿고 끝까지 도전할래?”
지구의 좌표를 알려달라고? 어림없는 소리. 진우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고 하이뇰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냥 여기서 용사의 관 도전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모양이군.”
그러자 하이뇰이 코웃음을 쳤다.
“그냥 돌아간다고? 그것도 상관없어. 사실은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하지. 그럴 경우 너도 나도 서로 아무것도 잃는 게 없으니까. 뭐, 얻는 것도 없겠지만 말이야.”
진우는 하이뇰의 영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마를 찌푸리며 한동안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지은 끝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제안을 하는군. 시간이 좀 필요해. 며칠 동안 생각을 해 보고 결정을 한 다음에 알려주도록 하지. 내가 먼저 연락을 할 방법이 없으니 시간을 정하자. 닷새 뒤에 내 방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어때? 그때까지 어느 쪽으로든 마음을 정하도록 하지.”
하이뇰은 진우의 마음을 알아내려는 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몇 시가 적당하겠나?”
진우는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크리켄데르의 바다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처럼 식사를 하려는 순간에 불쑥 나타나면 곤란하니, 다음에는 저녁 9시 정도가 좋을 것 같군. 그 정도 시간이면 나도 샤워를 하고 식사를 모두 마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좋아. 그럼 오일 뒤 저녁 아홉시에 보기로 하지. 셔퍼를 켜 놓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 말을 끝으로 하이뇰의 홀로그램 영상은 사라졌다. 진우는 그가 사라진 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버렸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의 얼굴을 간질였다.
“후~. 하이뇰. 너는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는구나.”
그의 독백이 바람에 실려 어두워지는 바다 위로 흩어졌다.
* * * * *
진우는 가제타에게 당분간 용사의 관 도전을 쉬겠다고 통보했다.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그는 지난번 도전에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고 둘러댔다.
진우는 가제타에게 며칠 쉬면서 부상을 치료할 테니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하기 전까지는 일체 찾지도 말고 방해하지도 말아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파토스와 메심헤네스에게도 연락해 당분간 자신을 찾지 말라고 했다.
치료와 휴식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하이뇰이 돌아간 다음날부터 진우는 날마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가 바닷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그동안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틈틈이 열심히 했던 수련의 성과를 이용했다.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형체와 똑같이 생긴 복제 인형을 구현시킨 것이다.
“마나를 이용해 실물 같은 마네킹을 만드는 기술이라.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쓸모없는 기술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덕을 좀 볼 수 있겠군.”
진우가 만든 그의 복제 인형은 아주 가까이서 살핀다면 쉽게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직은 엉성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보기에는 움직임이 없다 뿐이지 영락없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바닷가까지 공포를 무릅쓰고 다가와 살필 사람이 없는 한, 남들이 보기에는 진우가 하루 종일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앉아 있던 자리 뒤편에 만든 복제 인형을 슬쩍 뒤돌아보고는 망설임 없이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공해나 오염이 없어 도시에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크리켄데르의 바다가 그의 몸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 * * * *
용사의 관 일대의 마나 공급 장치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메심헤네스가 어렵게 구해온 설계도를 통해 이미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진우는 며칠 동안 하루 종일 바다 속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신의 기억과 실제의 모습을 비교하고 확인했다.
그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마나 공급 장치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지형까지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었다.
탐색이 사흘 째 되던 날, 진우는 용사의 관에 인접해 있는 가파른 해안 절벽에서 바다 쪽으로 1Km 가량 떨어진 곳의 해저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압력을 견디게 하기 위해 반구 형태로 만든 커다란 마나 집적 장치가 있었다. 굉장히 커다란 장치였다.
‘이곳에서 모인 마나가 용사의 관으로 향한다는 거지. 다른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지난 사흘 동안 진우가 확인한 마나 집적 장치는 열 개가 넘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 살피고 있는 것이 외형상으로만 본다면 가장 규모가 컸다. 진우는 이미 눈앞의 장치로부터 용사의 관 바로 밑까지 여러 차례 왕복하며 이곳에서 나온 마나가 어디로 공급되는지를 확인했다.
‘하이뇰이 단 하나의 마나 공급 장치에 의존할 리야 없겠지. 하지만 이것이 가장 주요한 마나 공급원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뭐 확실한 것은 실험을 해야 할 수 있겠지만.’
진우는 그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해저의 다른 곳을 누비면서 장치와 주변 지형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고 크리켄데르 곳곳을 관광객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용사의 관으로 이어지는 모든 마나 공급 장치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 * * *
하이뇰과 약속한 날이 되자, 진우는 느지막이 점심을 먹은 뒤에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복제 인형을 만든 그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8시가 지나서야 호텔로 돌아온 그는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식사를 주문한 다음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하이뇰을 기다렸다. 정확히 9시가 되었을 때 셔퍼가 진동하더니 하이뇰의 영상이 나타났다.
“아무리 바다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도대체 지난 며칠 동안 왜 하루 종일 바닷가에만 앉아 있었던 거지?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것도 중단하고 말이야.”
하이뇰은 나타나자마자 진우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얼굴 가득히 진우를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덕지덕지 묻어날 정도로 노골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진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매서운 눈초리를 무시했다.
“이봐. 마수를 강화시켜 날 죽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 건 바로 너잖아. 그런데 아직 서로 약속도 확실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용사의 관에 뛰어들라고? 내가 바보인지 알아? 그 안에서 무슨 꼴을 당할지 알고 함부로 도전하겠어?”
진우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하이뇰도 한 발 물러섰다.
“그럼 바닷가에는 왜 그렇게....”
상대의 이어지는 질문을 진우는 손을 들어 막았다.
“생각하느라 그랬던 거야. 그것도 말했잖아. 개인적으로 바다를 좋아한다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바닷가보다 좋은 장소가 없지.”
“생각을 무척 오래 하더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이야.”
하이뇰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래할 수밖에. 내 목숨이 아니라 고향의 미래까지 걸린 일이니까 말이야. 닷새나 시간을 달라고 한 게 그럼 다른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 건줄 알았나?”
진우는 이미 하이뇰이 따지고 들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대답을 준비해 놓았다. 인간이라면 논리를 뛰어넘는 직관적인 판단이나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녀석은 스스로를 진짜 하이뇰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인공지능에 불과했다.
자신의 대답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의심할 만한 완벽한 증거나 논리가 없는 이상 끝까지 따질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진우의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처럼 하이뇰은 진우의 대답이 쉽게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은 정했나? 만약 또 다시 시간을 달라고 하면 협상은 이걸로 끝이야.”
“생각을 정했지. 나도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말을 하면서 진우는 슬쩍 호텔 방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정확히 9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거 잘 됐군. 그럼 들어보기로 하지. 자네의 결정은 무엇......”
말을 하던 하이뇰의 영상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마치 노이즈가 낀 화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거 이상하.... 너 무슨 짓..... ”
하이뇰의 말이 툭툭 끊어지고 영상이 흔들리는 현상이 잠시 지속되었다. 그러나 1분가량이 지나자 영상은 다시 또렷해졌고 그의 말소리도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다시 본래의 상태를 회복한 하이뇰은 잔뜩 화가 난 모습이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을 하다니?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진우는 태연하게 그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하이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