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849관에 등장한 쉬코핀은 머리가 둘 달린 호랑이처럼 생긴 주제에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진우는 모처럼 활을 이용해 녀석의 머리 두 개에 하나씩 작은 구멍을 만든 다음 놈의 몸을 두 동강 내었다.
쉬코핀은 머리에 중추신경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 녀석이 머리에 생긴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주제에도 사정없이 덤벼드는 바람에 진우는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그는 용사의 관에 도전한 이래 처음으로 어깨에 제법 큰 상처를 입었다.
850관에서 상대해야 했던 마수가 매덤 행성의 유데르하가 아니었다면 진우는 그날 851관까지 도전하는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그가 그날의 도전을 마치고 인터뷰까지 마무리한 뒤 호텔로 돌아왔을 때, 파토스가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쉬코핀을 상대한 뒤 치료용 마나를 써서 상처를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진우는 예상치 못한 부상과, 그로 인한 시간 지연으로 심신이 다소 피곤한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파토스의 방문까지 받자 조금은 짜증이 난 상태였다.
“자네가 꼭 봐줬으면 하는 자료가 있어서 말이야.”
“자료요? 어떤 건데요?”
진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파토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그래. 자네 방에 올라가서 셔퍼로 전송하겠네. 보는 건 거기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진우는 파토스의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 속 없이 쾌활해 보이는 친구가 난처해한다고?
두 사람이 함께 진우의 방으로 올라간 뒤 파토스는 셔퍼를 통해 자료를 전송시켰다. 별 생각 없이 그 자료를 홀로그램 영상으로 띄웠던 진우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이 자료를 어디서 구한 거지요?”
파토스를 보는 진우의 표정이 날카로웠다.
“내 친구 중의 하나가 오래된 기록에서 찾았네. 무슨 자료인지 알겠나?”
자료는 어떤 화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에 찍힌 화면에 나타난 글자가 니코레임어였다. 진우는 첫 화면을 살펴본 뒤 습관처럼 스크롤을 내리려고 했지만 화면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이 자신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파토스를 향했다.
“뒤에 자료가 더 있는 것 같네요. 나머지는 어디 있죠?”
“그 자료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흥미가 있나?”
진우는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그제서야 파토스의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
“흥미가 있냐구요? 네, 있어요. 그런데 이 자료의 나머지 부분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뭔가 요구하실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거래를 하실 생각입니까?”
파토스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진우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직설적으로 얘기할까 아니면 조금 돌려서 의사를 타진해 볼까 망설이고 있는데 진우가 먼저 불쑥 입을 열었다.
“거래는 사절입니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자료를 대가로 저에게 뭔가 요구를 하실 생각이라면 그만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 오늘은 피곤한 날이라 그만 쉬고 싶어요.”
진우의 단호한 말에 파토스는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불쌍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자료는 삼백년 전의 첼스본이라는 외계인이 남긴 기록일세. 자료의 내용을 알아보는 걸 보니 자네도 그와 같은 곳에서 온 모양이군. 그런데도 관심이 없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콧방귀를 끼었다. 그가 니코레임어로 되어 있는 자료를 읽을 줄 아는 걸 보고 같은 행성 사람이라고 짐작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구태여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제가 이 자료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아니겠죠.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자료를 가지고 거래를 할 생각을 하다니. 생각보다 성급하고 경솔하시네요. 같은 행성 사람이 쓴 글에 대해서는 무조건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회의 때에도 그 점에 대해 잠시 말이 나오기는 했었다. 그러나 일단 시도해 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하지만 그 결론은 너무 성급했다.
파토스는 진우의 지적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확률이 적은 도박이었다. 그는 상대의 차가운 눈빛을 대하고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진우는 파토스의 풀 죽은 모습을 보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가 오늘 보인 행동은 평소에 보여주었던 파토스의 유쾌한 모습이나 행동과 어울리지 않았다.
분명 다른 사람의 의사가 개입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속셈은 드러내지도 않은 채 섣부른 거래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말려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힘없이 돌아갔던 파토스는 불과 이틀이 지나지 않아 다시 진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진우의 허락을 받아 방에 들어온 그는 먼저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경솔했네.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방법이 좋지 않았네. 용서해 주게.”
진우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파토스가 이러는 걸까? 그 부탁이 무엇이든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서는 자신이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하는 일과 연관이 있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태도로 보아 뭔가 다급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나.
“지난 번 보여주었던 자료의 나머지 부분을 셔퍼를 통해 전송했네. 확인해 보면 전에 보여주었던 자료의 나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솔직히 그 자료가 자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런 거라면 첼스본이 일부러 자신의 뒤를 이어 이곳에 올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남기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자료에 대해 더 이상 자네에게 어떤 대가를 원하지는 않을 걸세. 그냥 지난 번 일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하고 받아주게.”
“편지요?”
진우가 읽었던 자료의 내용은 편지 같은 게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정보였다. 그런데 편지라니?
“원래 그 자료의 제목은 크리켄데르어로 작성되었네. ‘이 자료를 읽을 수 있는 이에게’라고 되어 있었지. 아마 첼스본이 당시에 자료를 저장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부탁했었겠지. 그가 굳이 그런 수고까지 하면서 남긴 자료라면 그래도 자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든지 어차피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어. 읽을 수가 없으니까. 다만 그게 자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파토스는 말을 마치고 허둥지둥 그의 방을 떠났다. 진우는 그가 돌아간 뒤 셔퍼에 전송된 자료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파토스가 보내 준 자료의 내용은 생각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괘씸하다는 생각에 그냥 내쳐버렸다면 후회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자료에는 여러 가지 정보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진우의 관심을 끈 것은 다음 수련지로 예정되어 있던 조르크 행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타르코스가 준 자료에도 없는 내용이었다.
“부탁을 들어보기라고 할 걸 그랬나? 생각보다 자료의 가치가 있네. 조금 미안한데?”
* * * * *
진우가 890관을 돌파하고 900관 도전을 코앞에 두자 피엔다 행성 전체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기대대로 900관을 돌파한다면 삼백년 만에 드디어 900관 이상의 단계에 도전하는 용사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첼스본 이래로 그동안 마의 단계라고 불리는 900관을 돌파했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890관에서 조크펜트라는 조류형 상급 마수를 쓰러트린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던 가제타를 불렀다.
“전에 파토스가 저에게 와서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어요. 그 때에는 제가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아서 거절했는데, 혹시 시간이 나면 부탁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그 뒤로는 파토스가 통 저를 찾아오지 않아서 만날 수가 없네요.”
진우의 말을 들은 가제타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짐작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뭔가 함께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 뒤에 낯선 사람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진우는 세 명의 피엔다 행성인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명은 방송을 통해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S급 용사였지만, 깔끔한 정장 차림의 노신사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인물이었다.
“누구십니까?”
진우의 질문에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진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용사 양성 학교의 교감을 맡고 있는 메심 헤네스입니다. 저와 같이 온 사람은...”
“S급 전사인 켈로드님과 뮤로지에님이시죠?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방송을 통해 활약하시는 모습을 익히 보았습니다. 일단 들어오시죠.”
진우는 그들을 맞아들여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진우가 세 사람을 동시에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메심헤네스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파토스가 첼스본의 자료를 가지고 결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그를 통해 자료를 보낸 것은 저입니다. 부탁을 들어볼 의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역시 파토스에게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었다. 진우는 메심헤네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 가제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토스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분이 오셨군요. 뭐 그건 상관없지만 일단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탁의 내용이 뭡니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메심헤네스가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입을 열었다.
“진우님이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하면 시스템에게 하나의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진우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모든 도시의 용사의 관이 다 그렇습니다. 어떤 용사가 특정 도시에 있는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하게 되면 시스템은 정해진 한계 내에서 그 용사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크레딧을 요구해도 되고, 도시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달라고 해도 되지요. 한계를 벗어나는 부탁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용사의 관 정복을 통해서 시스템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지요. 그 밖에 용사들이 방송 대가로 받는 출연료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시스템의 보상과는 무관합니다..”
“그럼 지금까지 용사의 관을 정복했던 용사들은 모두 시스템으로부터 보상을 받았겠군요?”
“맞습니다. 게다가 용사의 관이 가지고 있는 최고 단계가 높을수록 보상이 더욱 커지지요. 이제 전 세계에서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용사의 관은 이곳 크리켄데르가 유일합니다. 용사들이 시스템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남아 있는 셈이지요.”
도대체 이 시스템이 용사의 관을 운영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진우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보상에 한계가 있다고 했죠? 그럼 크리켄데르 용사의 관을 정복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의 한계는 무엇인가요? 그걸 미리 알 수가 있나요?”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알려져 있지요. 이곳에 있는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하면 세 가지 절대 금기 중의 하나를 해제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상 보상의 한계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 가지 절대 금기요?”
“네. 시스템의 동작을 중시키는 것. 행성의 필드에 살아 있는 마수들이 서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다른 행성으로 움직일 수 있는 포털을 만드는 것. 그 세 가지입니다.”
진우의 표정이 멍해졌다. 말 그대로 절대 금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진우로서는 그런 일이 금기라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바 때문에 더욱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만약의 경우 시스템을 중지시키거나, 살아 있는 마수들을 부활시키는 것, 그리고 행성 이동용 포털을 여는 게 원칙적으로는 모두 가능하다는 얘기인가요?”
메심헤네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시스템은 예전에 이곳에서 자생했던 모든 마수들의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딘가에는 모든 마수들의 수정란이 최소 암수 한 쌍 이상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지요. 그리고 행성 이동용 포털이라면, 지금도 시스템이 마음만 먹으면 제작할 수 있습니다.”
이건 조금 생각해 볼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진우는 일단 그의 부탁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그럼 저에게 부탁을 할 것은 그 세 가지 금기 중에 어떤 걸 깨달라는 것인가요?”
“우리는 진우님이 행성 이동용 포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줬으면 하는 겁니다.”
방안의 공기가 일순 무겁게 가라앉았다. 진우가 입을 다물자 메심헤네스 일행도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진우가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행성 이동용 포털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그러자 메심헤네스가 짧은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는 피엔다 행성을 떠나 다른 행성에서 마수들을 사냥하고 싶습니다. 그게 용사 본래의 역할이니까요. 지난 수백 년 동안 이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말이 좋아 용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관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쇼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저희는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진짜 마수를 잡고 싶습니다.
죽은 뒤에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녀석들 말고 말이지요. 말로만 듣던 마나스톤도 얻고 싶습니다.”
이해가 가는 부탁이기는 했다. 하지만 진우는 섣불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메심헤네스에게 말했다.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방금 하신 말씀은 제가 당장 대답을 드리기 어렵네요.”
진우는 그렇게 말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그는 매덤 행성에서 했던 섣부른 결정으로 인한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진우의 고민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