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96화 (196/235)

196화

700대 단계에서는 마수의 등급이 오히려 조금 낮아졌다. 600대 단계에서 이미 중상급 마수들이 등장했던 것에 비하면 700대 단계에서 상대해야 했던 마수들은 대부분 중급이거나 하급이었다. 다만 그들이 무리를 지어 공격한다는 점이 골치 아팠다.

마수들 하나하나는 중급이거나 심지어 하급에 불과했지만 적게는 둘, 많게는 수백이나 되는 마수들이 집단으로 덤벼들었다. 그 바람에 진우로서도 이 단계를 돌파하는 데에는 꽤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수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만약 동조 기술을 사용했다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하급 마수들의 경우 아무리 수가 많아도 진우가 허공에 마나 송곳을 숱하게 만들어 아예 폭격을 하듯 쓸어버린다면 아무런 피해 없이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나막이나 마나벽을 만들어서 마수들의 공격을 막는 것도 효율적인 방어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아예 마수들의 마나를 동결시켜 검으로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당분간 동조 기술을 봉인하기로 했다. 최상급의 마나 발현 기술만을 이용하여 놈들을 상대한 것이다. 그러자니 700대 관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이 다른 때보다 유난히 길었다.

“휴우~”

진우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블레테의 사체들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769관의 마수인 블레테는 곤충형 마수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녀석들은 땅벌처럼 침으로 쏘기도 했는데, 그 침이 꼬리가 아니라 정수리 부근에 달려 있었다. 침에는 맹독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중상급 마수라고 해도 여러 번 찔리면 사지가 마비되거나 호흡이 정지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또한 강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입도 강력한 무기여서 녀석들이 몸에 달라붙는 것을 허용했다가는 순식간에 뼈만 남기 십상이었다.

무엇보다 떼로 몰려 날아다니며 공격을 하는 군집형 마수여서 한 자리에서 놈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진우는 도전이 시작되자마자 허공을 까맣게 덮으며 날아오는 녀석들을 피해 계속 빠르게 이동해야 했다. 녀석들에게 포위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검을 이용하여 가까이 다가온 놈들을 조금씩 쓰러뜨리는 그의 대처방법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러자니 오랜만에 땀이 흐를 정도로 검을 휘둘러야 했다.

그는 검은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놈들의 덩어리를 맞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마치 사과를 갉아먹듯 침착하게 블레테들을 한 마리씩 베어냈다. 나름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그가 놈들을 모두 쓰러뜨렸을 때에는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날 진우는 불과 세 관문 밖에 돌파하지 못했다.

피엔다 행성의 1개월은 40일이었다. 5개월 동안 진행되는 고스티스 축제는 지구 시간으로 200일인 셈이었지만, 이곳의 자전 속도를 감안하면 그보다 며칠 더 길다고 할 수 있었다.

진우는 축제가 시작한 뒤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501관부터 700관까지 파죽지세로 용사의 관을 정복해 나갔지만, 701관부터는 무려 삼십 일이 걸려서야 간신히 800관 도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앞으로 나오는 마수는 모조리 상급 마수이겠군.”

이제는 일상처럼 되어버린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네. 그리고 지금부터는 진짜 지옥이 시작되는 거죠.”

스텝들을 지휘해서 장비들을 철수시키고 있던 가제타가 진우의 말을 듣고 입을 씰룩이며 대꾸했다.

“지옥?”

“네. 지옥이요. 801관부터는 아무리 뛰어난 용사라도 도전 성공률이 50 퍼센트 밖에 안 돼요. 그리고 실패한 50 퍼센트 중에 다시 절반은 목숨을 잃고요.”

“그건 굉장히 격려가 되는 충고군요.”

“조심하라는 뜻이에요.”

자신의 말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대꾸하는 진우를 본 가제타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진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곁을 지나쳤다.

“잊으셨나 보네요. 제 목표는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하는 거예요.”

가제타는 용사의 관을 나서 호텔까지 걸어가기 위해 나서는 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걸 위해서라도 함부로 부상을 입으면 안 되는 거라고요.”

*  * * * *

801관에서 등장한 녀석은 정면의 주둥이에 강철같이 단단한 이빨들을 뺑 둘러 달고 있는 거대한 지렁이 같은 놈이었다. 글리스터라는 이름의 이 상급 마수는 몸의 직경은 30cm 정도에 불과했지만 길이가 백 미터에 가까웠다.

과거 피엔다 행성의 늪지대를 누비며 수많은 용사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였던 녀석은 늪지대의 바닥을 헤엄쳐 다니다가 느닷없이 기습을 감해하는 것을 좋아했다.

“난 이런 녀석이 정말 싫어.”

이제는 직경이 100m로 늘어난 원형의 방에서 시작된 801관은 도전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허리까지 잠기는 늪지대로 변했다. 마나 탐지를 사용하는 진우에게는 바닥을 기어와서 습격하는 글리스터가 그리 위험한 상대는 아니었다. 다만 녀석은 끔찍할 정도로 징그러웠다.

진우는 녀석의 습격을 받아쳐서 몸을 수십 도막으로 잘라버렸다. 마지막 칼질을 할 때에는 이미 놈의 몸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 마당이어서 관리자가 두 번이나 도전이 성공했음을 알려야 했다. 진우는 징그러운 마수들을 아주 싫어했다.

805관은 도전이 시작하자마자 방 전체가 아예 물속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나타난 마수를 본 진우는 물속이라는 것도 잊고 실소를 터트렸다.

“무니악 행성의 피잘리?”

진우가 마나 폭탄을 배울 무렵에 무니악의 바다 속에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하게 만들었던 상급 마수였다. 피잘리는 몸통에 나 있는 수많은 촉수를 이용해서 진우를 자신의 입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그는 또 다시 마나 폭탄을 이용해서 놈을 산산조각으로 터트려 버렸다.

용사의 관에서 등장한 무니악은 과거에 봤던 놈보다 약했다. 반면에 진우의 마나 폭탄은 전보다 훨씬 위력이 강해졌다.

진우가 800관 대에 대한 도전을 시작한 이후로도 하루에 서너 관씩 꾸준히 용사의 관을 돌파해 나가자, 방송뿐만이 아니라 각종 언론에서도 그에 대한 특집 기사를 내놓았다.

‘크리켄데르의 진우, 그의 도전은 어디까지?’

‘경이적인 속도. 기록 제조자.’

‘용사 진우, 그의 기술 집중 해부’

진우가 830관을 돌파하자 그는 현재 용사의 관에 도전하고 있는 용사들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에 도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진우가 마수에 도전하는 모습은 끝없이 되풀이해서 방송되었고, 가제타가 근무하는 트란메토이는 명실공히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송국이 되었다.

진우가 도전을 마치고 한 인터뷰가 방송될 때에는 크리켄데르 뿐만이 아니라 행성 사람들 모두가 잠도 자지 않고 그의 마수 공략법에 귀를 기울였다.

“용사 양성 학교에서 활을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학생들 가운데에서도 주력 무기를 활로 바꾸고 싶다는 친구들이 많아졌고요.”

가제타의 말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요구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축제가 끝나고 나서 활을 가르칠 생각은 없으세요?”

가제타의 질문에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도, 그럴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배워봤자, 어차피 용사의 관에서 사용할 것이라면 활은 여전히 그다지 적절한 무기가 아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싫다면 현직 용사들은 어때요? 가르칠 의사가 있다면 한두 명 소개해 드릴 수도 있는데.”

생각 외로 끈질기게 활을 가르쳐 달라는 그녀의 말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씩 웃고는 호텔로 향했다. 도대체 이제 와서 활을 배워 어디다 쓰겠다는 말인가.

*  * * * *

800대의 단계에 도전을 시도했던 이십여 명의 용사들 가운데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용사들은 진우를 포함해서 12 명에 불과했다. 그 중 세 명이 파토스가 참여하고 있는 모임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진우가 자신들을 앞서나가자 다시금 긴급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청하였다.

전과는 달리 가제타까지 9명 전원이 참석한 모임이 시작되자 S급 용사인 켈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외계인이라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아. 현재까지의 결과로 볼 때에는 과거의 첼스본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진우라는 친구가 만약 첼스본 이상이라면 용사의 관을 마지막까지 돌파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해.”

일행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800관까지 놀라운 속도로 용사의 관을 통과했을 뿐 아니라 800관 대에 들어선 뒤로도 계속해서 하루에 서너 개의 단계에 도전해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런 속도는 과거에 첼스본이 921단계까지 도전에 성공할 때에도 해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에게 내밀 수 있는 카드를 여전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 지금으로서는 무작정 그의 인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어.”

시청 직원으로 있는 바시킨의 말이었다. 그는 파토스를 향해 물었다.

“그가 특별히 원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이 정말 없나?”

파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여러번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는 용사의 관을 끝까지 돌파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욕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무언가를 열심히 수련하는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무엇을 위해 수련하는 것인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에게 대가로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로군.”

또 다른 S급 용사인 노프르가 그렇게 내뱉듯 말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말이 끊기고,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모임의 좌장 격인 메심헤네스가 문득 파토스를 향해 물었다.

“그의 용모는 어떤가? 그도 첼스본처럼 외형을 변형시키는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파토스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좌우로 흔들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우리와 똑같은 용모를 가진 외계인들이 사는 곳에서 온 게 아니라면 지금의 외모는 아마 무언가를 이용해서 변형시킨 거겠지요. 하지만 정확히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그는 어떤 기술을 사용해서 자신의 외모를 바꾸었다는 거로군. 그렇다면 그 기술이 어쩌면 첼스본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진우라는 외계인이 혹시 첼스본과 같은 행성에서 온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일세.”

회의실에 있던 모임의 일행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메심헤네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단 한 사람, 역사학자인 데칼루만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메심헤네스가 그런 데칼루를 향해 물었다.

“이보게. 만약 진우라는 자가 첼스본과 같은 행성 사람이라면 혹시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첼스본의 편지 말입니까?”

그러자 과학자인 켄세타르가 놀란 표정으로 데칼루를 쳐다보았다.

“첼스본의 편지? 그런 게 있었나?”

데칼루가 습관적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켄세타르의 물음에 대답했다.

“사실 이름을 편지라고 붙였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가 남긴 기록이 담긴 메모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네. 셔퍼로 띄워볼 수도 있지. 비록 삼백년 전의 것이지만, 그는 당시의 우리 기술이 읽어드릴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기록을 남겼으니까.”

그러자 파토스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말을 중지시켰다.

“잠깐만요. 지금 이게 무슨 소리죠? 첼스본이 편지를 남겼어요? 그걸 누가 어떻게 찾아낸 거죠? 그리고 그게 진우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데칼루가 메심헤네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메심헤네스는 일행의 얼굴을 한 번 둘러보더니 데칼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칼루가 입을 열었다.

“먼저 역사학자들의 나쁜 버릇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셔퍼를 이용해서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읽혀지지 않고 버려진 채 있는 옛 자료들을 뒤적거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뭐 그걸 학문적인 열정이라고 애써 변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상 호기심일 뿐이지요. 그 왜 있잖아요. 가끔씩 재미삼아 쓰레기를 뒤적이는 어린 아이들 같은 거요.”

“데칼루!”

데칼루의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메심헤네스가 엄한 얼굴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데칼루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작년에 저는 우연히 최소한 이백 년이 넘게 아무도 열람한 적이 없는 이상한 기록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읽을 수가 없었죠. 제목은 크리켄데르어로 되어 있어 읽을 수 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내용 전체가 통째로 여러 개의 사진 형식으로 저장되어 있는데다가 일부를 제외하고는 저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거든요. 아마 그 때문에 검색도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내용 검색이 아예 불가능했으니까요. 결국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자료가 되었지요.”

“그럼 그게 첼스본의 편지, 아니 그가 남긴 기록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과학자인 켄세타르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물었다.

“제목이 조금 독특했어요. ‘이 자료를 읽을 수 있는 이에게’라고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자료의 맨 마지막에 크리켄데르어로 되어 있는 글이 있었습니다. ‘첼스본이 남긴다’라는 말이었지요. 저는 나머지 내용이 첼스본의 고향 언어로 작성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지요?”

파토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메심헤네스가 했다.

“그 자료의 첫 번째 사진을 진우라는 외계인에게 보여봤으면 하네. 그가 내용을 읽지 못하면 첼스본과 진우는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이겠지. 하지만 읽을 수 있다면 같은 행성 사람이라는 뜻이 되네. 그럴 경우 그가 나머지 사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해야겠지. 그 자료를 대가로 거래를 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기는 거니까.”

말을 마친 메심헤네스가 일행을 둘러보았다. 며칠 뒤 파토스는 데칼루로부터 기록의 일부를 받아 진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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