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가제타가 진우를 찾아와 새로 내놓은 계약서는 전보다 분량이 훨씬 많았다. 고스티스 축제에서의 도전 결과에 따라 세부 내용들이 엄청나게 많이 추가된 탓이었다.
진우는 셔퍼로 전송된 계약서를 홀로그램 영상으로 띄웠다. 이곳 사람들은 페이지 개념이 없는지, 계약서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죽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계속해서 스크롤을 위로 올려가며 계약서 내용을 살펴야 했다.
새로운 계약서는 여러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계별로 먼저 큰 항목들이 나열되었고, 각 항목마다 깨알 같은 활자로 세부 내용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고스티스 축제에서의 도전에서는 501관부터 시작해서 도전 단계가 백 단위씩 올라갈 때마다 진우가 받을 수 있는 크레딧의 단위가 하나씩 달라졌다.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통역기가 자막처럼 번역해 주는 내용을 하나하나 살피다 보니 나중에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내용이... 많이 복잡해졌네요.”
“전에 한 계약은 고스티스 축제 전까지 진우님이 500관을 돌파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 영상을 확보하는 것에 관한 것뿐이었으니까요. 이제 축제 참여 자격을 얻으셨으니 본격적으로 계약을 해야지요. 저희는 일단 진우님이 크리켄데르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한다는 걸 전제로 해서 계약서를 작성했어요.”
가제타는 무심한 태도로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은 결코 태연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크롤을 올리던 진우의 손이 멈칫했다.
“끝까지요?”
“네. 끝까지요.”
진우는 계약서에서 눈을 떼고 가제타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도전에 성공한 단계 중에서 가장 높은 게 921관 아니었나요? 그것도 무려 삼백 년 전의 기록이잖아요. 그 뒤로는 기껏해야 팔백 대 후반이 최고예요. 그런데도 제가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거예요?”
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묻자 가제타가 피식 웃었다.
“죄송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왕 계약서를 작성하는 김에 만약의 경우를 염두에 두는 게 좋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계약서는 그렇게 작성해요. 왜, 자신이 없으세요?”
이 여자가... 진우는 그녀가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우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파토스가 얼른 끼어들었다.
“이봐, 방송국 입장에서는 그게 맞는 거야. 자네가 혹시라도 900관 이상을 돌파하는데 성공해 봐. 그럼 몸값이 어마어마하게 뛸 걸? 그때 가서 부랴부랴 새롭게 항목을 추가시키려면 엄청난 보수를 지불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이왕 계약하는 김에 미리미리 항목을 만들어 두는 게 더 나은 거지.”
파토스로서는 진우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역효과였다.
“그러니까, 파토스님 말은 제가 900관 이상 도전할 경우의 보수에 대해서는 지금 미리 계약을 해 둘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어어...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당황해서 말을 버벅거리는 파토스를 가제타가 사납게 째려보았다. 하지만 곧 표정을 새침하게 바꾸더니 진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우님이 계약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마수와의 전투 장면은 어느 방송국이나 제한 없이 중계할 수 있어요. 그건 시스템이 촬영해서 모든 방송국에 자동으로 전송하는 거니까요. 용사들은 자신의 전투 장면이 방송되면 그에 해당하는 보수를 각 방송국들로 받겠지만, 영상 촬영이나 전송, 방송 등에 있어서 그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어요. 계약서 내용을 보셨으면 알겠지만 저희가 맺고자 하는 계약 내용의 핵심은 전투 장면 방송이 아니라 독점 인터뷰에 관한 거예요.”
가제타는 냉정한 목소리로 진우에게 계약서 내용을 설명했다. 파토스는 또 한 마디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녀의 사나운 눈초리 한 방에 찔끔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인터뷰 독점권을 주는 대가로 제가 받을 크레딧이 전투 중계 대가로 받는 돈보다 훨씬 많네요?”
“저희 방송국만 따지면 그렇죠. 하지만 중계를 하는 방송국 전체를 놓고 따지면 오히려 반대에요. 진우님의 전투 장면을 중계하는 모든 방송국에서 받을 출연료... 음... 일단 출연료라고 할 게요. 아무튼 그 출연료 합계보다는 적지요. 하지만 도전이 끝날 때마다 저희와 독점 인터뷰에 응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액수를 받으실 수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그 액수가 901관부터는 1억 크레딧이군요?”
“네. 고급 주거형 복합 건물에서도 꽤 넓은 집을 구매할 수 있는 액수에요. 그리고 만약 진우님이 922관 도전에 성공해서 신기록을 세우면 그 때부터는 인터뷰 보상이 한 번 도전할 때마다 3억으로 뛰어요. 951관부터는 그게 다시 5억이 되고요.”
“만약 하루에 두 관 이상 도전해서 모두 성공하면요?”
진우가 그렇게 묻자 가제타의 눈빛이 새끼를 빼앗긴 암고양이처럼 변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아니, 흠흠, 죄송해요. 그건 좀 어렵지 않겠어요?”
“글쎄요? 그거야 해 봐야 알겠죠. 아무튼 만약 그렇게 되면 인터뷰에 응하는 대가가 어떻게 되나요? 한 번만 하는 걸로 치는 건가요? 아니면 한꺼번에 두 번 하는 걸로 치는 건가요? 계약서에는 그런 내용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요.”
진우의 목소리는 조금 전 가제타의 그것처럼 태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태연함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그녀는 책상 위에 잠시 내려놓았던 자신의 셔퍼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들더니 식당 밖으로 나갔다. 한참 있다 돌아온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고스티스 축제의 모든 단계에서 하루에 두 관 이상 도전해서 성공하면 그때의 인터뷰 대가는 도전에 성공한 관의 수만큼 지불하기로 했어요. 방금 진우님의 셔퍼로 변경된 계약서를 다시 전송했으니 살펴보세요.”
진우는 새롭게 전송된 계약서를 다시 홀로그램 영상으로 띄워서 살펴보았다. 변경된 계약서의 내용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날 도전에 성공한 관의 수만큼 인터뷰 보수를 더 받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우가 변경된 내용에 대해 만족을 표하자 계약은 순식간에 체결되었다.
가제타는 계약이 끝나자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뷰는 30분 이상, 최대한 성의 있게 임할 것. 그건 알고 계시겠죠?”
진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의 특징과 약점. 진우님의 공략 작전 등도 모두 말씀해 주셔야 해요.”
“넵. 알고 있어요.”
가제타는 진우가 선선하게 대답을 하자 그를 한 번 매섭게 째려보더니 방송국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골이 잔뜩 난 표정으로 호텔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던 파토스는 씩 웃으며 돌아서더니 진우를 향해 물었다.
“왜 그렇게 까다롭게 계약서 내용을 따졌나?”
“3년에 한 번밖에 열리지 않는 축제니까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야지요. 어차피 서로 이익을 보자는 뜻에서 맺는 계약이잖아요?”
그러자 파토스가 피식 웃었다.
“크레딧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뭐하려고? 자네한테는 어차피 별로 필요도 없는 거잖아?”
“크레딧이 왜 필요 없어요? 호텔비만 해도 이미 상당히 많이 나왔을 텐데요. 그리고 고스티스 축제는 용사들에게 있어서 대목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진우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파토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제까지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용사의 관 도전이 끝나면 곧 돌아갈 거 아니었나? 이곳을 뜰 사람에게는 크레딧이 그냥 숫자에 불과할 텐데?”
“이곳을 뜨다니요?”
“자네 외계인이잖아? 삼백년 전의 첼스본처럼 말이야.”
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 * * * *
플레비크 행성의 제1지도자인 닐로의 집무실에서 오랜만에 행성의 세 지도자가 모였다. 일 년에 한 두 번은 정기적으로 회동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정기적인 만남이 아니었다.
늘 집무실 밖을 지키던 노예 전사들마저 모두 물리친 닐로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손수 차를 끓여 내었다. 그의 집무실 한 쪽에 있는 회의용 테이블에는 미슬란트와 에드막이 앉아 있었다.
“그래, 노르호지가 다녀갔다고?”
두 사람 앞에 차를 내려놓은 닐로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에드막을 향해 물었다.
“그랬네. 블리젠 행성을 달라고 하더군.”
그러자 미슬란트가 거칠고 굵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투르가가 이미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군.”
에드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사실이겠지. 진우라는 지구인이 벌써 피엔다 행성이라는 곳으로 갔다니까.”
닐로는 다소 나른한 느낌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한 채 에드막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그걸 허락했다는 건가?”
“그래. 대신 진우라는 지구인을 협공해서 처리하라고 했네.”
그 말에 닐로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가능하겠나? 그들이 레비스를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그때도 내 기억으로는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말이야.”
닐로의 말을 들은 에드막의 시선이 잠시 손에 들고 있는 찻잔을 향했다. 그가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찻잔을 채우고 있는 엷은 붉은 색의 찻물이 작은 회오리를 일으키며 맴돌았다. 잠시 찻물의 움직임을 감상하듯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마나량일세. 아무래도 그 지구인은 엄청난 마나를 체내에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아마 그들 둘의 마나를 합친 것보다 많을 거야.”
그의 말을 들은 미슬란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드막의 옆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서 녀석들이 굳이 블리젠 행성을 달라고 한 것이로군. 자네는 그걸 알면서도 노르호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고 말이야.”
“그래. 녀석들도 재능이 모자란 놈들은 아니니까 블레진 인들을 노예로 삼고 나면, 그들에게서 블리젠 고유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겠지.”
“그러려면 블리젠 인들에게 투르가가 찍었던 종속의 낙인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하잖아?”
“맞아. 말로는 되도록 그 전에 지구인을 처리하라고 해 두었지만, 녀석들은 아마 블리젠의 마나 전송 기술을 다 배울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런데, 녀석들이 기술을 다 배운다 치더라도 그 진우라는 지구인을 어떻게 블리젠까지 오게 만들지? 상대도 상급 전사인데 녀석들이 오란다고 해서 알겠습니다 하고 달려올 것도 아니잖아?”
“정 안 되면 노르호지와 벨푸가 지구로 찾아가기라도 하겠지.”
미슬란트의 질문이 계속되자 에드막의 대답이 조금 퉁명스러워졌다. 하지만 노르호지와 벨푸가 직접 지구를 방문하는 것은 에드막이나 미슬란트로서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구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결코 위험한 행성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상급 전사들 간의 결투가 벌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나를 보충할 수 없는 그곳에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누구의 마나가 더 많은지에 따라 승패가 나뉠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한 진우라는 지구인의 체내 마나량은 너무 많았다.
자칫하면 또 다시 두 명의 상급 전사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상급 전사를 잃는다는 건 플레비크 전체로 보아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집무실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살짝 힌트를 줘야겠군. 지구로 노예 전사 가운데 한 명을 보내라고 말이야.”
닐로가 마치 혼잣말을 하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에드막과 미슬란트의 얼굴이 그에게로 향했다.
“지구로 노예 전사를 보낸다고? 왜? 그리고 우린 그들과 생긴 것도 많이 다르잖아. 들키지 않고 그곳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울 텐데?”
그러자 닐로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 지구에 살던 니코레임 인 가운데 아스탄이라는 녀석이 전해 준 정보가 있었지? 그 정보 가운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더군.”
“어떤 내용 말인가?”
에드막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구인들은 사회성이 강한 동물이라고 하더군. 집단이 위험에 처하면 개인이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하는 모양이야. 아주 작은 생물 가운데 그런 종들이 제법 되는 모양인데,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문명을 발달시킨 인간들 역시 그런 진화의 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어.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진화를 한 생물인 셈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집무실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에는 푸른 하늘이 조그만 구름들을 거느리고 지평선 끝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플레비크의 전사가 지구를 다녀갔다는 흔적만 남기면 돼. 나는 굳이 전투를 할 필요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굳이 필요하다면 진우라는 지구인과 관계가 있는 자를 하나 죽이거나 노예로 삼은 뒤에 블리젠 행성으로 돌아가면 될 거야. 친절하게 블리젠 행성의 좌표까지 남기고 말이야. 그러면 녀석이 제 발로 그곳으로 찾아올 거 같은데?”
창밖을 향한 그의 얼굴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