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파토스와 가제타가 돌아가고 난 뒤 진우는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곧바로 호텔을 나섰다. 그는 크리켄데르의 지리를 전혀 몰랐지만 셔퍼가 있어 그 부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용사의 관까지 가는 길을 알려줘.”
진우가 셔퍼를 들고 그렇게 외치자 금세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대답이 들려왔다.
“진우님의 현재 위치에서 용사의 관까지 가는 길은 도보로 30분, 고바체로는 7분, 자레닌으로는 11분이 소요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도보로 갈게. 길을 안내해 줘”
“네. 알겠습니다. 가는 길을 화면에 표시하겠습니다.”
진우는 크리켄데르의 거리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다. 지구의 지하철과 비슷한 운송수단인 자레닌도 그렇지만 택시에 해당하는 고바체 역시 지상이 아닌 지하를 통해 움직였다. 그는 멀지도 않은 곳을 가는데 또 다시 잿빛 터널만 보이는 지하로 이동하는 게 싫었다.
셔퍼의 기능은 놀라웠다. 눈에 쓴 안경 너머로 보이는 거리 풍경 위에 그대로 용사의 관까지 이동하는 경로가 붉은 실선으로 덧씌워져 표시되었던 것이다. 진우는 그 실선을 따라 천천히 호텔 뒤편의 해안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거야 원.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가 된 기분이네.”
캔자스의 시골 마을에서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도로시는 노란색 벽돌로 표시된 길을 따라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만나기 위해 에메랄드 시를 찾아갔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거리에 붉은 실선으로 경로가 표시되자 진우는 자신이 마치 낯선 행성에 떨어진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다.
호텔 뒤편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해변을 내려다보며 걷던 진우는 바다로 흘러드는 조그만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용사의 관에 도착했다. 거리의 풍경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근사한 거리를 오가는 행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이동할 때에도 지하 터널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다들 무슨 두더지인가. 이렇게 좋은 곳을 산책하는 사람이 없다니...”
콧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내리는 듯한 공기는 거대 도시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신선했다. 하늘의 색깔이나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의 빛깔도 선명했고,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마저도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화석 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다가 모든 하수 처리와 쓰레기 수거를 시스템이 알아서 처리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도시 어느 곳에서도 오염이나 공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잘 포장된 도로와 그 옆으로 뻗어 있는 인도 역시 휴지 한 조각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상하네. 이렇게 좋은 거리인데 왜 사람들이 지하로만 다니는 거지?”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일부러 휴가를 떠나기도 하는 지구에서 온 진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 *
용사의 관은 파토스의 말마따나 제법 북적거렸다. 고스티스 축제를 앞두고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켄데르의 용사들이 갑자기 늘어났을 리는 없었으니, 새롭게 도전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우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분명했다. 그들의 목이나 가슴에는 통역기 세트의 발성 장치가 달려 있었다.
용사의 관은 수많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작은 도시와 같은 곳이었다. 1관부터 100관 까지는 가장 많은 건물이 배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새롭게 몰려든 신청자들이 많아 진우는 무려 나흘 뒤에야 1관에 도전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100관을 지나시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다음 관에 도전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거든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접수를 받던 여직원은 진우가 제시한 S급 용사 자격증을 보더니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 친절해졌다.
“그럼 그 전에는 도전에 성공해도 그 다음 관에 도전할 때까지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하나요?”
그렇게 되면 진우의 예정에 큰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여러 관에 도전하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도전에 성공한 뒤 관을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음 관 도전을 신청하면 되거든요. 하지만 그날의 도전을 다 끝내고 난 뒤에는 다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도전 신청을 끝내고 난 뒤 미리 둘러 본 용사의 관은 진우가 자격증 심사를 받았던 테스트 실처럼 텅 빈 방이었다. 셔퍼를 통해 들려온 설명에 의하면 매 관에 도절할 때마다 방 안의 풍경이 바뀌면서 도전한 관에 해당하는 마수들이 등장한다고 했다.
자격증 테스트와 다른 점이라면 그 마수들이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상처를 입힌다는 점뿐이었다.
관의 크기는 단계가 올라갈수록 점점 커졌는데, 900관 이상이 되면 방의 크기만 해도 지름이 이백 미터에 높이가 오십 미터 가량 되었다. 용사의 관이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시의 한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돔 형태의 구조물이 바로 900관 이상의 단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한 건물이었다.
그 정도의 건물을 가지고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용사의 관을 가지고 있는 크리켄데르가 유일했다. 아주 작은 도시의 경우는 기껏해야 100관까지 도전할 수 있는 조그만 체육관처럼 생긴 용사의 관이 있는 곳들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마나를 동력으로 해서 가동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피엔다 전체의 시스템이 사용하는 마나의 양은 도대체 얼마란 말이야? 그 마나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거지?“
그 점에 대해서는 자료에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진우는 문명이 가장 발달하고,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가장 많은 곳에서 실제로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이 생각 외로 적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 * * * *
“원하는 무기는 구했나?”
진우가 용사의 관에 다녀온 다음날 저녁, 파토스는 또 다시 호텔로 진우를 찾아왔다.
“일이 굉장히 적은가 보네요? 이렇게 날마다 저를 찾아오실 여유가 있고 말이에요.”
그러자 파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최근에는 자네처럼 타지에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제법 바쁜 편이지. 어제는 모처럼 휴가를 냈던 거고, 오늘은 이래 뵈도 하루 근무를 충실히 마친 다음에 온 거야.”
파토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진우가 보기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온 사람치고는 표정에 너무나 여유가 넘쳐 흘러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웬 일이세요?”
“자네 무기 구해야 하지 않나? 내가 좋은 무기를 파는 곳을 소개해 주려고 왔지.”
넉살 좋은 사람이었다. 시스템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삭막한 도시에서 어떻게 이런 성격의 사람이 나올 수 있는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파토스는 진우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를 앞세워 자레닌을 타자며 건물의 지하로 데리고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쾌활한 남자가 자신에게 왜 이렇게 관심과 호의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진우는 일단 그를 따라 호텔 지하로 내려갔다. 파토스가 얘기한 무기 매장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그는 굳이 자레닌을 타자며 호텔 밖으로 나가려는 진우를 잡아끌었다.
그는 파토스와 함께 자레닌을 기다리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저기요, 파토스.”
“응? 왜 그러나?”
“여기 사람들 말이에요. 왜 지상에 있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거죠? 공기도 좋고 거리도 깨끗한 것 같던데요. 고층 건물이 많기는 하지만 지하보다는 눈에 보이는 풍경도 훨씬 낫잖아요. 인구도 꽤 되지 않나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라면서요? 그 많은 사람들이 죄다 지하로만 다니는 게 조금 이상해서요.”
진우로서는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파토스의 얼굴이 움찔하더니 살짝 굳어졌다. 진우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자 오히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뭐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파토스는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진우를 향해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자네 고향을 물어보지 않았군. 어디에서 왔다고 했지?”
“샤타르예요. 대부분 농업 생산용 건물들로 이루어진 작은 시골 도시지요.”
“샤타르라...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많이들 나와 다니는가 보군.”
샤타르가 어디인지는 진우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아이디카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르코스에게 받은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대로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진우는 파토스의 질문을 받고 속으로 아차 싶었다. 자신에게는 참으로 낯선 풍경일지 몰라도 이곳 피엔다 행성 사람들에게는 지상이 아닌 지하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뭐, 하긴 시골의 도시라면 지하 통로가 크게 발달하지 않아서 지상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이 많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도시 사람들은 거의 하늘 아래를 걷지 않아. 그 뭐라더라. 머리 위에 뚜껑이 덮여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거지. 하하.”
다행히 진우가 뭐라고 변명을 하기도 전에 파토스는 혼자서 알아서 자기 나름대로 이해를 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진우는 그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이 여전히 밝지 못한 것을 보았다.
* * * * *
파토스가 안내한 무기 상점의 규모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엄청났다. 진우는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무기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서울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백화점과 비슷한 규모의 매장에는 검, 도, 창, 도끼, 활 등의 무기가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게 다 무기인가요?”
진우가 놀란 표정으로 파토스를 바라보자 그가 씩 웃었다. 마치 ‘역시 시골의 작은 도시에서 온 게 틀림없군’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곳은 크리켄데르에서도 가장 큰 무기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보통 사람들은 구매를 할 수 없어. 용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물건을 팔거든. 일반인들이 이런 무기를 들고 활보하면 문제가 생길 테니까 말이야.”
“그럼 용사 양성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여기서 무기를 살 수 없나요?”
“용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지급하는 무기가 따로 있어. 그건 절대로 학교 밖으로 반출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
그 점은 지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가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진열된 무기를 둘러보고 있자 파토스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떤 무기를 주로 사용하나?”
“저는 검과 활을 써요.”
진우가 활을 쓴다는 말을 듣자 파토스는 손에다 턱을 괴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활을 쓴다라... 아직도 그걸 배우는 사람이 있던가? 하지만 용사의 관에서는 그리 적절한 무기라고 할 수는 없군.”
“왜요? 원거리 사격용으로는 활 만한 무기가 없을 텐데요?”
그러자 파토스가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마수들이 벌판을 누비던 시절에는 활도 꽤 괜찮은 무기였지. 하지만 자네가 도전하는 곳은 용사의 관이야. 가장 큰 돔 형식의 관이라고 해도 길이가 이백 미터를 넘지 않지. 그런 가까운 거리에서 마수를 향해 활을 쓰기는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많지.”
“그럼 다른 용사들은 원 거리 무기를 사용하지 않나요?”
“투창을 쓰면 되잖아. 활보다는 사정거리가 짧지만 거리가 가까울 경우에는 차라리 그게 더 나아. 투창을 던진 다음에 바로 검이나 창으로 바꿔 쥐고 마수를 상대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근거리라면 몰라도 역시 정확성이나 사거리에서는 활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진우는 손에 익숙한 무기를 버리고 굳이 새롭게 투창을 연습할 생각이 없었다. 1관 도전이 불과 사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연습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냥 검과 활로 할게요. 설마 활이 없지는 않겠죠?”
“있기야 있지. 꽤 좋은 것들도 많아. 다만 잘 팔리지는 않는 편이지. 아무튼 그럼 날 따라오게. 적어도 500관 이상에 도전하려면 보통의 검이나 활로는 무리이니까 말이야.”
파토스는 진우를 5층으로 데리고 갔다. 손님이 제법 많았던 1층과 2층에 비해서는 다소 한산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진열된 무기들의 종류는 여전히 많았지만 전체 개수는 다른 층에 비해 훨씬 적어 보였다.
진우는 무기들을 둘러보다가 표시된 가격에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비쌌던 것이다.
“이건 너무 비싼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크레딧으로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러자 파토스가 씩 웃었다.
“자네가 돈이 모자라면 내가 빌려줄 수도 있네. 그게 싫으면 가제타의 제의를 받아들여도 되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여기 있는 무기 한 두 개를 살 정도의 돈은 받을 수 있을 거야. 물론 자네가 고스티스 축제에서 700관 이상에 도전하게 되면 이 정도 무기를 사는 건 우습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진열된 무기들의 가격은 엄청났다. 그런 무기들을 우습게 살 수 있을 정도라면 도대체 방송으로 버는 돈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돈을 많이 줘요?”
“그야 당연하지. 시스템 방송은 이곳 사람들의 가장 큰 오락거리이니까. 사람들의 수입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이 지출되는 항목 가운데 하나잖아. 흠... 도대체 자네가 살았다는 샤타르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군. 설마 거기 사람들은 시스템 방송도 보지 않는다는 말인가?”
진우는 그의 지적에 움찔하고 말았다.
‘되도록 이 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게 낫겠다. 잘못하면 수상하게 여기겠네.’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방송을 보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낸다는 사실은 여전히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밖으로 돌아다니지는 않고 집에 틀어박혀서 셔퍼를 이용해서 방송만 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