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한티노어 호텔은 파토스의 말대로 괜찮은 곳이었다. 높이만 해도 100층이 넘는 고층 건물의 50층 이상을 전부 호텔로 사용하고 있는 그곳은 작은 도시나 다름없는 용사의 관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파토스의 친구 포말리오는 한티노어 호텔의 지배인이었다. 세련된 중년인의 모습을 한 그는 진우의 용사 자격증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원하는 조건을 물었다.
“글쎄요. 제가 크레딧이 많지 않으니까 적당한 가격으로 전망이 괜찮은 방이면 충분해요.”
포말리오는 진우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98층의 방 하나를 골라 주었다. 99층부터는 방의 가격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가격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층을 배정해 준 것 같았다.
호텔 건물의 제일 가장자리인 모서리 쪽에 있는 그 방은 두 방향으로 창이 나 있어서 한쪽으로는 용사의 관 건물을, 다른 쪽으로는 멋진 해변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진우는 다른 것보다도 창밖으로 보이는 탁 트인 전경이 마음에 들었다.
호텔에 묵은 다음날 아침 그가 다소 느지막이 일어나 슬슬 아침을 먹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프론트에서 연락이 왔다.
“50층 로비에 손님을 찾는 분이 와 계십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아니면 방으로 올라가시도록 하는 게 낫겠습니까?”
“손님이 누구라고 하던가요?”
“두 분입니다. 한 분의 성함이... 파토스라고 하시는군요.”
어제 테스트가 끝나고 나서 나중에 차나 한 잔 마시자고 하더니 참 빠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는 굳이 그를 냉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방까지 올라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내려갈 테니 로비 식당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30분가량 걸릴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진우가 샤워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 파토스는 낯선 여자와 함께 있었다. 피엔다 인들의 미적 기준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늘씬한 체형의 이곳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에도 제법 날씬해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빠진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파토스는 진우를 보더니 예의 그 쾌활한 웃음을 만면에 떠올리며 진우를 맞이했다.
“아, 소개부터 하지. 이쪽은 가제타라고 하네. 크리켄데르에서 두 번째로 큰 방송국의 피디야.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이들의 전투 장면을 방송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를 맡고 있어.”
파토스의 소개를 받은 여자가 엷은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내밀었다.
“가제타라고 합니다. 트란메토이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진우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려다가 얼른 그녀가 내민 손에 손바닥을 찰싹 부딪쳤다. 외모를 피엔다 행성 사람들과 똑같게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하루 빨리 이곳의 관습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진우라고 합니다. 크리켄데르에는 처음 왔습니다. 말이 서툴러 통역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원래 크리켄데르에는 타지에서 온 분들이 많아요. 통역기의 사용이 흉이 되지 않는 곳이지요. 하지만 이곳에서 용사 자격증을 얻으셨으니 앞으로 사람들은 진우님이 크리켄데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 겁니다.
어디에서 용사 자격증을 얻었느냐 하는 것은 적어도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파토스가 나섰다.
“자자, 얘기는 일단 앉아서 하자고. 진우 자네 혹시 식사 전인가? 그럼 음식을 좀 시키지 그래? 우린 상관없네.”
진우는 아직 식전이기는 했지만 아침을 그냥 건너뛰기로 했다. 어차피 아침을 먹기에는 시간이 다소 늦기도 한데다 아무래도 손님들을 앞에 두고 식사를 하기는 불편했다. 세 사람은 각자 마음에 드는 차를 한 잔 시켰다. 차가 나오자 파토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은 어제 가제타에게 자네 이야기를 했네. 허락도 받지 않고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기는 하네만, 일단 용사 자격증 테스트에서 자네가 S급 용사 자격을 얻었다는 얘기를 했어. 말했듯이 그런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라서 가제타도 자네에 대해 꽤 관심이 많아. 그래서 얘긴데, 트란메토이 방송국에서는 자네가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것을 1관부터 미리 촬영을 하기를 원하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방송이라니? 진우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촬영을 한다고요? 제가 도전하는 걸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진우의 목소리가 다소 떨떠름하게 느껴졌는지 가제타가 직접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중에 진우님이 높은 단계의 관에 도전할 때를 대비한 거지요. 그 때를 위해서 미리 진우님이 낮은 단계에 도전하는 모습부터 촬영을 하려는 거예요. 아시겠지만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모든 장면은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촬영이 되요. 하지만 그걸 방송할 수는 없어요. 허락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용사의 관에서 이루어지는 전투 장면을 방송하려면 본인의 허락을 받아 방송국에서 따로 장비를 동원해서 촬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영상만 방송이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가제타의 설명을 듣고도 진우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S급 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더구나 이제 처음으로 1관부터 도전을 시작해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피엔다 행성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다가, 역시 가장 큰 용사의 관을 가지고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자신처럼 무명의 인물이, 그것도 단계가 낮은 관에 도전하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우의 표정이 여전히 석연치 않은 것을 본 파토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고스티스 축제에 참여할 생각이 있다고 했지? 사실 고스티스 축제는 따로 용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모든 도전 장면을 방송하는 것이 가능하네. 그때는 시스템이 촬영한 영상을 누구에게나 제공해 주니까 말이야. 물론 그것을 방송하려면 그 대가로 영상 속의 용사들에게 상응하는 출연료라고 할까, 보수가 주어지지. 관마다 일괄적으로 정해진 액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도전하는 관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용사들이 벌어들이는 액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지. 작은 방송국들은 그 돈을 감당하지 못해서 방송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야. 하지만 가제타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네.”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파토스의 말이 조금 길어지는 듯하자 가제타가 그의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매년 고스티스 축제에서는 새로운 영웅들이 탄생해요. 지금까지는 무명이었던 용사들 가운데 갑자기 높은 단계의 도전에 성공하는 인물들이 나타나지요. 그런 사람들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요. 그래서 방송국마다 기대되는 신예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정보를 확보해서 방송으로 내보내죠. 그 정보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 신예들이 낮은 단계의 관에 도전했을 때의 영상이에요. 일종의 성장기라고 할까요? ‘그 사람 옛날에는 어땠는데’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니까요. 시청자들은 그런 영상을 좋아해요.”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는 갔다. 한 마디로 진우가 어제 용사 자격증 테스트에서 S등급을 받는 것을 보고 파토스가 자신에게 방송자료를 미리 만들어 둘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평소에 알고 있던 피디인 가제타에게 알려준 것이고, 그 말을 들은 그녀가 아침부터 파토스와 함께 자신을 찾아왔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설명을 듣고도 대뜸 그들의 제안을 승낙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제가 고스티스 축제에서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하면 어쩌시려고요?”
진우의 말을 들은 가제타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매 번 고스티스 출제가 열릴 때마다 여러 사람의 기대주들에게 진우님에게 방금 말씀드렸던 것과 똑같은 제의를 해요. 진우님은 그 여러 사람 가운데 한 분인 셈이지요. 저희가 미리 선점해서 계약을 한 분들 가운데 한두 사람만 좋은 성과를 내어도 방송국 입장에서는 성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꼭 진우님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는 말이에요.”
진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지나치게 솔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말은 직설적이었다. 한 마디로 진우는 보증수표가 아니라 비교적 확률이 높은 로또 가운데 한 장이라는 뜻이었다. 저들에게 그는 결과가 시원찮으면 그냥 버려도 되는 패였다.
“진우님이 제의를 받아들이면 계약금을 드릴 거예요. 타지에서 오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아직 쓸 만한 무기도 구하지 못하셨지요? 계약금에 해당하는 크레딧을 받으시면 괜찮은 무기를 사고 고스티스 축제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가제타는 진우의 현실적인 문제를 건드렸다. 사실 그로서는 크레딧이 필요하기는 했다.
고스티스 축제가 열리려면 이곳 시간으로 석 달, 지구 시간으로는 120일이 넘는 기간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용사의 관에 도전해서 500관 이상을 돌파해야 했으므로 시간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타르코스가 피엔다에서 쓸 수 있는 크레딧을 아이디카드에 넣어주기는 했지만 넉넉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도 크레딧을 벌 수 있다면 나쁠 게 없었다.
“언제까지 대답을 드리면 됩니까?”
진우가 묻자 가제타는 거꾸로 진우에게 질문을 했다.
“용사의 관에는 언제 도전하실 생각인가요?”
“일단 여기서 쓸 만한 무기를 먼저 구입해야 합니다. 제가 무기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마음에 드는 무기를 구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도전을 할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한테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거든요.”
“저희로서는 진우님이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첫 장면부터 촬영을 했으면 해요. 그래야 나중에 기록 영상으로서의 가치가 있거든요. 최소한 도전 하루 전까지는 대답을 주셨으면 해요. 그래야 저희도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때 파토스가 진우의 얘기에 손을 저었다.
“내일 도전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고스티스 축제 때문에 용사의 관에 도전하려는 타지 사람들이 많을 때야. 지금 신청해도 며칠은 기다려야 할 걸?”
진우가 가제타를 바라보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이라도 당장 1관 도전 신청을 해야겠군요.”
“그게 좋을 거예요.”
진우는 잠시 머리를 숙이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며칠 여유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파토스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물을 게요. 어제 용사 자격증 테스트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파토스님이 저에게 너무 과분한 호의를 베푸시는 것 같아요.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의아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에게 특별히 부탁하거나 바라시는 게 혹시 있으십니까?”
진우가 그렇게 묻자 파토스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는 진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자네에게 기대하는 것은 있네. 나는 자네가 용사의 관을 정복하기를 바라네. 마지막 관까지 도전해서 모든 마수를 쓰러트렸으면 좋겠다는 뜻이지. 솔직히 이건 지금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테스트를 통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기대했던 것이지. 물론 지금까지 누구도 자네처럼 처음부터 S등급 자격증을 받은 사람은 없었어.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더 큰 것은 분명해.”
“왜 용사의 관이 끝까지 정복되는 걸 그렇게 바라시는 거죠? 거기에 무슨 개인적인 큰 의미라도 두시는 건가요?”
“개인적인 의미라... 그런 것도 있기는 해. 하지만 그건 사실 이 땅에 있는 모든 용사들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얘기는 일단 자네가 고스티스 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받고 나서 하는 게 어떤가? 자네가 그 자격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할 이야기도 다 무의미한 게 되니까 말일세.”
파토스의 말은 뭔가 모호했다.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다는 건가? 진우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는 것을 본 파토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자네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부탁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말 그대로 내가 자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막연한 기대일 뿐이니까 말이야. 잘 되면 좋겠지만, 안 된다고 하더라도 자네를 원망하는 일은 없을 거네. 그냥 나 혼자 실망하고 말 뿐이니까.”
그때 듣고만 있던 가제타가 진우를 향해 물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혹시 진우님은 용사의 관을 끝까지 정복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시나요?”
진우는 가제타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한 것을 본 가제타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용사의 관이 정복되면 거기에서 나오는 마수들의 모드를 조정할 수 있어요. 마수들이 말 그대로 가상이 되게 할 수가 있다는 거지요. 가상 모드에서는 녀석들에게 당하더라도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용사의 관에 도전하는 것이 안전한 훈련 프로그램이 될 수 있어요.”
뭔가 설명을 머뭇거리던 파토스는 가제타가 그렇게 말하자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뒤를 이어 설명을 햇다.
“이곳 크리켄데르에 있는 용사의 관을 제외한 다른 도시의 용사의 관들은 모두 정복이 완료되었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용사들이 모드를 선택할 수 있지. 도전하기 전에 가상과 실제 중에 한쪽을 정할 수 있다는 거야. 아마 자네 고향에도 용사의 관이 있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이곳 크리켄데르에 있는 용사의 관은 그게 불가능하네. 모드 선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수들에게 당하면 잘못하면 죽는 거지. 그래서 고스티스의 축제 기간 동안에는 늘 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있네.”
그건 진우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나와 있지 않은 이야기였다. 진우는 왜 용사의 관에 그런 제약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에게 기대한다는 게 무엇인지 지금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제가 용사의 관을 정복해서 모드를 가상으로 설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게 파토스님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궁금하네요.”
진우의 말에 파토스가 손을 내저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지금 말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가 고스티스 축제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나면 내가 꼭 말해주겠다고 약속하겠네.”
진우는 그의 말에 잠시 고민을 했다. 뭔가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숨은 의미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진우로서는 어차피 용사의 관에 끝까지 도전할 생각이었다. 파토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자신의 계획이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파토스가 저렇게 말하니 궁금하기는 했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고스티스 축제에 참가하는 것은 저도 생각하고 있던 일이니,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요. 그리고 촬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용사의 관도 미리 둘러보고 적당한 무기도 구해야 하니 모레 아침까지는 대답을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그래도 될까요?”
그러자 가제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모레 아침까지면 저도 괜찮아요. 그럼 모레 아침에 다시 연락을 드리고 찾아뵙는 걸로 할게요.”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진우에게 조그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계약이 꼭 성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어제 파토스에게 말을 들으니까 진우님이 사용하시는 통역기가 조금 구형 모델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수를 상대하실 분이니까 조금은 좋은 것으로 바꾸시는 게 어떨까 싶어서 제가 한 세트 마련했어요. 이건 계약의 성사 여부와는 상관없이 드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세요.”
상자 안에는 귀에 쏙 들어가는 조그만 이어폰과 안경, 그리고 가슴에 부착할 수 있는 네모난 헝겊 조각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지금 사용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편할 거예요. 그 패드는 목이 아니라 가슴에 붙이는 거예요. 입고 계신 옷 위에 붙이면 되는 거니까 지금보다는 사용하기 편하실 거예요.”
진우는 계약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물을 받기가 껄끄러워서 가제타가 내민 상자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음을 짓더니 그럼 내일 모레 다시 만나 계약이 성사되면 그때 기념으로 주겠다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일어섰다. 파토스는 그녀와 함께 일어서다 지진우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거 어차피 방송국 돈으로 산 거라서 환불하기도 곤란해. 그냥 받고 계약을 거절해도 되는 거니까 나중에라도 못 이기는 척하고 받게.”
그는 그 말과 함께 껄껄 웃으며 진우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더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