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85화 (185/235)

185화

진우가 포털을 타고 도착한 곳은 억새가 무성하게 자란 얕은 구릉 위였다. 포털을 통과하자마자 저 멀리 구릉을 빙 돌아 가로지르며 뻗어 있는 도로가 보였다. 도로는 포장이 되지 않았다. 다만 제초제를 뿌려놨는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맨 땅이 지평선 양끝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진우는 헌터 패드에 저장된 지도를 꺼내어 주변을 훑어본 뒤에 도로 한 켠에 마치 시골 마을의 간이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는 듯한 조그만 팻말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팻말 옆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딸린 대기실이나,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벤치조차 없었다.

그냥 황량한 도로 중간에 사람 키를 살짝 넘을 정도의 팻말이 하나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진우는 그 팻말 곁에 서서 무려 두 시간이 넘게 기다린 끝에야 먼지를 풀풀 날리며 달려오는 미니버스 한 대를 볼 수 있었다. 본래의 바탕이 무슨 색깔이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차체 전체에 두꺼운 먼지가 덮여 있었다. 심지어 정면을 향한 차창마저도 먼지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시골길처럼 생긴 길을, 역시 아무리 보아도 시골 버스처럼 생긴 차가 달려오는 모습은 이곳이 정말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곳이 맞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버스는 진우가 서 있는 것을 봤는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그의 옆에 정차했다.

버스가 정차하자 진우는 미리 자료를 통해 확인한 대로 버스의 출입구 옆에 붙어 있는 조그만 패드에 자신의 아이디카드를 대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패드에 파란 불이 들어오자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내며 낡은 버스의 문이 열렸다.

버스에는 운전수가 없었다. 진우를 제외하고는 불과 네 명에 불과한 기존의 승객들이 저마다 한껏 편한 자세를 취하며 본래는 2인승이었을 게 분명한 넓은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이 다닐 것 같지 않은 황량한 벌판에서 새로운 손님이 올라탔는데도 누구하나 진우에게 눈길을 돌리거나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지 뭐.’

한 마디도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차라리 무시당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진우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자 버스의 문이 닫히더니 운전수도 없는 버스는 또 다시 먼지를 뒤로 날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솔린과 같은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가끔씩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심하게 덜컹거렸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거의 사라진 옛날의 시골 버스를 타는 기분을 느끼며 진우는 그렇게 세 시간을 달려 드디어 피엔나에서 가장 큰 도시, 크레켄데르에 도착했다.

크레켄데르 부근부터는 포장된 도로가 나타나며 갑자기 주변의 경관이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흑백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화면이 컬러로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풍경이 일시에 변했다.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얼떨떨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비슷한 곳에서 버스가 잠시 멈추자 앉아 있는 좌석 곳곳에 달려있는 조그만 패드들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자료에서 본 대로 진우가 그 위에 자신의 아이디카드를 대자 불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모두 아이디카드를 확인시키자 톨게이트의 차단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다시 버스가 움직였다.

진우를 태운 버스는 도시 외곽의 주차장에서 승객을 모두 내리게 했다. 그곳이 이 버스의 최종 목적지인 듯 했다.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에서 내리자 저 멀리 도심 중앙을 가득 메우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높은 고층 건물들이 보였다.

“유토피아를 가장한 문명의 공동묘지...”

진우는 문득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피엔다 인들의 생활은 모두 건물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료에 의하면 그들은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여가 활동까지 모두 건물을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와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갖가지 취미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건물을 나갈 필요가 없었다. 필요에 따라 건물과 건물을 이동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건물들을 연결하는 지하도로나 고층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공중 통로를 이용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덕에 건물 사이로 뻗어 있는 도로는 오히려 한적했다.

심한 경우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흙을 밟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크레켄데르 뿐만 아니라 피엔다의 거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그와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진우는 문득 그 건물 하나하나가 요람이자 곧 무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층 건물에 있는 병원에서 태어나, 비슷한 건물 안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가, 그곳에서 직장을 구하고, 사람들과 사귄다. 죽어서도 건물 안에서 화장되고 그 뼈는 몇 단계의 처리 과정을 거쳐 폐기되거나 돔 형식의 수십 층 농장 건물에서 사용되었다.

그 모든 과정이 시스템에 의해서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절대로 이런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

진우는 문득 멀리 보이는 빌딩 숲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 *

버스에서 내린 진우는 먼저 근처에서 제법 커 보이는 건물을 찾아 들어갔다. 헌터 패드에 지구의 백화점과 같은 곳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장 먼저 통역기를 구입했다. 통역기는 귀에 꽂는 이어폰과 목에 밀착하는 부드러운 재질로 된 목걸이 비슷한 장치, 그리고 눈에 쓰는 고글이 한 세트로 되어 있었다.

“땀이라도 흘리면 영 불편하겠는 걸.”

다른 것은 괜찮은데 목에 밀착시키는 목걸이 형식의 장치가 문제였다. 고글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른 행성에서처럼 듣기만 하고 말할 줄은 모르는 반 벙어리 흉내를 내며 지내지 않으려면 모두 필요한 장치였다.

귀에 꽂은 이어폰은 크리켄데르어를 진우가 지정한 언어로 통역해 주었다. 목걸이 모양의 발성 장치는 진우가 하는 말을 크리켄데르어로 바꿔주는 장치였다.

말을 할 때마다 목이 약간씩 울리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것이 영 거슬린다면 가슴에 붙이는 얇은 패널 모양의 스피커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고글 역시 곳곳에 있는 팻말이나 간판을 읽으려면 반드시 쓰고 있어야 했다.

눈에 보이는 글자들을 진우가 원하는 언어로 번역해서 간판이나 팻말 옆에 자막처럼 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통역기를 사서 착용하자마자 눈앞에 이상한 글자로 되어 있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니코레임. 니코레임.”

그는 헌터 패드에 나와 있는 정보에 따라 먼저 니코레임이라는 말을 몇 번 되풀이했다. 그러자 화면의 메시지가 바뀌었다.

“니코레임어 통역 모드로 전환합니다. 이 상태가 맞으면 확인을 눌러주십시오.”

눈앞에 보이는 메시지와 귀로 들리는 목소리가 모두 니코레임어에 맞추어 변화되었다. 진우는 고글에 보이는 대로 확인 표시를 눌렀다.

“크리켄데르어와 니코레임어 통역 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통역이 필요한 언어를 다시 지정하시려면 화면 하단에 있는 메뉴를 이용하시거나 직접 명령을 하시면 가능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역기의 모드 전환이 완료되었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편리한 장치였다.

진우는 통역기의 세팅이 끝나자 이번에는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필수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셔퍼’를 구입했다. 셔퍼는 헌터들이 사용하는 헌터 패드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모양이 패드 형태가 아니라 가운데 손가락 정도의 길이와 두께를 가진 막대처럼 생겼다.

막대 안에 말려들어가 있는 반투명 스크린을 손으로 잡아 빼서 화면을 보며 조작을 해도 되지만 대부분의 명령은 음성만으로 처리가 되었다. 진우가 현재 쓰고 있는 고글과도 연동이 되는 장치여서 필요한 화면은 고글을 이용해서 띄워볼 수가 있었다.

“용사 자격증 발급소로 안내해.”

진우가 셔퍼를 입에 대고 그렇게 말하자 이어폰으로 셔퍼의 음성이 들렸다. 단정하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지닌 여성의 목소리였다.

“가장 가까운 발급소까지는 도보로 한 시간, 고바체로는 10분, 자레닌으로는....”

“고바체를 이곳까지 호출해 줘.”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위치를 고바체 회사로 전송하겠습니다.”

고바체는 지구의 택시와 비슷한 운송 수단이었다. 진우가 셔퍼를 통해 호출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그의 앞에 반구형의 통통한 몸집을 한 차량 한 대가 와서 정차했다.

“진우님의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본인이 맞으시면 카드를 대고 승차해 주십시오.”

진우는 자신의 아이디카드를 고바체의 문 옆에 있는 패드에 대었다. 그러자 차량의 문이 위로 열렸다. 진우가 고바체 안에 탑승하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용사 자격증 발급소로 이동합니다. 목적지가 맞습니까?”

“맞아.”

진우의 말이 떨어지자 고바체는 부근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바로 지하를 연결하는 차량용 통로를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고바체 역시 운전수가 없는 무인 차량이었다.

“이래 가지고는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다니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겠군.”

진우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고바체가 건물 사이의 도로가 아닌 지하 통로로 들어가자 혀를 찼다.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넓은 지하통로의 을씨년스러운 잿빛 천장과 벽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 *

용사 자격증을 얻는 것은 간단했다. 발급소에는 다행히 무미건조한 음성을 내뱉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직원은 진우가 외국 사람인 것을 알고는 그의 아이디카드를 받더니 그것을 이용해 필요한 서류 양식을 한꺼번에 입력했다. 진우가 한 일이라고는 마지막에 서류에 있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앞에 있는 모니터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것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용사 자격증을 발급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 절차가 모두 끝났다. 사무실이 종이 한 장 보이지 않게 깨끗한 이유가 있었다.

“저쪽 문으로 들어가셔서 테스트에 응하세요. 테스트에 합격하시면 용사의 관 첫 단계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딱히 기계 음성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한 직원은 진우에 대한 처리가 끝나자 마치 그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자격증을 신청하려는 다른 사람도 없었고,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도 직원은 순식간에 진우의 존재를 자신의 의식 속에서 증발시켜 버린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 정말.”

진우는 무심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직원이 가리킨 문을 열었다.

문 안에는 체격이 건장한 남자 하나가 팔뚝을 다 드러낸 조끼 비슷한 옷에 반바지를 입은 채로 책상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진우를 힐끗 보더니 곧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손 안에 든 작은 단검을 손목 위에 올려놓고 빙글빙글 돌려대고 있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남자와는 전혀 다르게 안경을 끼고 딱 봐도 제대로 된 사무용 정장 차림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이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진우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남녀가 한 사무실에 같이 있는 모습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뭐야? 이 괴상한 커플은?’

아무리 맡은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다른 것은 상관하지도, 상관 받지도 않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한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마저 이처럼 제각각의 옷차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용사 테스트 받으러 온 사람이요?”

진우가 도대체 누구에게 말을 붙여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자 단검을 돌려대던 남자가 그것을 탁 잡아채더니 진우를 향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네. 맞습니다. 테스트는 어떻게...”

진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그를 향해 휙 던졌다. 진우가 얼떨결에 그 단검을 받아들자 사내가 씩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거기에 마나를 발현시켜 보시오. 발현이 안 되면 그냥 마나만 주입한 상태에서 이걸 잘라보든가.”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지름이 1cm 가량 되어 보이는 조그만 금속 봉이 하나 들려 있었다. 진우는 그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 말도 않고 단검에 마나를 발현시켰다. 그가 마나를 일으키자 단검 주변에 우윳빛의 서광이 맺혔다. 그것을 본 사내의 눈이 약간 진지하게 변했다.

“3급 용사 자격은 된다는 거군. 테스트를 더 받아 보시겠소?”

“테스트를 더 받아본다는 게 무슨 말인지...”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정장 차림의 여성이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진우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더니 사무실 한 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저 문으로 들어가 몇 가지 테스트에 응하시면 됩니다. 마수는 나타나지 않으니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테스트 통과 여부에 따라 받으실 수 있는 용사의 급수가 달라집니다. 모든 테스트를 통과하시면 1급 용사 자격증이 주어지지요. 그 이상은 실제로 용사의 관에 도전해야만 자격증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아시지요?”

몰랐다. 하지만 진우는 마치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으로 들어가세요. 테스트를 다 마치거나 중간에 중지하시게 되면 다시 이곳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 말과 함께 여직원은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진우는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가 또 한 번 증발되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다시 한 번 씩 웃더니 진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들어가 보시오. 오랜만에 1급 용사가 나오는 걸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테스트실이라는 팻말이 적힌 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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