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피엔다 행성에 관한 자료는 지금까지 진우가 방문했던 어떤 행성보다 많았다. 피엔다 행성 다음에 수련을 할 곳으로 예정되어 있는 조르크 행성에 관한 자료보다도 서너 배는 많을 정도였다.
“머릿속에 담아두어야 할 자료가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 갈 곳과 비교해 보아도 가장 많을 것 같아요. 무슨 마수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지구를 떠나기 전 소현과 장박사, 그리고 스승인 조승운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진우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유난히 마수가 많은 곳인가 보네. 개인적으로 흥미가 이는 곳이군 그래.”
외계 생물학자인 장박사는 마수의 종류가 많다는 진우의 불만에 오히려 반색을 했다. 저 양반이...
“문제는 그 마수들을 제가 모두 상대해야 한다는 거지요. 게다가 자료에 나와 있지 않은 마수들이 또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자료에 나와 있지 않은 마수라니?”
진우가 계속해서 투덜거리자 소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타르코스 소장님이 주신 자료에 나와 있는 마수들은 모두 예전에 그곳을 방문했던 니코레임 출신 헌터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들이야. 그런데 그들 중에 아무도 끝까지 도전에 성공했던 사람들이 없었거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승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피엔다에 있는 마수들을 진우 네가 모두 상대해야 한다고? 그리고 또 도전은 뭐냐?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앞뒤 다 잘라먹고 얘기하지 말고 좀 자세하게 얘기해 봐라.”
진우는 소현에게 앞으로 자신이 가야 할 피엔다 행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했었다. 그리고 장박사는 소현을 통해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조승운은 피엔다 행성이라는 얘기 자체를 오늘 처음 듣는 자리였다. 진우는 그의 질문에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이번 수련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했다.
진우가 피엔다 행성에서 해야 하는 수련은 그곳에 있다는 ‘용사의 관(關)’이라는 기묘한 시설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숱한 니코레임 출신의 헌터들이 피엔다 행성을 찾아가 그곳에 도전했다.
헌터로서의 역량과 경험을 쌓는 데에 그만큼 좋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전에 실패한 이들 중에 피엔다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공연히 걱정을 끼칠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용사의 관(關)이라고 했냐? 네가 그곳에서 도전해야 하는 곳의 이름이?”
조승운이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 케익을 입에 떠 넣으며 물었다.
“네. 일단 번역을 하면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말로는 용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하는데, 지금은 무슨 카니발 같은 행사가 되었나 봐요. 피가 튀고 사람이 죽기도 하는 잔인한 축제 같은 거예요.”
진우는 조승운의 말에 무심코 대답을 하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이 죽기도 한다는 진우의 말에 소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장박사가 그런 소현의 표정을 힐끗 살피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두 실물은 아니고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지? 가상현실 같은 것 말이야.”
소현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진우가 그 말에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현이 먼저 장박사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가상현실하고는 달라요. 엄밀히 말하면 환상도 아니고요. 마수한테 공격을 당하면 실제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게다가 얼마나 강한 마수가 나올지 끝까지 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대요.”
장박사는 소현의 말에 그만 ‘으흠’하며 헛기침을 내뱉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니코레임 인들 중에서 그곳에 도전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였다고 하더냐?”
조승운 박사가 안쓰러운 얼굴로 소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진우를 향해 물었다.
“첼스본이라고 하는 삼백년 전의 헌터에요. 동조 단계에 들었던 사람이었어요.”
“그가 몇 단계까지 도전했었다고?”
“자료에 나와 있는 마수의 종류는 921종이예요. 첼스본이 도전에 성공한 단계가 거기까지였다는 뜻이겠지요. 첼스본은 아마 천 단계가 마지막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단계가 천이나 된다는 말에 조승운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피엔다에는 얼마나 많은 마수가 산다는 말인가?
“용사의 관에서 등장하는 마수들은 피엔다 행성에 사는 것들만이 아니에요. 다른 행성에 사는 마수들도 등장하거든요. 가령 매덤 행성의 유데르하라든가 무니악 행성의 윌러몬 같은 마수들도 나와요. 피엔다 행성의 선조들이 과거에는 다른 행성을 활발하게 탐험했다는 뜻이지요.”
진우가 그렇게 추가 설명을 하자 장박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거에는? 그럼 지금은 탐험을 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 말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피엔다 행성의 문명 수준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과학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것을 연구하기는커녕, 기존에 알려진 지식을 익혀서 후손에게 전수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한 형편인가 봐요. 전체적으로 갈수록 문명이 침체되는 분위기에요.”
“헌터들은?”
이번에는 조승운의 질문이었다.
“그곳에서는 헌터라고 하지 않고 용사라고 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우리로 치면 무슨 스포츠 선수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 같아요. 용사의 관에 도전해서 마수를 물리치는 모습이 그곳 사람들에게 중계되고, 그래서 인기를 얻으면 돈을 받는다고 하니까요.”
“그건 헌터가 아니라 광대구나.”
“실제로 피엔다에는 더 이상 자생하는 마수들이 없으니까요.”
“마수가 없어?”
“네. 이마 행성에 살던 모든 마수들이 멸종한 지가 천 년이 넘는가 봐요. 마나 스톤을 사용하지 않고도 대기나 물, 토양 속에 있는 마나를 인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서 굳이 마수를 사냥할 필요도 없고요.”
“허허...”
조승운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피엔다의 용사라는 사람들은 헌터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류의 안전이나 유지를 위해 직접적인 기여를 하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에게 일종의 유흥거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유흥이나 볼거리도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분명했지만, 그런 일을 굳이 헌터들이 담당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평생 헌터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조승운으로서는 헌터들이 마수를 사냥하는 장면을 구경하며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문화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진우의 말을 들은 그는 그저 헛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용사의 관이라는 게 수련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지?”
장박사의 물음이었다.
“네. 우주 곳곳에 있는 다양한 마수들을 한 자리에서 상대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까요. 실제 마수는 아니더라도 직접 맞서는 입장에서는 그게 또 실제와 다르다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생생하니까요. 공격을 허용하면 죽을... 다칠 수도 있고요.”
무심코 말을 하던 진우는 소현을 힐끗 보고는 얼른 단어를 바꿨다. 그러자 소현이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도전해서 마수를 상대하는 도중에는 포기를 할 수도 없다면서?”
“응.”
진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단계가 백 단계가 넘기 전까지는 마수를 쓰러트리고 나서 그 다음 단계에 도전을 하기 전까지 오일 정도 쉴 수 있어. 그 다음부터는 백 단계마다 쉴 수 있는 기간이 오일씩 늘지. 구백 단계를 넘게 되면 한 단계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기 전까지 오십일씩 여유를 둘 수 있어. 물론 그냥 포기할 수도 있고. 하지만 일단 시작이 된 단계에서는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중도 포기가 인정이 되지 않아. 아마 장치를 멈추는 방법 자체가 없는 것 같아.”
휴식 없이 하루에 여러 단계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실제로 낮은 단계에서는 그런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단계가 올라갈수록 마수는 점점 세졌고, 승리를 하더라도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휴식이 허락된 기간 동안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할 경우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재도전을 시도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려면 첫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너, 천 단계 끝까지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도전할 생각은 아니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소현이 표정을 풀더니 이번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녀가 볼 때에 진우는 수련 매니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지나치게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음... 솔직히 말하면 끝까지 도전해 보고 싶기는 해. 하지만 그게 내가 바란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지. 아무리 길어도 피엔다에서 일 년 이상 머무를 생각은 없으니까, 그 전에 천 단계까지 끝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돌아올 생각이야. 지금으로서는 첼스본이 성공했다는 921단계 이상을 돌파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어.”
장수덕 박사가 소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그녀를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라. 진우가 알아서 잘 할 거다. 정 힘들다고 생각되면 적당한 선에서 멈추겠지. 도전하러 가는 거지 죽으러 가는 건 아니지 않냐.”
그 말을 할 때에 장박사의 눈빛은 진우를 향해 있었다. 적당히 하고 물러서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순순히 물러 설 생각이 없었다.
마스바로크가 언급했던 행성들 가운데 지난 세 곳에서의 수련은 주로 마나를 활용하는 능력 자체를 기르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점은 다음에 방문할 조르크 행성에서의 수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피엔다에서의 수련은 직접 마수들을 상대로 공격해서 쓰러트리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중점이 있었다.
더 많은 마수, 더 강한 마수를 상대할수록 자신의 실력이 더 나아질 것이 분명했다.
헌터로서 마수를 상대하는 일에 수련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곳은 피엔다 행성이 유일했다. 진우는 다소 위험하더라도 쉽사리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소현과 장박사는 물론, 스승인 조승운까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앞에서 끝까지 가보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 * * * *
소현을 비롯한 지인들과의 다소 불안한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날 진우는 포털을 타고 피엔다 행성으로 향했다. 포털을 통과하기 전에 타르코스 소장은 진우를 붙잡고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했다.
“그곳에는 특별한 권력 기관이나 권력자가 없네. 대신 ‘시스템’이 모든 것을 관리하지. 그곳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바로 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어. 다른 것은 몰라도 시스템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말게. 피엔다의 시스템에는 일체의 타협이나 용서가 없어. 그러니 시스템과 마찰을 빚으면 그냥 지구로 귀환해야 할 거야. 다른 무엇보다도 그 점을 주의해야 하네.”
“네. 알겠어요.”
진우는 타르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피엔다에는 국가라는 집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체의 권력 기관이나 통치 기구 역시 없었다. 사회는 오로지 ‘시스템’이라고 번역되는 정교한 체계, 혹은 장치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대 도시들마다 그곳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각각의 시스템은 또 다시 거미줄 같은 연결망에 의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한 도시, 혹은 도시 간에 발생하는 사태에 대처하고 있었다.
통합 전산망은 존재하지만 중앙처리장치는 없는 것 같은, 진우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기묘한 체계를 통해 전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이른바 시스템이었다. 가령 범죄자가 발생하면 신고를 받아 출동해서 그를 체포하는 경찰 조직 같은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사로잡은 범죄자를 심문하고 재판에 회부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하지만 판결은 인간이 아닌 시스템이 내렸다.
수사가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진행되는지의 여부도 시스템이 판단했다. 어떤 경찰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용의자를 상대로 고문이나 허가되지 않은 구금 같은 것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려 할 경우 시스템이 개입해서 수사를 중단시키고 해당 경찰관의 직위를 해제시켰다.
범죄에 대한 판단도 ‘불법’이나 ‘합법’같은 말이 아니라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는 용어를 사용했다.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지만, 비합리적인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 피엔다였다.
화재가 발생해서 소방차가 출동하거나 도심 한가운데에서 유독 가스를 실은 차량이 전복되어 방재팀이 나서는 경우에도 시스템이 상황을 판단하고 명령을 내렸다. 피엔다에서 시스템은 지구의 신과 같았다.
그것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무엇이든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위 말하는 시스템의 ‘중앙’이 존재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피엔다에서는 집에서 사용하는 냉장고와 오븐, 길거리의 신호등과 출근 기록기가 사람을 판단하고 통제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진우는 자료를 읽으면서 내내 이곳이 낙원인지 지옥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의 안내를 따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아무런 걱정을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설사 그 일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스템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진우는 그런 곳에서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인류가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이 실현된 곳처럼 보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 같기도 했다.
“무지하게 답답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진우는 전체적으로 길쭉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늘씬하면서도 연한 녹색으로 빛나는 피부를 가지고 있는 피엔다 사람들의 모습으로 자신의 몸을 변형시켰다. 그곳에서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아이디카드는 타르코스가 미리 만들어 주었다.
카드 안에는 피엔다에 있는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그곳의 크레딧이 충분히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검이나 활 같은 무기를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진우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카드에 그런 무기에 대한 소지 허가증이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무기가 있다면 그곳에서 먼저 허가증을 얻고, 그 다음에 직접 구해야 했다. 입고 있는 옷 이외에는 카드 한 장과 간이 포털 장치가 든 배낭 하나만 달랑 들고 떠나는 길이라 지금까지의 여행을 통틀어 가장 단출한 차림으로 나서는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간이 포털 장치를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되네. 피엔다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니까 말이야. 일 년 이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자네를 찾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있는 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간이 포털 장치는 꼭 잘 간수해야 해.”
진우는 타르코스의 거듭된 주의사항에 고개를 끄덕이며 피엔다 행성을 향해 열린 포털 장치를 넘었다. 수련을 위해 찾아가는 네 번째 행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