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83화 (183/235)

183화

“최현 교관님이 가르쳐 주셨어. 네가 케이튼에서 잠시 머물렀었다고.”

빌라에 앉아 진우가 끓여준 차를 마시던 소현은 자신이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느냐는 그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가 헌터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최현이 이미 학교를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현에게 한 번도 뭔가를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교관이라고 불렀다.

“케이튼? 그거하고 내가 여기 있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그 뒤로는 네 행적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분명히 지구에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그게...”

“타르코스 소장님이 그러더라. 너한테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어디로 갔는지는 얘기를 안 해 주셨지만 뭔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고 하시던데?”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내가 여기 있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그러자 소현이 깜찍하게 웃으며 진우를 쳐다보았다.

“너 요즘 굉장히 바쁘게 지냈잖아. 지구에 돌아와서도 며칠 머물지도 못하고 바로 다른 행성으로 떠나야 할 만큼 말이야. 그러던 네가 갑자기 한 달 이상 남에게 행적을 알리지도 않고 사라졌잖아. 분명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같은데. 그리고는 처음 찾아갔던 곳이 케이튼이라는 말을 듣고 문득 느껴지는 게 있었어.”

“그게 뭔데?”

“너 자신에 대해 무슨 회의가 생기거나 정체성에 혼란이 온 거지.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말이야.”

그 말에 진우가 발끈했다.

“사춘기 소년이라니. 내가 무슨...”

그러나 그의 말은 또 다시 소현에 의해 끊겼다.

“사춘기 소년 맞아. 지구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어린애. 그게 지금 너잖아.”

“내가 어린애라고?”

“어린애는 아닌가? 역시 사춘기 소년이 맞겠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사춘기...”

그때 소현이 갑자기 눈에 힘을 주고 진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을 막 반박하려던 진우는 그만 내뱉으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소현의 눈빛에서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어린 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살아.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그제야 조금씩 부모가 아니라 내가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생각하기 시작하지. 그때부터 고민도 하고 방황도 하기 시작하는 거야. 진우 너는 지금까지 타르코스 소장을 비롯해서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열심히 걸어왔잖아. 그러던 네가 갑자기 잠적하다시피 지구에서 사라졌다는 건 무슨 뜻일까? 혹시 남들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고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는데 그것마저 뒤로 미룰 만큼 중요한 고민이.”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지난 한 달가량 진우는 내내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었다. 하지만 소현이 어떻게 그런 걸 알았는지 궁금했다.

“너 지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궁금해 하고 있지?”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소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거야 뻔한 거잖아.”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갑자기 손을 뻗어 진우의 코를 꽉 움켜잡았다.

“내가 누군지 몰라? 네 여자 친구잖아. 세상에서 너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말이야.”

소현의 느닷없는 기습에 깜짝 놀란 진우는 그녀가 마나까지 동원해 코를 잡아 비트는 바람에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에게 예의 없이 군 적이 없던 소현이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코가 비틀어지는 바람에 코끝이 제법 얼얼했다.

그녀는 진우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더니 힘없이 웃으며 쥐었던 코를 놓았다.

“그리고 너는 여자 친구한테도 고민을 숨기고 혼자 해결하려는 나쁜 남자 친구고 말이야.”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진우는 소현의 눈물 앞에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미안했다. 매덤 행성에서의 일을 겪은 뒤에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해결하려던 습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반성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아니었다.

소현의 말마따나 자신은 아직도 뒤늦게 사춘기 소년이나 할 법한 방황을 하고 있었다.

진우는 갑자기 지금까지 자신이 해 왔던 모든 고민이 얼마나 쓸 데 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힘이 있다고 해서 그걸 어디다 쓰며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다니. 그건 마치 축구 선수가 경기장 밖에서 자신의 발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애초에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능력에 따라서 살 생각을 하다니. 순서가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어떤 능력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그때 가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우려고 노력하면 되는 일이었다.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만 따지고 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고맙다.”

진우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어 그렇게 말했다.

“뭐가?”

소현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진우는 손을 뻗어 그것을 닦아주었다. 그가 눈물을 닦아주는데도 소현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 눈에 자신을 향한 원망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줘서 고맙다.”

소현이 물기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가르쳐 준 게 뭔데? 앞으로 뭘 해야 하는데?”

진우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미안한 기색이 담겨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웃음이었다.

“너랑 함께 외계 행성의 생물들을 탐사하기로 했었잖아. 네 옆에서 너를 지키면서 네가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었잖아.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건 내 일을 도와주는 것뿐이잖아. 넌 뭘 할 건데. 나를 돕는 것 말고 네 일 말이야.”

진우는 소현을 와락 품에 안았다. 소현이 흘린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셔왔다.

“그게 내 일이야. 너를 돕는 것. 너를 지켜주는 것. 네가 웃게 하는 것. 그걸 바라보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그게 내 일이야.”

진우의 품에 얼굴을 묻은 소현이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  * * * *

“네가 케이튼에서 떠난 뒤에야 최현 교관님이 나한테 그 소식을 전해 주셨어. 당분간 네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한 바탕 눈물을 쏟아내던 소현이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듯하자 진우는 다시 차 한 잔을 끓여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조금씩 마시면서 어떻게 이곳을 찾아올 생각을 했느냐는 진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케이튼 행성은 네가 처음으로 방문했던 외계 행성이잖아. 그곳을 떠난 뒤에도 지구로 돌아오지 않기에 또 다른 행성으로 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 아마 네가 전에 간 적이 있었던 곳을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갑자기 자기 일생을 돌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말이야.”

아까는 사춘기 소년 같다더니 이제는 갑자기 또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진우는 그녀의 말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러자 소현이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았다.

“웃지 마. 네가 다음에 가야 하는 곳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 아닌가 싶어서 내가 타르코스 소장님을 얼마나 닦달했는지 모르지?”

타르코스 소장님이 진땀깨나 흘리셨겠군. 진우는 그런 생각에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니스프리에 온 지 벌써 삼 주가 지났어. 네가 언젠가는 꼭 여기로 올 것 같았거든.”

소현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이곳을 빌려서 머물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여기 올 때 얼굴까지 바꾸고 대여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했는데?”

“최현 교관님이 네가 이니스프리에 있을 때 이곳을 빌려서 묵었다고 하더라고. 이곳을 중심으로 네가 방문했던 적이 있는 관광지는 죄다 돌아다녔어. 동양인 젊은 남자가 방을 빌린 곳이 없는 가해서 말이야. 특히 이곳은 중간에 들를 때마다 계속 확인을 했지. 새로운 사람이 없나 하고.”

아마 다른 관광지를 들르느라 호수 중앙의 섬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더 일찍 그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우는 자신이 소현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미안하다.”

그러자 소현이 톡 쏘듯 말을 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래. 앞으로 열심히 할 게.”

“뭘 열심히 할 건데?”

진우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웃을 수 있게. 내가 더 이상 울지 않을 수 있게. 그렇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게.”

소현이 다시 진우의 품안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진우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확인하려는 듯 귀를 대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네가 너무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건강하게 내 옆에 있기만 해도 나는 웃을 수 있을 거야.”

진우는 그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최소한 몇 번은 위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배의 단계에 반드시 오르겠다는 욕심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나 니코레임 인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건 약속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자신이 원했던, 그래서 지금 가지고 있게 된 능력에 대한 보답이고 책임이었다.

*  * * * *

진우는 이니스프리의 호숫가에서 소현과 사흘을 함께 보냈다. 첫날 밤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 했다.

진우와 소현 모두에게 어색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던 밤이 지나고 나서 소현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전날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는 침대 시트를 갈고 방을 정리한다고 수선을 피웠다. 진우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소현에게 슬쩍 치료용 마나를 시전해 그녀의 고통을 지워주었다.

그 바람에 소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호숫가에서 함께 보낸 사흘 동안 두 사람은 거의 빌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끔 빌라의 발코니에서 바로 호수로 뛰어들어 수영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는 것 말고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끊은 사람들처럼 둘이 함께 있는 시간만을 탐닉하며 보냈다.

사흘 째 아침이 밝았을 때 소현은 침대에 누운 채 진우에게 속삭였다.

“너, 무슨 변강쇠 같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중급 헌터가 되는 과정에서 신체의 변화를 겪은 데다가 소현을 안는 정도로 신체의 활력이 떨어지기에는 체력이 너무 좋았다.

소현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그녀를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점은 소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진우에 의해 한차례 신체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그녀의 말에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손을 뻗어 소현의 몸을 끌어안았다. 소현의 몸이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말리며 그의 품안으로 쏙 들어왔다.

*  * * * *

“피엔다 행성으로 가겠습니다.”

이니스프리를 마지막으로 지구로 돌아온 진우는 타르코스 소장을 만나자마자 그 말부터 꺼냈다. 타르코스 소장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한 달 정도 되는 기간에 그의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홀쭉하게 변해 있었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지 짐작이 되어 진우는 은근히 미안했다.

“그곳에 대한 자료는 다 검토했는가?”

타르코스 소장이 조심스럽게 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진우는 그가 왜 그렇게 묻는지를 짐작하고는 일부러 자신만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신 자료는 다 살펴봤어요. 이번에는 헌터 본연의 임무를 다 하면 되는 거지요?”

진우의 말에 타르코스 소장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그곳에서 자네가 상대해야 할 것은 그냥 마수들이 아니니까 말이야.”

“알아요. 하지만 그냥 환상도 아니라면서요? 잘못하면 진짜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마수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상대하는 수밖에는 없잖아요.”

진우가 계속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타르코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자네, 뭔가 변한 것 같군.”

그 말에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변한 건 없어요. 다만 제가 해야 할 일을 조금 더 분명하게 깨달았다고 할 수는 있겠네요.”

타르코스는 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표정이 밝아져서 다행이긴 하군. 그래도 반드시 명심하게. 그곳은 지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어떤 분야에서는 우리 니코레임보다 훨씬 문명이 발달한 곳이네. 자네가 지구에서 왔다는 걸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그곳 사람들처럼 미리 모습을 바꾸는 것도 잊지 말고.”

“네.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피엔다에 가면 통역기를 제일 먼저 구입하게. 그곳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워낙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 곳이라서 그런 걸로는 아무도 자네를 의심하지 않을 거야.”

“네. 그렇게 할게요.”

피엔다는 지금까지 진우가 방문했던 행성 가운데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한 곳이었다. 인구도 적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들이 특정 지역에만 몰려 살았기 때문에 마치 영화에서 보는 미래의 도시처럼 고층 건물들이 밀집한 곳이 많았다. 하지만 타르코스는 피엔다에서 지내는 것이 지금까지 방문했던 다른 행성들에 비해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었다.

“수련을 하러 갔던 헌터들 가운데에 가장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네. 부디 조심해야 하네.”

진우는 그의 말에 그저 씩 웃었다. 어차피 목숨을 잃을 위험 앞에서 주춤거렸다면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소현의 얼굴이 떠올라 미안하기는 했다.

============================ 작품 후기 ============================

특별히 야한 장면을 넣을 생각은 없고 앞으로도 그건 그럴 겁니다. 이번 편에서는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 진우와 소현의 관계가 한 걸음 더 진전되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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