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15. 행성 피엔다
지구로 귀환한 진우는 조승운을 찾아가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타르코스를 만난 뒤에 다음 수련 장소가 아닌 행성 케이튼으로 향했다. 그는 타르코스에게 미리 부탁해서 자신이 포털 장치를 이용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케이튼이라면 내 선에서 해결할 수가 있네. 하지만 다른 행성도 방문할 생각이라면 콴톤 의장에게는 말을 해 두어야 하네.”
진우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발견한 타르코스는 별 말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만 그가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헌터 양성소에서 직접 관리한다고도 할 수 있는 한국과 행성 케이튼의 포털까지였다. 그 밖의 다른 행성의 포털 장치 기록을 조작하는 문제는 그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케이튼 이외의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계획이라면 콴톤 의장의 협조를 요청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진우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가 행성 케이튼으로 떠나던 날 연락을 받은 콴톤 의장이 직접 한국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가 헌터 양성소의 타르코스 소장 집무실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진우가 포털을 타고 케이튼으로 넘어간 뒤였다.
“다른 이상한 낌새는 없던가? 설마 진우 군이 이제 와서 니코레임 행성을 되찾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겠지?”
콴톤의 말에는 우려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타르코스로서도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습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매덤 행성에 있는 만물의 벽을 아예 파괴시킨 모양입니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거기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케이튼으로 가겠다고 한 걸로 보아 뭔가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듯 합니다. 그곳은 진우 군이 최초로 헌터로서의 훈련을 받았던 곳이니까요.”
“그럼 최현 헌터라도 딸려 보내지 그랬나? 처음 진우 군을 훈련시켰던 교관이 그 사람이었지 않은가?”
그 말에 타르코스가 고개를 저었다.
“스승인 조승운 옹에게는 인사를 한 모양이지만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소식을 일체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심지어 소현 양에게도 당분간은 자신의 거취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허어...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발전을 한 후유증인가?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솔직히 발전 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저희조차도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섰으니까요.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해결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플레비크에서 또 다른 상급 전사를 지구로 직접 보내지는 않겠지?”
“당분간은 그러지 못할 겁니다. 지구는 그들로서도 섣불리 싸움을 벌이기에 좋은 곳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보낸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방법을 달리 할 겁니다.
플레비크 본성에 있는 지도자들이 직접 나서거나 두 명 이상의 상급 전사가 함께 덤비지 않는다면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겠지요. 더 이상 헛되이 상급 전사를 잃는다면 그들 역시 타격이 적지 않을 겁니다.”
콴톤 의장은 타르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은 되었지만 공연히 섣불리 나서서 참견을 했다가는 일이 더 어렵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두 사람은 진우가 알아서 자신을 가다듬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초조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 * * * *
조세연 박사는 여전히 행성 케이튼의 전초기지장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주방장이었던 남경호는 이미 지구로 영구 귀환했던 터라 자리에 없었다.
“네가 갑자기 그냥 쉬겠다고 하니 이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왔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마침 크롱을 사냥하기 위해 방문한 전문 헌터들도 없을 때니 기지에 눈치 볼 사람도 없어. 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편안히 있으면 돼.”
조세연 박사는 오랜만에 만나는 진우를 푸근하게 반겨주면서도 일체의 자질구레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기지에 있는 관리인들에게도 그가 요구하는 것들을 되도록 군말 없이 챙겨주되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거나 간섭을 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다만 진우 몰래 지구에 있던 최현에게 그가 지금 케이튼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박사의 배려 덕분에 진우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주변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진우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충고가 아니라 그저 편안하게 내버려둬 주는 것이었다. 소현에게도 자신이 지구로 귀환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고 나선 길이었다.
당분간 혼자 있으면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케이튼에 도착한 뒤 며칠 동안 인근의 초원을 산책하거나 크롱을 사냥하면서 말 그대로 이곳에 놀러 온 사람처럼 지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무중력 트럭을 몰고 대수림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는 트럭을 강가에 세워두고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 예전에 괴조들이 둥지를 틀었던 호수로 향했다.
대수림에서는 자신의 발로 직접 이동하는 편이 무중력 트럭을 타고 가는 것보다 빨랐다. 어느새 동조 단계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는 그의 몸놀림은 과거 갓 마나를 각성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민첩했다. 가끔씩 마주치는 대수림의 마수들조차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 * * * *
호수는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과거 괴조 한 쌍이 둥지를 틀었던 호수 중앙의 섬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마나 크리스털을 가져가서 그런가? 녀석들도 벌써 이곳을 떠난 모양이군.”
헌터 학교에 들어가서 맞았던 첫 방학 때에 이미 대수림 바깥까지 진출했던 마수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렇다면 괴조들도 이미 당시에 이곳을 떠났을 가능성이 많았다.
진우는 괴조들의 빈 둥지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여행용 버너 대신에 직접 나뭇가지들을 끌어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그 위에 물을 끓여 차를 타서 마셨다.
어둠 속에서 홀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차를 홀짝거리다 보니 자신의 첫 외계 행성 방문지였던 이곳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최현의 지도로 겪었던 여러 가지 고된 훈련들, 괴조의 습격을 받아 대수림 한 가운데에 떨어진 뒤에 만났던 사나운 마수들. 특히 호숫가에서 케로스와 벌였던 목숨을 건 사투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지금이라면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녀석을 간신히 쓰러트린 뒤 그는 며칠 동안 정신을 잃었었다.
“그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가 변화했었지.”
덕분에 진우는 단숨에 중급 헌터까지 도약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뒤에 겪었던 많은 일들도 비슷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역경이 닥치고,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을 이겨낼 때마다 그는 한 단계씩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다보니 힘든 일을 맞아도 위축되지 않고 그것과 맞서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은 어느새 플레비크의 상급 전사와 일대일로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지?”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헌터가 되었다. 어쩌면 우주를 몽땅 뒤져도 개인적으로는 자신보다 더 강한 자를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힘을 손에 쥐었다.
동조 단계에 들기 전까지, 그리고 동조 단계에 든 뒤에도 매덤 행성에서의 일을 겪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구심을 품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진우는 내내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매덤 행성에서도 적잖이 고민을 했지만 그곳에서는 머릿속을 정리할 여유가 많지 않았다. 바바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도록 돕고, 일이 마무리된 뒤에는 다시 카딘과 헤이둑 일행을 가르친답시고 거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막상 지구로 귀환을 하겠다는 결심이 서자, 문득 이런 식으로 계속 마나를 활용하는 능력만 개발해서는 잘 벼른 한 자루 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쓰기에는 좋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느낌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지구에 돌아가서 조승운 스승을 볼 때에는 그저 반갑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하지만 타르코스 소장의 얼굴을 보자, 진우는 자신에 대해 뭔가 정리를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수련에만 내몰리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르코스의 환대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생경함이 그로 하여금 불쑥 케이튼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뭔가 가슴을 간질거리는 느낌을 어쩌지 못하고 이곳에 왔지만 반드시 무엇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뚜렷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성격과 방향을 분명히 정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경지를 높이기 위한 수련에 매진하며 살아왔었다.
다행히 마나를 볼 수 있는 타고난 재능과 좋은 스승, 그리고 타르코스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진우 스스로가 더 높은 단계에 오르기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치열하게 노력하기도 했었다.
그 결과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
진우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스로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그래서 나는 이 힘으로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작정인 거지?’
- 니코레임 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지. 그렇게 약속했잖아.
그래.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좋겠지. 그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나도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들어주고 싶어. 하지만 내가 약속을 한 적이 있던가?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나는 뭘 하며 살지?
- 돈을 많이 벌어. 너는 마음만 먹으면 지구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어.
이미 많이 벌었잖아. 아마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쓰고 죽을 걸? 여기서 더 벌어야 하나? 얼마까지? 지구 최고의 부자가 되면 뭐가 좋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존경하고 우러러볼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수 있을까? 그게 좋은 건가?
- 너 배가 불렀구나? 다른 사람들이 네 말을 들으면 기가 막혀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걸?
그렇겠지. 부자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허탈하겠지. 그런데 여기서 돈을 더 벌겠다고 매달려 사는 것도 허탈한 건 마찬가지야.
- 유명한 사람이 되는 건 어때? 네 실력과 힘을 밝히면 단숨에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기각.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거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다가와서 아는 척 하는 건 싫어. TV나 인터넷에서 내 얼굴과 이름이 돌아다니는 것도 싫고. 영화를 보려고 들어간 극장에서 사람들에게 거꾸로 구경거리가 되는 게 좋겠어?
- 세상의 여자를 다 거느리고 사는 건 어때?
그래. 남자라면 그것도 좋은 일일 거야. 그리고 그러다보면 세상의 아이를 다 키우는 것 같은 꼴을 당하겠지. 나는 아마 내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힘들어 하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좋아했던 모든 여자들이 나를 미워하게 되겠지.
- 그럼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뭐든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서도 시골에 초가집 하나 짓고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는 건 아니겠지? 지금 유치한 철학자나 은둔생활을 하는 현자 흉내를 내려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너무나 실망인 걸.
뜬금없기는. 해마다 지붕을 새로 얹어야 하는 그런 집에서 살라고? 아니야. 그리고 나는 농사도 지을 줄 몰라. 흙벽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그냥 마트에서 잘 포장된 채소를 사서 먹는 걸 택할 거야.
- 그럼 뭘 하며 살겠다는 거야? 정말 웃기는군. 너 같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뭘 하고 살고 싶은지를 모르다니. 네가 가진 힘이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럽다. 정말 부끄럽다. 내가 가진 힘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부끄럽다.
진우는 호수의 아침이 밝아오면서 사방을 덮기 시작하는 물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밤새 피워 놓았던 모닥불을 꼼꼼히 끈 그는 그 길로 대수림을 빠져나와 강가에 세워두었던 무중력 트럭을 타고 기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날 바로 케이튼 행성을 떠났다.
“어디 갈 거니? 느낌에 지구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은데?”
조세연 박사의 질문에 진우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저기요.”
* * * * *
진우는 그 말 그대로 케이튼을 떠난 뒤에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녔다. 세드릭도, 라네스 기지장도 없는 무니악 행성에서는 남쪽의 넓은 바다 속을 며칠 동안 혼자 누비며 다녔다.
사람 하나 없는 황량한 스키다인 행성에서는 레드 플라워들이 한낮의 태양빛을 받기 위해 활짝 꽃을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과거의 위험했던 순간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새들 행성에서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헌터들을 위한 마나 온천이 만들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밖에도 마나 크리스털을 찾기 위해 방문했던 몇몇 행성들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행성 이니스프리였다.
이니스프리의 험프리 호텔은 카슨 호텔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면 그곳의 주주 가운데 하나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진우는 일부러 얼굴마저 변형시키고 예전에 최현과 함께 지냈던 호숫가의 빌라를 빌렸다.
그곳에서 진우는 이니스피리 호수를 바라보며 날마다 명상을 하며 지냈다. 진우가 행성 순례와 다를 바가 없는 여행을 떠난 지 어느 새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손님이 방문했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들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진우는 무심코 문을 열다가 깜짝 놀라 문고리를 손에 쥔 채로 그 자리에 못이 박히듯 얼어붙고 말았다.
“안녕?”
소현이 문 밖에서 손을 흔들며 그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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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행성인 피엔다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