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80화 (180/235)

180화

렌스는 명목상 왕위 계승 서열이 4위이기는 했어도 실제로는 오랫동안 왕실에서 소외되다시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크랄 국왕이 급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냥꾼들을 규합해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나서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가 진행시켰던 일련의 계획들은 과감하면서도 신속했다. 그리고 그가 드러낸 힘은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강해 보였다.

그런 렌스가 다시 하루 만에 진우라는 젊은 술사를 앞세운 바바에 의해 무너지자 왕실 주변의 인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진우는 사냥꾼이자 동시에 술사인 특이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그의 정체는 술사 쪽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상급 마수를 쓰러뜨린 사람이라는 점보다는 만물의 벽을 봉쇄할 유일한 대표 술사로 뽑혔다는 사실이 더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글로다이트인들의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사냥꾼보다는 술사가 더 인정을 받는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렌스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과정에서 진우가 드러낸 힘은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왕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렌스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그보다 더 급격한 그의 몰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사냥꾼들이 지닌 무력이 권력을 정면으로 겨냥했을 때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것은 글로다이트 내에서 그동안 마수를 잡아 돈벌이를 하는 힘센 사람들이라는 인식 속에 머물러 있던 사냥꾼들에 대한 생각을 급격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  * * * *

진우가 렌스와 그의 무리를 모조리 제압한 뒤 바바는 그의 가족들조차 놀랄 만큼 신속하게 조력자들을 모아 사태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카딘이 그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말에 대해 오빠인 세자베는 씁쓸하게 웃으며 바바의 변신에 대해 설명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왕권 경쟁에 뛰어든 마당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직접 경험하셨으니까.”

진우는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렌스의 저택에서 구출된 뒤에 보여주었던 바바의 과단성에는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크랄 국왕에게 자식이 없었으니 이미 오래전부터 나름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바바가 왕위 계승의 과정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이들을 누르고 왕위에 오르는데 실제로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어떤 힘이 아니라 바로 진우 자신이었다. 그는 렌스가 사로잡힌 뒤에도 수도 치안대를 규합해 격렬하게 저항할 의사를 드러냈던 모헨드로일과 그 일당을 간단하게 제압했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진우가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사태를 수습했다는 사실에 더욱 전율했다. 그것은 월등한 힘의 우위가 전제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크랄 국왕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바바는 정식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계승 서열상으로도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전대 국왕이 급사함으로써 아무런 유언이나 공식적인 양위 의사를 밝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과정이 그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바바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여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물론, 여차할 경우에는 상대를 힘으로 눌러버리는 방법까지 동원하여 결국 권력을 움켜잡았다.

진우는 바바가 왕위로 향하는 길에 놓여 있었던 험난한 장애물들을 깔끔하게 밀어버리는 일을 도맡은 덕분에 일약 최고의 공신으로 부각되었다. 덕분에 새로운 왕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새로운 거처의 문턱을 뻔질나게 넘나들었다.

진우는 그동안 있었던 몇 가지 사건과 잘 생긴 외모, 그리고 아직 미혼이라는 점 때문에 일약 글로다이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본인으로서는 전혀 원치 않았던 일이었다.

다만 만물의 벽이 붕괴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엉뚱하게 그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은 이티삿과 렌스를 비롯한 그 주변의 인물들이었다.

만물의 벽이 붕괴할 당시 진우를 암습하고, 크랄 국왕이 급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란이나 다름없는 거사를 시도했던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없는 죄까지 뒤집어쓰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  * * * *

“사냥꾼 양성 학교를 세우게 해 달라고?”

“네. 전하.”

진우는 왕궁에 있는 접견실에서 국왕의 보위에 앉아 있는 바바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국왕의 옆에는 이제 왕세자가 된 세자베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만물의 벽 붕괴 사건이 일어난 뒤로 이미 두 달 가량이 지난 터라 세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왕권이나 왕실도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고 안정된 상황이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왕실 상황 때문에 계속 분위기만 살피고 있던 진우는 적당한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들자 드디어 그동안 계속 미루어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냥꾼을 본격적으로 양성한다라....”

국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하는 눈치를 보이자 세자베가 나섰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물의 벽이 붕괴되었으니 앞으로 조금씩 마수의 수가 늘어날 것이라는 게 지누 공의 예상이지 않습니까?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냥꾼의 수를 점차적으로 늘려갈 수 있는 체계적인 수단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세자베의 말을 들은 국왕이 진우에게 물었다.

“앞으로 마수의 수가 늘어날 것이라는 말은 확실한 건가?”

진우가 고개를 숙인 채 그 말에 대답했다.

“소신의 판단으로는 그러합니다. 게다가...”

진우는 약간 말을 멈추었다가 국왕의 옆에 있던 세자베를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졌던 몇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해 앞으로는 사냥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거나 기용하려는 이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라도 왕실에서 직접 사냥꾼들을 양성하여 미리 충성의 다짐을 받아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헌터로서 사냥꾼들을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존재로 만들자는 말은 진우로서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매덤 행성이었다. 왕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건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왕에게 말을 꺼내기에 앞서 진우는 이 일에 대해 세자베와 여러 차례 의논을 했었다. 그 자리에서 세자베는 진우에게 사냥꾼의 충성심을 들먹여 바바를 설득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세자베의 충고가 적절한 것이었던지 그 말을 들은 국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역시 왕위 쟁탈전을 겪으면서 사냥꾼들의 무력이 권력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경험한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구체적인 내용은 그대가 계획을 세워 다시 보고하도록 하라.”

바바 국왕은 그 말을 한 뒤에 세자베에게 고개를 돌렸다.

“왕세자도 지누 공이 사냥꾼 양성 학교를 세우는 일을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라. 왕실을 위한 일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보기도 좋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그리고 사냥꾼 학교에서 배출되는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왕실의 관리로 등용하는 것도 고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왕실의 관리?”

“네. 그렇습니다. 사냥꾼들이 지닌 힘은 마수들을 상대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렌스 일당의 일 때문에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점을 염두에 두게 되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왕실에도 무력을 지닌 이들을 곁에 두시는 것이 아바마마의 보위를 굳건히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이번에는 세자베가 진우의 충고에 따라 한 말이었다. 진우는 어차피 앞으로의 매덤 행성이 걸어가야 할 행보는 술사들만이 권력의 중심에 서 왔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를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의 충고는 사냥꾼 양성 학교의 인재들에게 충성의 다짐을 받도록 권하는 게 좋겠다는 세자베 자신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  * * * *

사냥꾼 양성 학교를 세운다는 소식은 글로다이트 전국을 강타했다. 일단은 수도인 제하이어 한 곳에만 세울 예정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젊은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주로 술사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지 못해 출세의 길이 가로막혔다고 낙담하던 유력 집안 자제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진우는 한국의 헌터 학교에서 가르치던 교육 과정을 모방하여 그것을 매덤 행성의 특성에 맞게 적절하게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전투 과목을 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곳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와 특성이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맨손으로 하는 격투기에 관해서는 중급 사냥꾼인 헤이둑조차도 제대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은 조금 뜻밖이었다.

“마수에게 맨손으로 달려드는 건 미친 짓이니까.”

어째서 격투기 훈련을 하지 않느냐는 진우의 질문에 대한 헤이둑의 대답이었다. 카리엘과 미즈락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우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마나의 운용이라는 것은 신체의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몸 전체를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신체의 움직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진우는 렌스 일당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마주쳤던 두 명의 상급 헌터들을 떠올렸다.

‘어쩐지, 상급 헌터라는 자들의 마나가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치우친 것 같더라니. 이유가 있었네. 술사들이 중심이 된 사회가 너무 오래 계속되다보니 사냥꾼들조차 오로지 마나를 강제로 활용하는 방법에만 신경을 써 온 모양이군.’

진우는 열흘 가량 시간을 들여 사냥꾼 양성 학교의 기본 골격을 짠 뒤에는 구체적인 부지의 선정과 건물을 세우는 등의 일을 모두 세자베에게 떠넘겨 버렸다. 그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  * * * *

“그러니까 우리더러 당분간 지누 너에게 훈련을 받으라고?”

헤이둑 일행은 진우의 호출을 받고 달려왔다가 그가 당분간 사냥꾼으로서의 기본을 닦게 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정식 사냥꾼인데? 사냥꾼 양성 학교라는 건 아직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 친구들을 대상으로 한 거 아니었어?”

진우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상급 사냥꾼보다 뛰어난 사냥꾼이라는 건 인정하시죠?”

진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두 명의 상급 사냥꾼을 힘 안들이고 제압했다.

진우가 그들을 꺾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헤이둑 일행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상급 마수인 유데르하를 단독으로 쓰러트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매덤 행성에는 진우 이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제 관점에서 볼 때에 여러분의 수련은 기본부터 잘못되어 있어요. 저는 여러분들이 제대로 된 사냥꾼이 되도록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거야 우리로서는 환영이지. 지누한테 배우면 지금보다 실력이 더 좋아질 테니까. 혹시 알아? 내가 중급 사냥꾼이 될지.”

미즈락이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진우가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분명히 중급 사냥꾼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카리엘도 마찬가지고요. 그 점은 제가 장담하지요.”

그러자 카리엘과 미즈락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우와~.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지누가 시키는 건 뭐든지 열심히 할 수 있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자 진우가 씩 웃었다.

“대신 여러분은 저한테 배운 뒤에 새로 지어질 학교에서 당분간 교관을 맡아주셔야 해요. 지금 가장 부족한 게 제대로 된 교관이니까요. 그걸 약속해 주시면 저도 두 분을 확실히 중급 헌터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그래. 그렇게 할 게.”

두 사람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옆에 서 있던 헤이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헤이둑님도 같은 약속을 해 주시면 제가 상급 사냥꾼의 길을 열어드리겠어요.”

그 말을 들은 헤이둑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중급 사냥꾼이 상급 사냥꾼이 된다는 건 하급에서 중급으로 오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타고난 재능뿐만이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진우가 그 길을 열어준다고 하자 그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하지만 선뜻 믿어지지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인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교관을 맡지.”

그러자 진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거예요.”

헤이둑에게도 어차피 교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려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매덤 행성을 떠나기 전에 그를 새로운 상급 사냥꾼으로 이끌 필요가 있었다. 기존에 글로다이트가 가지고 있던 두 명의 상급 사냥꾼들이 바바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모두 처형되는 바람에 현재 이 나라에는 진우를 제외하고는 상급 사냥꾼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런데 말이야.”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카딘이 손을 들었다.

“나는 왜 여기 오라고 한 거야? 나한테도 술사 훈련을 시킬 거야?”

진우는 기뻐하는 세 사람 옆에서 멀뚱한 표정을 짓고 자신을 바라보는 카딘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카딘도 함께 사냥꾼 훈련을 받을 거야.”

“뭐어?”

진우의 폭탄 선언에 카딘과 헤이둑 일행 모두가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사냥꾼 훈련을 함께 받으면 카딘의 술사로서의 단계도 분명히 올라갈 거야. 내 말을 믿어.”

믿을 수 없는 말을 해 놓고 믿으라고 하는 진우로 인해 네 사람 모두 표정이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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