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77화 (177/235)

177화

진우는 경비대와 사냥꾼들을 제압한 뒤에 경비대장의 사무실을 급습해서 자신의 짐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카딘과 헤이둑 일행의 숙소에 들러 그들의 짐과 아틀리까지 챙긴 뒤에 미련 없이 만물의 벽을 떠났다. 카딘의 오빠인 세자베 가족들은 다행히 아직 구금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히 빼내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의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진우가 손을 쓰자 모두 얼어붙은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아무도 그들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이미 완숙한 동조 단계에 든 그에게 있어서 기껏 해야 중급 사냥꾼에 불과한 매덤 행성의 사람들은 더 이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나마 진우가 사람을 다치지 않게 배려한 덕분에 아무도 죽거나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대로 그냥 제하이어까지 갈 거예요?”

카딘은 진우의 옆에서 아틀리를 몰며 그렇게 물었다.

“일단 바바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야. 아마 지금쯤은 사로잡혀서 어딘가에 갇혀 있을지도 몰라. 카딘의 집에는 경비나 호위가 많지 않잖아. 모헨드로일이라는 작자가 수도의 치안대장이라면 지금쯤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이미 카딘의 집으로 쳐들어갔을 거야.”

그 점은 카딘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국왕이 서거함에 따라 나라의 권력에 공백이 생긴 상황이었다.

직계 계승자가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무력을 가진 집단이 먼저 움직일 경우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대항할 사이도 없이 손쉽게 권력을 탈취당할 가능성이 많았다. 수도의 치안대장이라는 자리는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질 수 있는 직책이었다.

“제 말은 저희가 제하이어로 들어가도록 모헨드로일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거죠. 저희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지 않나요?”

그러자 헤이둑이 아틀리를 운전하며 피식 웃었다.

“진우가 함께 가잖아. 그게 대비지. 그 이상 다른 대비가 필요할까? 글로다이트에 있는 나머지 상급 사냥꾼 둘이 동시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그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거야.”

헤이둑인 진우가 만물의 벽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보통의 술사나 사냥꾼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진우가 사라진 뒤에 알마크 산 전체를 울리던 연속된 굉음만으로도 그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고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사냥꾼의 감과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경비대장에게 위협을 가하는 장면에서 그는 진우가 지닌 진정한 힘의 일부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아마 수도를 지키는 병사들 전부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진우를 상대하기는 힘들 거야.’

그는 이미 진우가 매덤 행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닌 외계인이었다. 그는 아틀리를 몰면서 카딘을 힐끗 쳐다보았다.

‘카딘님만 안 됐지. 은근히 지누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쩝.’

헤이둑이 보기에 진우가 카딘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한 외계인이었다. 일이 끝나면 떠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카딘님이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좋은 분인데...’

그들이 수도 제하이어가 멀리 보이는 곳까지 도착한 것은 만물의 벽을 떠난 지 칠일 만이었다. 밤잠까지 줄여가며 강행군을 한 결과였다.

*  * * * *

성벽이 얼마 남지 않은 곳까지 이르렀을 때 헤이둑이 진우에게 말을 걸었다.

“제하이어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미 성벽에 병사들이 많이 모여 있을 것이네. 왕실의 명령을 빙자해서 사냥꾼들도 제법 소집을 했을 거야.”

진우는 그의 말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예상하고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되도록 매덤 행성의 사람들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피해도 없이 병사들을 뚫고 수도에 진입하기는 역시 힘들겠죠?”

그 말에 헤이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상대를 해서 병사들을 물리치고 진입하려면 아무래도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게 되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 어떻게 하겠나? 몰래 숨어들어가는 방법도 있네.”

진우는 카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헨드로일이라는 치안대장의 집을 알아?”

그러자 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서로 왕래가 없었지만, 예전에는 파티가 있어 몇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치안대장의 집무실은?”

그 말에는 헤이둑이 대답했다.

“거기는 내가 아네. 아무래도 사냥꾼의 일을 하다보면 치안대 본부가 어디 있는지 모를 수는 없지. 집무실의 위치까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본부가 있는 건물의 위치는 아네.”

“그럼 일단 오늘밤을 기다려 경계가 다소 허술한 곳을 노려 잠입하는 것으로 하죠. 성벽을 뚫고 수도로 들어간 뒤에 먼저 카딘의 집부터 찾아가는 걸로 해요. 거기서 바바님이 무사한지를 확인한 다음, 혹시라도 이미 연행되어 갔다면 소재지를 파악해서 구출하는 걸로 하지요. 정 안 되면 치안대 본부와 모헨드로일의 집을 샅샅이 뒤져보면 될 거예요.”

일행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성벽이 멀리 보이는 숲 속에 몸을 숨기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헤이둑에게 말을 들었네. 자네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게 사실인가?”

숲속에 몸을 숨기고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카딘의 오빠인 세자베가 진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불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물었다. 세자베의 질문을 들은 진우는 착잡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그냥 조용히 이곳을 뜨려고 했던 건데...’

진우가 아무런 대답이 없이 쓴웃음만 짓자 옆에 있던 카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행성이라는 게 뭐야? 우리가 살고 있는 곳하고 비슷하게 생겼어? 거기도 우리처럼 생긴 사람들이 사는 거야?”

카딘의 질문에는 헤이둑 일행도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귀를 쫑긋 새웠다. 그들 역시 외계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다.

“저 하늘 바깥으로 계속 올라가면 굉장히 넓은 공간이 나와. 그곳에는 이곳하고 똑같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다른 세상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돼. 환경도, 생긴 것도 저마다 다르지만 다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

“그 중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은 어디야?”

그 말에 진우는 그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글쎄다. 제일 살기 좋은 곳이 따로 있기야 하겠어? 이곳 사람들에게는 여기가 제일 살기 좋은 곳이고, 또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겠지.”

“그럼 지누에게도 자기 고향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겠네?”

“아무래도 그렇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행성을 돌아다녔지만, 역시 자신에게 제일 편안한 곳은 지구였다. 그때 카딘이 재차 물어왔다.

“그럼 지누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그 말에 진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카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말에 담긴 숨은 의미가 너무나 절절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어렸다.

헤이둑 일행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황급히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도 카딘의 물음에 담긴 슬픔이 전해졌던 것이다.

카리엘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일을 다 마무리하고 나면 그렇게 할 거야. 나도 고향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더라도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잊지는 못할 거야.”

그 말에 카딘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숲속에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침묵이 맴돌았다. 세자베는 말없이 동생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기 가족이 있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진우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번 수련은 참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구나.’

*  * * * *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진우와 그 일행은 조심스럽게 성벽을 향해 다가갔다. 진우는 주변의 마나를 동조시켜 자신들의 발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차단막을 펼쳤다.

어둠에 눈이 익숙하지 못한 카딘이 자꾸 발을 헛딛는 바람에 그가 직접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이끌고 가야 했다. 카딘은 진우가 내민 손을 꼭 쥐었다.

“저곳을 뚫고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진우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군데군데 횃불을 환하게 밝혀 놓은 성벽 가운데 한 곳을 가리켰다. 마나 탐색을 실시한 결과 그곳이 가장 병사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병사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움직이는 틈을 타서 소리 없이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곳에서 그는 성벽 밑의 커다란 돌에 손을 대고 마나를 이용해 그것을 변형시켰다. 잠시 후 바위가 물렁물렁해지더니 버터가 녹아내리듯 흘러내리며 사람이 하나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뚫렸다.

진우의 신호를 받은 헤이둑 일행이 카딘을 들쳐 업고 그가 뚫어 놓은 성벽 밑으로 다가와 구멍을 통과했다. 일행이 모두 무사히 성 안으로 진입한 것을 확인한 진우는 자신도 구멍을 통과한 다음 다시 주변의 돌을 변형시켜 그들이 지나온 곳을 막아버렸다.

“먼저 카딘의 집으로 가지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이 방향을 정하고 어둠 속에서 몸을 날렸다. 진우는 카딘을 업은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지나온 성벽 위에는 여전히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 *

카딘의 집에 도착한 진우는 마나 탐색을 통해 집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한참 동안 주변을 살피던 그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바바님의 마나가 느껴지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나가 저택에 있는 것으로 보아 외부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아버님이 어디에 계실 것 같은가?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세자베가 초조한 목소리로 진우에게 물었다. 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 사정에 가장 어두운 사람이 바로 진우였다. 지금 당장은 그들을 인솔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 이런 일에는 좀 더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나서주는 것이 좋았다.

그의 얼굴이 헤이둑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다들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안으로 들어가 외부 인물을 하나 잡아 물어보겠습니다.”

“괜찮겠는가?”

세자베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그렇게 물었지만 사실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진우는 걱정 말라는 듯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저택 안으로 몸을 날렸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그는 마나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사실 그가 일부러 나선 것은 자신이 일행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 향하는 곳에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예상 밖의 인물 때문이었다.

바바의 소재를 누군가 알고 있다면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리고 처음 마나 탐색을 시도했을 때 느껴지던 기운으로 미루어볼 때 지금 진우가 향하는 곳에 있는 사람은 이곳에 있는 이들의 인솔자임에 틀림없었다.

‘글로다이트에 나 말고 두 명의 상급 사냥꾼이 더 있다고 하더니. 그 중의 한 명이 하필 이곳에 있을 줄이야.’

자신 이외의 상급 사냥꾼들은 이미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이곳에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 은퇴했던 상급 사냥꾼을 동원할 정도의 힘을 가진 이가 이번 일을 주도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왕족이나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번 일에 직접 나선 것이 틀림없어.’

진우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의 마나 등에 일제히 불이 켜지면서 저택이 환하게 밝아졌다.

“조만간 쥐새끼들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라고 하더니 드디어 보게 되는군.”

환하게 밝혀진 저택의 넓은 홀 한쪽에서 거친 음성의 목소리를 뱉으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주변에는 사냥꾼이나 술사로 보이는 이들이 어느새 나타나 진우를 넓게 에워싸고 있었다.

처음 말을 꺼냈던 사람은 겉으로 보아서는 아직 사십대 초반인 것 같아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그가 진우를 쳐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진우가 그렇게 묻자 마치 당돌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웃던 상대가 진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글로다이트의 상급 사냥꾼인 멤브락이다. 어린 녀석이 내 이름을 듣고도 겁을 내지 않는 걸 보니 네놈이 바로 요즘 나라를 시끄럽게 한다는 그 애송이인가 보구나. 지누라고 했던가?”

그의 말에 진우가 씨익 웃었다.

“결국 이곳의 상급 사냥꾼을 만나보지 못하고 그냥 가는가 싶었는데, 반갑군. 맞아. 내가 진우다.”

그러자 멤브락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진우는 그의 눈빛에서 진한 살기가 맺히는 것을 보았다. 멤브락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주위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잠시 자리를 지키고 있어라. 이 어린 녀석을 상대로 오랜만에 손맛을 좀 느껴야 할 것 같구나.”

진우는 말을 하는 동안 점점 살기가 진해지는 상대를 쳐다보았다.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암살자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상대였다.

‘만물의 벽에서 헤이둑을 향해 암습을 시도했던 일행하고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이 녀석 느낌이 아무래도 수상해.’

진우는 자세를 바로하고 상대를 쳐다보았다. 속전 속결로 끝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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