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76화 (176/235)

176화

진우가 본래 머물던 숙소 근처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것은 일대를 온통 뒤지며 자신을 찾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눈치를 보니 숙소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짐은 이미 압수된 것 같았다. 간이 포털 장치는 짐과 함께 있던 배낭 안에 들어 있었다.

“쩝. 생각보다 경비대가 빨리 움직였네. 조금 시간이 있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되면 간이 포털 장치부터 먼저 찾아야 하나.”

자신이 만물의 벽을 붕괴시킨 것은 땅속에 몸을 묻고 있을 때였다. 봉쇄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만물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지만, 그것이 진우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나 증거는 없었다.

게다가 예상대로 투르가가 자신과 결투를 벌이기 위해 나타났고, 그 과정에서 자신으로 변신했던 헤이둑에 대한 암살 시도마저 있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누가, 무엇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 만물의 벽을 붕괴시켰는지 판단하기 애매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

진우는 대비를 하면서도 사실 플레비크 상급 전사가 자신을 암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타르코스가 주었던 정보에 의하면 암살이나 암습은 플레비크 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무아의 상태에 빠져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에 헤이둑을 자신으로 변신시켰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실제로 암습이 일어났다.

그것은 진우로서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는 알 수 없었지만 이티삿의 행동은 그의 주인인 투르가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진우는 이티삿의 돌발 행동이 자신에게 다소 유리하게 작용하리라고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피해자였다.

헤이둑을 자신의 모습으로 변신시켰던 것은 암습을 예상하고 준비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암습을 예상할 수 있었는지는 나중에라도 설명할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비를 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만물의 벽이 붕괴되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습격했고, 자신을 습격한 자들 가운데 한 명과 함께 사라진 뒤에는 둘이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워낙 주위를 진동시킬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기에 그 사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설마 이렇게 빨리 자신의 짐을 경비대가 압수했을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병사들의 움직임을 멀리서 지켜보던 진우는 자신의 배낭이 경비대장의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색을 하던 병사들끼리 나누던 잡담 속에 그런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누 술사와 함께 사라졌던 그 자는 도대체 누구였지?”

진우가 머물던 숙소 앞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 하나가 옆에 있던 동료에게 그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지. 죽은 이티삿 대신의 부하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절벽을 쉽게 뛰어올랐던 것으로 보아 사냥꾼인 것 같은데, 내무대신의 부하 중에 사냥꾼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 본 적이 없고... 만물의 벽이 무너진 다음에 지누 술사와 함께 사라졌으니, 둘 중에 하나는 붕괴와 관련이 있나 보지.”

“그런데 만물의 벽에 있던 암각을 그렇게 몽땅 가루로 만드는 게 가능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하지만 한 사람이 했든 여러 사람이 했든 만물의 벽이 무너진 건 사실이잖아. 그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면 누군가 범인이 있겠지.”

“그리고 지누 술사한테 화살을 쏜 놈들은 또 뭐야? 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낸들 아냐. 우리야 뭐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

그들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로 보아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하긴 자신 말고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이라도 아는 사람은 카딘과 헤이둑 일행 정도였다.

*  * * * *

경비대장의 사무실이 있는 만물의 벽 일대는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저희들끼리 일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비대 역시 갈팡질팡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만물의 벽 봉쇄를 책임지고 지휘하던 내무대신 이티삿이 오히려 진우를 암습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데다가, 그마저 심문 도중에 갑자기 죽어 버렸다.

죽기 전에 횡설수설하기는 했지만 그가 내뱉었던 말로 보아 진우를 암습하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이 다름 아닌 이티삿이라 점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를 현장에서 체포한 사람이 진우와 친하게 지내던 헤이둑 일행들이었다. 헤이둑 일행이 사실은 진범이거나 그의 협조자라면 이티삿의 체포 과정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한 마디로 누가 악당이고 누가 착한 사람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경비대로서는 도저히 독자적인 판단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사고가 터졌지만 달리 책임지고 일을 진행해 줄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사라진 진우를 찾기 위해 산을 수색할 인원조차 편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로부터 드디어 기다리던 통신이 전달되었다. 수도 제하이어의 치안대장인 모헨드로일로부터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는 진우와 그 일당을 당장 체포해서 수도로 압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 * * *

“아무래도 이대로 짐만 찾아서 사라지는 건 어렵겠는데.”

진우는 경비대장의 사무실 근처에 몸을 숨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무실 부근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내서 억지로 짐을 찾으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제압해야 했다. 그들을 제압하는 것 자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중에 카딘이나 헤이둑 일행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다.

진우가 그렇게 어찌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경비대 사무실에서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수도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금 즉시 술사 지누와 그 일행을 체포해서 수도로 압송하라는 지시다. 모든 병사들, 그리고 호위 의뢰를 맺은 사냥꾼들은 알마크 산을 수색해서 술사 지누와 술사 카딘, 그리고 사냥꾼 헤이둑과 그 일행들을 체포한다.”

진우는 숨어 있던 자리에서 가볍게 혀를 찼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매덤 행성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누가 명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카딘과 헤이둑 일행이 체포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로서는 사건이 미궁에 빠지기를 바랐고, 실제로 이티삿의 암습으로 인해 자신이 사라지면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일부러 투르가의 시체도 태워 없애버렸다. 그러나 일은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왕실의 누군가가 발 빠르게 움직이기로 작정했나 보군. 바바님이 다음 왕위에 오를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살짝 불안하기는 했지만...’

*  * * * *

“이게 무슨 짓이죠?”

카딘은 무기를 들고 자신들을 에워싼 병사들을 보며 그들의 뒤에 서 있는 경비대장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지누 술사와 관계된 인물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순순히 포박을 받으십시오.”

경비대장은 사무적인 어투로 카딘을 향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왕실의 일원이었다. 비록 체포 명령이 내려오기는 했지만 함부로 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무슨 이유로 우리를 체포한다는 겁니까?”

헤이둑이 나서서 그렇게 물었다.

“만물의 벽을 붕괴시킨 범인과 친하게 지낸 사람들에게 공모의 혐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누 술사와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비대장은 얼굴을 굳히고 그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헤이둑은 그 말을 할 때 상대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 역시 명령에 따라 하고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헤이둑은 아랫배와 턱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순순히 체포에 응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맹렬히 머리를 굴리며 침착한 목소리로 경비대장에게 따졌다.

“지누 술사가 만물의 벽을 무너뜨렸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 그건...”

사실 누가 만물의 벽을 무너뜨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만물의 벽이 붕괴되는 장면을 지켜보았지만 도대체 어째서 그것이 무너졌는지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그게 저절로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인지조차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헤이둑은 경비대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가 만물의 벽이 붕괴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지누 술사는 혹시 모를 암습을 대비해 저를 자신의 모습으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암습이 있었고요. 그 암습을 지휘했던 사람은 이티삿 내무대신이었습니다. 그를 잡아 심문했던 것도 바로 우리 일행입니다.”

헤이둑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아무 말도 않고 있던 미즈락이 나섰다.

“이티삿을 심문할 때, 경비대장님도 옆에서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심문이 끝나고 나서 그를 대장님께 넘겨드렸습니다. 그 뒤에 이티삿이 갑자기 죽었고요. 그 모든 과정을 함께 보셨으니 이번 일이 이티삿과 관계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우리를 범인으로 모는 이유가 뭡니까?”

미즈락은 일부러 경비대장을 물고 늘어졌다. 그 역시 경비대장이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진우와 자신들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경비대장은 미즈락의 추궁을 받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얼굴을 굳히더니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왕실에서 통신으로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번 일에 관계된 지누 술사와 그 일행을 모두 체포해서 제하이어로 압송하라는 지시였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헤이둑 일행의 뒤에 서 있는 카딘을 쳐다보았다.

“카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부의 지시에 따른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반항하면 모두 제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카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뒤에 서 있는 병사와 사냥꾼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사로잡아 압송하라.”

그의 지시를 받은 병사와 사냥꾼들이 앞으로 움직이자 헤이둑 일행도 할 수 없이 수중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때, 경비대장의 뒤에서 냉기가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안 되지.”

목소리에 담긴 기운이 매서웠다. 카딘과 헤이둑 일행을 향해 다가서던 병사와 사냥꾼들은 그 목소리에 담긴 기운만으로도 흠칫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경비대장 역시 깜짝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카딘과 헤이둑 일행을 포함해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애써 찾던 인물이 서 있었다.

진우가 결국 나선 것이었다.

경비대장은 예상치 못하게 자신들의 뒤에서 진우가 나타나자 잠시 허둥대었지만, 곧바로 다시 명령을 내렸다.

“술사 지누다. 저 자를 체포하라.”

하지만 그의 명령을 받은 병사와 사냥꾼들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우가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이미 그들의 몸속에 있는 마나를 동결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을 무시하고는 경비대장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통신으로 명령을 받았다고 했지? 도대체 그 명령을 내린 자가 누군가?”

태연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지만, 말 사이로 전해지는 마나의 기세가 엄청났다. 경비대장은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을 간신히 무릅쓰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모, 모헨드로일 치안대장이요.”

진우의 눈길이 카딘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경비대장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수도 제하이어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자에요. 작은 아버지의 사위죠.”

“그렇군.”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있는 크랄 왕이 급사했다.

자연히 다음 왕위 계승에 대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카딘은 왕위 계승 서열에 따라 그녀의 아버지인 바바가 즉위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정치와 권력에 관련된 일이란 그렇게 매끄럽게 돌아가는 법이 드물었다.

사실이 무엇인지 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치안대장이 벌써 이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자신을 빌미로 해서 바바의 왕위 계승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경비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들은 내가 데리고 가야겠어. 우리도 어차피 제하이어로 갈 예정이지만 그곳까지 꽁꽁 묶인 채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서툰 짓은 하지 말라고. 혹시 수도에서 또다시 통신이 오면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전해. 제하이어에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진우는 손을 들어 허공에 수십 개의 마나창을 만들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어 내리자 허공에 떠 있던 마나 창들이 쏜살같이 날아가 헤이둑 일행의 뒤에 있던 울창한 숲을 강타했다.

꽈과과광

폭죽이 연달아 터지는 것과 같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일대의 숲이 사라지고 흉측한 폐허로 변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경비대장은 물론, 동원되었던 병사와 사냥꾼들의 얼굴마저 핼쑥하게 변했다.

“그의 집이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전해.”

그 말을 마친 진우가 손을 내밀자 카딘과 헤이둑 일행이 재빨리 그가 있는 곳으로 건너왔다. 카딘은 비록 대성통곡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두 번이나 진우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서 달랜 다음에 일행을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에는 아직 동결된 마나가 풀리지 않은 경비대장 일행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뻣뻣하게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음냐.. 매덤 행성에서의 일은 아직 몇 회 더 남았습니다. 제가 이번 파트는 조금 오래 갈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서평까지 올라왔더군요. 관심을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