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73화 (173/235)

173화

“도대체 뭐가 무서워 땅속을 파고 들었던 게냐?”

투르가는 바닥을 뚫고 올라온 진우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띤 채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진우 역시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투르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도 이 먼 곳까지 와서 두더지 행세를 하느라 고생이었어. 하지만 헤이둑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아주 의미가 없는 짓은 아니었던 것 같아.”

“헤이둑?”

진우가 낯선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투르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진우가 씩 웃으며 뒤에 서 있던 헤이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나가 화살을 맞은 채 피를 흘리고 있던 진우를 덮쳤다. 그러자 그의 얼굴과 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이어 인상을 잔뜩 찌푸린 헤이둑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어어...? 저거 헤이둑 형님 아니야?”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신음하던 진우의 모습이 갑자기 헤이둑으로 바뀌자 보고 있던 미즈락이 소리를 질렀다. 카리엘 역시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카딘은 진우가 헤이둑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아침에 헤이둑님이 지누의 천막을 찾았던 것은 모습을 그와 똑같게 바꾸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이네요.”

“모습을 바꿔요?”

카딘을 말을 들은 카리엘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술사의 기술이에요. 본래 중급 이상의 술사들만 쓸 수 있는 기술인데, 저렇게 골격까지 바꾼 것으로 보아서는 확실히 지누님이 한 일인 것 같아요.”

“그럼 지누가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그랬다는 거예요?”

“저도 지누님이 어디까지 정확하게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최소한 만일의 사태에 대해 대비한 것 같기는 하네요.”

카딘은 진우가 만물의 벽을 봉쇄하는 동안 습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대비를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가 만물의 벽 전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것은 그녀로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당신은 우리 가문의 근거를 부정했군요. 바질라크님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이야...’

그가 만물의 벽을 무너뜨린 것이 서운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자신에게 그럴 생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섭섭한 것인지, 그녀로서도 스스로의 감정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로써 그와 자신의 관계가 훌쩍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딘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  * * * *

진우는 암각을 봉쇄하기 전날 밤까지 수련을 계속했다. 하지만 결국 한 번에 백 개의 암각을 동시에 파괴하기 위해서는 여유를 부리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완벽히 무아의 상태에 들지 않고서는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워 보였다. 문제는 그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느냐는 점이었다.

타르코스는 플레비크 인들이 실제 전투에서는 정면 대결을 선호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 말만 믿고 아무런 대비 없이 암각의 파괴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했다. 상대는 동조 단계에 든 상급 전사였다.

게다가 그게 하나일지 여럿일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진우에게는 잠시라도 좋으니 자신이 무아의 상태에서 깨어나 상대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진우는 할 수 없이 전날 밤에 헤이둑을 남게 해서 설득을 시도했다.

“나보고 너의 모습으로 변신을 해 달라고?”

헤이둑은 카딘이 돌아간 뒤에 진우로부터 뜻밖의 부탁을 받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변장이라도 하..... 아, 참 술사들에게는 자신이나 상대의 모습을 잠시 변화시키는 기술이 있다고 했던가?”

“네. 맞아요. 자신보다는 남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게 더 힘들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우는 차분하게 헤이둑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자칫하면 헤이둑을 위태로운 상황에 빠트릴 우려가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물의 벽을 붕괴시키는 동안에는 주변의 마나가 요동칠 정도로 많은 마나를 일시에 방출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 역시 쉽게 동조의 기술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그 자그만 기회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다만 헤이둑에게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계획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미안했다.

진우는 자신이 만물의 벽을 파괴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헤이둑에게 말하지 않았다.

*  * * * *

백 개의 암각을 동시에 파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것을 봉쇄하는 수준 이상의 마나를 일시에 주입해야 했다. 암각의 재질은 본래 마나를 받아들이거나 통과시키기에 적합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보통의 마나 전달체와 다른 것은 모든 마나에 대해 그런 성질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특별한 성질의 마나만을 통과시킨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물리적인 힘을 가해 암각을 파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암각 자체가 마나 저항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백 개나 되는 암각에 마나 창 같은 것을 만들어 일시에 때려보았자, 동시에 파괴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진우는 처음 매덤 행성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마나침을 만들어 암각 하나에 살짝 쏘아보았었다.

그 결과 암각의 바탕을 이루는 암반들이 의외로 상당히 강한 마나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암각의 성질에 맞는 마나는 쉽게 받아들이던 암반이, 성질이 다른 마나는 강하게 튕겨내었다.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부분적인 파괴야 가능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암각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될 것이라고는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동조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손에 마나 검을 만들어 암각을 하나씩 파괴한다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모든 암각을 부수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암각을 지키는 이들이 아무도 없을 때를 고르거나, 만물의 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모두 없애야 했다. 하지만 만물의 벽은 24시간 병사들에 의해 감시되고 있었고, 그렇다고 죄 없는 병사들을 모두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무아의 경지에 드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에 모든 암각을 부수는 방법 밖에 없다.’

암각의 바탕을 이루는 특수한 재질의 암반이 아무리 마나 투과력이 좋다고 해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이상의 마나를 일시에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 진우는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정을 이용해서 실험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계치 이상의 마나를 받아들인 수정들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진우는 비록 암반과 수정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그 성질은 비슷할 것이라고 보았다. 둘 모두 천재 술사 바질라크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물질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진우는 천막을 치고 암각을 살펴보는 척 하면서 손가락 끝에 마나를 주입시켜 암반의 일부를 살짝 떼어내는데 성공했다. 작은 조각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그 조각을 가지고 천막 안에서 시험해 본 결과 수정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다른 점이라면, 모듬 암각을 파괴하는데 드는 마나의 양이 어마어마하리라는 것뿐이었다.

*  * * * *

봉쇄 당일 아침, 약속대로 헤이둑이 홀로 그의 천막을 찾아왔다. 진우는 그에게 자신의 여벌옷을 입히고 술사의 기술을 이용하여 헤이둑의 모습과 골격을 자신과 똑같게 변화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천막 바닥의 땅을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예전에 지하의 연구실을 파고들었던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봉쇄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이미 만물의 벽 정 가운데까지 땅속을 통해 이동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변신한 헤이둑이 유데르하의 암각 앞으로 다가가기를 기다리며 명상에 들었다.

암각 모두에 대해 일시에 마나를 주입시켜 파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한 번에 백 가지의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마나를 운용할 수 있을 것, 그리고 그 모두가 버틸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마나를 주입할 수 있을 것. 진우는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땅속에서 순식간에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십분 정도의 시간 동안 만물의 벽에 있는 모든 암각의 암반을 내부로부터 동시에 붕괴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충분히 계산하고 준비했던 일이었지만 밖에서 들리는 경악에 찬 비명 소리 덕분에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만물의 벽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만물의 벽에 쏟아 붓던 마나가 더 이상 부드럽게 투과되지 않고 일반 암석과 다를 바 없이 저항하는 것으로 보아도 분명했다.

성공이었다. 그 바람에 몸에 지니고 있던 마나 기관의 마나가 거의 고갈될 지경에 이르기는 했지만.

그가 암각을 모두 붕괴시켰을 때 헤이둑이 화살을 맞았다. 그는 땅속으로 전해지는 기척을 통해 헤이둑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남아 있던 마나를 갈무리하고 지상으로 뚫고 나왔다. 그런 그의 앞에 사브남의 모습으로 변신한 투르가가 싸늘한 눈빛을 하고 서 있었다.

*  * * * *

“이제 그 어울리지 않는 변장은 그만 풀지?”

진우는 사브남의 모습을 하고 있는 투르가에게서 전해지는 강력한 마나의 기운을 느끼고 단번에 그가 플레비크에서 온 상급 전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투르가가 이미 자신의 마나에 대한 제어를 풀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투르가는 픽 웃더니 자신의 몸을 유지시키고 있던 마나를 해제시켰다. 그의 몸에서 투두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매덤 행성인으로 변신했던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플레비크 전사로 변했다.

아직도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보고 있던 매덤 행성인들의 입에서 또다시 경악에 찬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괴물같이 생긴 자식은 또 뭐야? 오늘 도대체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군.’

미즈락은 자신으로서는 처음 보는 낯선 몰골의 인물이 등장하자 속으로 혀를 차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진우와 투르가를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심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 맹렬하게 퍼져나오는 강력한 마나의 기운으로 인해 모두들 숨막히는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은 가운데 오로지 진우와 투르가만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  * * * *

“나와 싸울 건가?”

진우가 투르가를 향해 말하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이 보잘 것 없는 행성에서 몇 달을 보냈겠나?”

“혼자 온 건가?”

진우는 그 질문을 하면서 속이 타는 것을 느꼈다. 무심한 듯 물었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투르가는 엷은 냉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너는 아직 니코레임의 레비스에 비하기에는 부족하니까. 왜? 다른 전사들이 더 필요할 것 같은가?”

진우는 상대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투르가를 향해 도발에 가까운 말을 던졌다.

“자신 만만하군. 혼자서 이길 자신은 있고?”

그의 말을 들은 투르가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바꾸어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프레일은 네가 쓰러뜨렸나?”

“그래. 제법 신중한 친구였어. 꽤 고생을 하긴 했지만 간신히 이길 수 있었지. 덕분에 좋은 기술도 배우고 말이야.”

“그렇군. 하지만 이번에는 운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너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고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구나.”

투르가의 말을 들은 진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종속의 낙인이라는 말이 그를 자극한 것이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만물의 절벽 위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싸우고 싶다면 나를 따라와라.”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면 주변에 있는 매덤 행성인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 분명했다. 프레일과 싸울 때만 하더라도 약탈의 계곡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던 경험이 있었다.

자신과 상대의 싸움은 아마 일대를 거의 초토화시킬 것이 분명했다. 진우는 투르가를 만물의 벽 뒤편에 있는 알마크 산의 골짜기로 유인하기로 했다.

그가 몸을 날리는 것을 본 투르가는 주변을 힐끗 둘러보더니 진우를 따라 몸을 날렸다.

“주변의 허접한 쓰레기들을 신경 쓴다라... 그렇다면 너도 아직 제대로 된 전사는 아니로군.”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절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매덤 행성인들은 아직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흉악한 모습을 한 존재는 도대체 사람인가 괴물인가? 그것이 그들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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