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71화 (171/235)

171화

기지개의 달이 되었다. 만물의 벽 주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굳이 날짜를 따지지 않아도 눈으로 보이는 확연한 증거로 인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만물의 벽에 조각되어 있는 마수의 암각은 본래 황갈색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불그스름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암각의 색은 불그스름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그 기간이 지나기 전에 마나를 주입시켜 봉쇄에 성공하면 암각의 색은 다시 본래의 황갈색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봉쇄에 실패한 암각으로부터 일제히 마나가 방출될 수밖에 없었다.

마나 방출을 마친 암각의 색도 황갈색으로 변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봉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분간 마나가 방출된 암각에 해당하는 마수의 수가 늘어날 테니까.

*  * * * *

봉쇄가 시도될 것이라고 발표된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때, 만물의 벽 정면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커다란 천막이 하나 세워졌다. 진우의 요청으로 세워진 그 천막이었다. 봉쇄 장면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접근이 금지된 천막을 멀리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지누 술사라는 사람이 지금 저 천막 안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면서?”

“그래. 봉쇄에 들어가기 전에 저곳에 머물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나를 가다듬는다고 하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계속해서 명상을 하고 있대. 허락한 사람들 말고는 일체 천막에 접근을 못하게 한다더군.”

“특이하네. 그렇게 명상을 하는 게 봉쇄에 도움이 될까? 오히려 기력이 딸려서 쓰러지는 거 아냐?”

“모르지. 한 번 안에 들어가서 뭘 하는지 봤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천막 근처에는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지키고 서 있었다. 진우는 이틀 동안 천막 안에 머물면서 밖으로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오로지 헤이둑 일행과 카딘만이 천막을 드나들 수 있었다.

봉쇄가 시작되기 전날 밤에도 카딘과 헤이둑이 천막을 찾았다.

“준비는 잘 된 거야?”

이미 십 여일 전에 만물의 벽에 도착했던 카딘이 여전히 명상을 하는 자세로 앉아 있던 진우를 향해 물었다. 진우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조금 힘은 들겠지만 별 문제는 없을 거야.”

하지만 카딘은 진우의 여유 있는 웃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그녀는 진우가 단순히 만물의 벽을 봉쇄하는 것 이외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굳이 상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굳이 한 번에 일을 끝내려고 할 필요는 없어. 하루에 몇 개씩만 봉쇄해도 시간은 충분해.”

진우는 그녀의 말에 별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씩 웃기만 했다.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가 만물의 벽 암각을 완전히 부숴버리려면 한 번에 그 일을 끝내야했다. 눈앞에서 암각을 이루고 있던 바탕의 암석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경우,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백 개의 암각을 한꺼번에 모두 부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그는 연회를 마친 뒤에 계속해서도 마수 모양의 수정을 가지고 연습했다. 그 연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 개의 수정 모두에 동시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끔은 성공할 때도 있긴 했다. 하지만 안정적이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무아의 상태까지 들어서야 할지도 몰라. 문제는 플레비크에서 온 전사가 그런 나의 모습을 그냥 두고 보겠느냐는 거지.’

동시에 백 개의 암각에 마나를 주입하기 위해서는 진우도 주변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명상에 몰입해야 했다. 그럴 경우 그는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외부로부터 갑자기 공격을 받으면 그로서도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만물의 벽 봉쇄는 매덤 행성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지만, 정작 그 일을 맡은 진우 자신에게는 수련의 일환에 불과했다.

중요한 수련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동시에 백 개의 암각 모두를 부수는 데 실패할 경우 나머지 암각에 대해서 재차 파괴를 시도해야 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마나 자체가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암각이 부서져 내린다면, 지켜보고 있던 글로다이트의 대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대동한 병사나 사냥꾼들을 이용해서 진우의 행동을 막아서려고 할 게 틀림없었다. 그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진우에게 두 번째 기회란 없었다.

‘누가 플레비크에서 온 전사인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만물의 벽에 도전하기 전에 미리 그와 승부를 겨루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잖아도 진우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 대해 마나 탐색을 실시했었다. 하지만 플레비크 전사로 짐작되는 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진우가 나타난 때부터 지금까지 투르가는 스스로 자신의 마나를 제어해 외부의 탐색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조 단계에 들면 그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진우는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마나 탐색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투르가의 행동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헤이둑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카딘을 달래 먼저 돌려보냈다. 그 뒤에 헤이둑을 붙잡고 긴밀하게 뭔가를 상의했다.

헤이둑은 카딘이 돌아간 뒤에도 한 시간 가량 더 천막에 머물렀다가 비로소 숙소로 돌아갔다. 그마저 돌아가자 천막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만물의 벽 봉쇄를 코앞에 두고 매덤 행성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 * * *

그 시각 이티삿은 투르가의 숙소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이티삿이 투르가의 상관이었지만, 둘 만이 함께 한 자리에서 차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이티삿이었다.

자신이 따라준 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보이는 진우의 천막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투르가를 향해 이티삿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주인님. 주인님의 실력이라면 그냥 지누라는 술사를 처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잠시 고개를 돌려 이티삿을 바라보던 투르가가 실소를 터트렸다.

“왜? 내가 너무 조심스럽게 일을 꾸민다는 생각이 드는 거냐?”

그러자 이티삿이 그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을 했다.

“이곳의 사냥꾼들도 마수를 상대할 때는 미리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는 합니다. 그들은 본래 마수들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인님이라면 굳이 그런 준비를 하지 않아도 술사 지누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감히 여쭈었습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노예가 된 이후로 이티삿은 투르가에게 길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을 묻고, 시키는 대로 수행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일이면 자신의 주인과 지누라는 술사 간에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만 평소와는 달리 마음속에 있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입을 열어 말을 하다 보니 도중에 공연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투르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전사는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한다. 같은 플레비크 전사들 가운데에서도 나와는 생각을 달리 하는 자들도 있기는 해. 오직 정정당당한 승부만을 고집하는 전사들이 많지. 나도 한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을 했던 적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티삿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두운 매덤 행성의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플레비크는 본래 문명이 그다지 발달한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저 하늘 바깥에 다른 외계인들이 살고 있는지도 몰랐지. 그저 날마다 전사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승패를 가르고, 누가 주인이 되고 누구를 노예로 삼을 지만 정하며 살았지.”

그런 플레비크 인들로 하여금 우주 밖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에 다른 행성에서 방문한 외계인이었다. 그는 매우 강한 상급 전사였다. 처음으로 플레비크를 방문한 그 외계인에게 당시 플레비크 행성을 지배하던 다섯 명의 상급 전사들이 차례로 도전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플레비크의 지배자들이 모두 패배하자, 그들의 전투를 목격한 모든 플레비크 인들이 관례대로 외계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새로이 성립된 것을 인정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복종의 자세를 일별한 그 외계인은 플레비크 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종속의 낙인을 찍지 않았다.

사실 그는 종속의 낙인을 찍는 방법조차 몰랐다.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수많은 플레비크 인들을 향해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정말 싸움 밖에는 할 줄 모르는구나. 이긴 자에게만 자유가 부여되고,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니. 그게 너희들의 본성이기는 하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우주는 넓다.

생물이 존재하는 행성마다 살아가는 법도 모두 다르지. 너희가 이곳에서의 삶의 방식에만 얽매이지 말고 조금 다른 세상에도 눈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는 그 말만을 하고 플레비크 인들을 노예로 거두는 것을 거부한 채 그대로 떠났다. 심지어 패한 이들을 죽이지도 않았다.

“그는 착한 외계인이었던 겁니까?”

투르가의 말을 들은 이티삿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투르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착하냐고? 당시의 플레비크 인들은 모두 어이가 없었지. 그리고 치욕에 몸을 떨었다. 승자가 자신의 권리를 챙기지 않는 것이 패자에게 얼마나 모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는지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승자의 노예가 되지 못한 패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플레비크 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마치 영혼이 없는 시체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아. 그 외계인은 잘난 듯이 떠벌였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다른 행성인들의 삶의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오만한 강자에 불과했던 거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하던 투르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티삿을 쳐다보았다. 이티삿은 그의 눈에 사나운 살기가 맺힌 것을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떠난 뒤로 수많은 플레비크 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의 싸움에는 그저 한 번 솜씨나 겨뤄보자는 식의 어설픈 연습 따위는 없어. 싸움에서 지면 노예가 되든지, 아니면 죽는 거지. 그런데 분명히 싸움에서 졌는데, 노예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버린 거야. 많은 전사들이 그 괴리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런 플레비크 전사들에게 남은 감정은 증오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꺾기만 하고 그냥 떠나버린 외계인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가 노예로 삼기는 싫으니 그냥 죽으라고 했으면, 그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자는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고, 패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외계인이 플레비크 행성을 떠난 뒤에 남은 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지. 십 년쯤 지났을 때에 새로운 외계인이 찾아온 거야. 그는 전에 플레비크의 지배자들을 이기고 떠난 그 외계인으로부터 재미있는 행성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말했지. 그리고 전사들에게 다시 싸움을 해보자는 제의를 했다.”

“그.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티삿은 말을 하는 동안 투르가의 음성에 실린 살기가 점점 짙어지자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고 그 다음 이야기를 물었다. 왠지 주인의 독백에 가까운 이야기를 계속 들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과, 술사 특유의 호기심이 그를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다섯 명의 지배자가 한꺼번에 그를 공격했다. 뻔한 일이 발생했지. 우리에게 장난 비슷한 싸움을 걸어왔던 그 외계인은 순식간에 갈가리 찢겨 죽고 말았다.”

거기까지 말한 투르가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씁쓸한 느낌이 말하는 사이사이로 진하게 배어나왔다.

“그것이 플레비크 인들이 저지른 최초의 일탈이었다. 한 명의 상대에게 다섯 명의 상급 전사가 함께 공격하다니. 이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고,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

문명이 발달한 외계 행성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주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그곳에 사는 종족들을 탐사하는 이들이 있었다. 처음 플레비크를 찾아왔던 외계인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플레비크를 떠나 다른 행성을 탐사하다, 자신들처럼 고도의 문명을 발달시킨 행성을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만난 이들에게 플레비크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동조 단계의 전사 하나가 호기심에 플레비크 행성을 찾아왔다가 어이없게 변을 당했던 것이다.

“당시에 죽음을 당했던 외계인 역시 상급 전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상급 전사라고 해도 비슷한 수준의 전사 다섯 명이 합공을 하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

죽음을 당한 외계인의 짐 속에는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지고 있던 간이 포털 장치가 있었다. 그의 짐에서 그것을 찾아낸 플레비크 인들은 미리 좌표가 설정되어 있던 그 장치를 이용하여 자신들을 찾아왔던 외계인의 행성으로 거꾸로 침공을 해 들어갔다.

최초의 침입자가 된 플레비크의 상급 전사들은 그 외계인의 고향 행성을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새로운 간이 포털 장치가 확보될 때마다 더 많은 플레비크 인들이 이동해왔고, 결국 그 행성은 완벽하게 플레비크 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갑자기 노예의 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덕분에 침공에 가담했던 플레비크 전사들 역시 급격하게 강해졌지. 그곳에서 노예로 삼은 원주민들을 통해 플레비크 인들의 문명 수준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어. 최초의 행성을 정복한 지 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스스로 포털 장치를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이 이번에는 플레비크 인들을 변화시켰다. 단순한 전투 종족이었던 그들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본래의 모습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투 종족이라는 본질은 여전했고, 싸움에서 패배시킨 상대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싸움의 방식이 달라지고, 전투 그 자체보다는 승리에 집착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가 프레일에게서는 비교적 약하게 나타났다면, 투르가에게서는 다소 심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었다.

“플레비크 인들은 스스로 포털을 만들 수 있게 되자 본격적으로 수많은 행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는 처음부터 최초에 우리를 방문했던 그 외계인의 행성을 침략해서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우리가 받았던 수모를 되갚아주자는 것이었지.”

그러나 그곳의 좌표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플레비크 인들이 결국 자신들을 쓰러뜨렸던 그 외계인이 살던 행성을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도 수백 년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그때는 플레비크 인들조차 본래의 조상들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진 뒤였다.

“우리는 그곳을 찾아낸 다음에 행성을 완벽하게 파괴하지 않고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들의 문명을 파괴하지 않고 흡수하는 쪽을 택했던 거지. 일부가 자신들의 고향을 버리고 탈출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뒤쫓지 않았다.

우리가 예전에 당했던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동안 치욕을 곱씹게 하고 싶었던 거야.”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이티삿이 고개를 살짝 들고 투르가에게 물었다.

“최초에 플레비크를 찾아왔던 그 외계인이 도대체 누구였습니까?”

그러자 투르가가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마치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을 니코레임에서 온 마스바로크라고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