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69화 (169/235)

169화

술사 선발 대회의 본선이 모두 끝나고 공식적으로 최종 결과가 발표되었다.

“마수 파릴로부터 마수 유데르하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벽에 있는 백 개의 암각 모두를 봉쇄할 대표로 글로다이트 국의 술사 지누가 선발되었음을 알립니다.”

심사위원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경기장을 진동시켰다.

“올해의 대표는 술사 지누 한 명입니다. 그가 유일한 대표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술사 지누는 앞으로 나와 영명하신 크랄 전하에게 예를 표하시오.”

심사 위원장의 말이 끝나자 진우는 대기석의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그를 향한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는 진우가 단상에 앉아 있던 글로다이트 국왕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국왕 역시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진우는 심사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왕의 앞으로 나아가 그로부터 대표로 선발되었음을 입증하는 증명서와 함께 작은 열쇠를 받았다. 만물의 벽을 봉쇄할 대표로 선발된 이들에게 내리는 신형 아틀리의 열쇠였다.

매년 대표로 선발된 모든 이들에게 신형 아틀리를 한 대씩 수여하는 것이 선발 대회의 관례였는데, 올해는 진우가 유일한 대표로 선발되는 바람에 수여되는 아틀리 역시 한 대뿐이었다.

국왕은 진우에게 몇 마디 축하와 격려의 말을 전하고는 곧 자리를 떠났다. 진우는 그에게 다가서기 전부터 생각 외로 한 나라의 국왕에게서 제법 강한 마나가 느껴진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글로다이트가 술사의 나라라고 하더니 국왕조차 상급 술사일 줄은 몰랐군.’

진우는 마나 탐색을 통해 슬쩍 국왕의 마나를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국왕은 경기장 밖으로 사라졌다. 국왕이 자리를 뜨자 진우는 자신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관객들을 향해 돌아서서 두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최고다, 지누.”

“글로다이트의 영웅!”

“만물의 벽을 때려 부숴라.”

관객들은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그의 인사에 열렬하게 화답했다. 어떤 관객은 진우가 내심 품고 있던 생각과 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가슴이 뜨끔하기도 했지만, 그는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관객석에 앉아 진우를 향해 손을 흔들던 카딘은 그의 웃음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 *

공식적인 술사 선발 대회가 모두 끝난 뒤에도 대회를 주관했던 내무부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진우가 유일한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마수 하나당 암각을 봉쇄할 예비 대표들을 한 명씩 추가로 선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만물의 벽에 있는 모든 암각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진우가 비록 대단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상식적으로 그 혼자만의 힘으로 암각들을 전부 봉쇄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에서 진우가 마나 부족으로 암각의 봉쇄에 실패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예비 대표들이 필요했다.

지명을 당한 술사들은 대부분 자신이 예비 대표로 지명되었다는 것에 대해 크게 자존심이 상해하지 않았다. 그만큼 올해 대표로 선발된 진우의 역량은 이미 자신들이 시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점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회가 끝난 이틀 뒤에 술사 선발 대회가 무사히 끝난 것과, 대표로 뽑힌 술사들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왕궁에서 열렸다. 유일한 대표로 선발된 진우는 당연히 초대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예비 대표로 선발된 술사들도 빠짐없이 연회에 참가했다.

그들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앞을 다투어 진우를 찾아와 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같은 술사로서 진우와 친해지는 것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너나없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연회에 참가해 진우의 옆에 서 있던 카딘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인사하며 연신 추켜세우느라 정신이 없자,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계속 방실거리며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카딘 아가씨가 아무래도 지누님을 좋아하는 것 같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자베의 아내 아비아가 자신의 남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하긴 내가 카딘이라도 저런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거야. 글로다이트 최고의 사냥꾼에다가 이제는 행성 전체에 이름을 알린 술사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얼굴도 저만하면 잘 생겼지, 나이도 젊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

세자베의 말을 들은 아비아가 쿡 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았다.

“왜 웃어?”

“보통은 오빠들이 자기 여동생을 넘보는 남자들을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아가씨보다 더 지누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그러자 세자베도 웃음을 터트렸다.

“카딘도 이제 시집을 갈 나이가 지났잖아. 지누 정도면 번쩍 들어서 가져다 맡겨도 상관없지. 아마 아버지도 둘이 결혼한다고 하면 기뻐하실 걸?”

“다행이에요. 그동안 여러 가문에서 혼사가 들어와도 한결같이 콧방귀만 끼던 아가씨잖아요. 오래 기다린 덕분에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그때 세자베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아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지누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했지? 들은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글쎄요. 그러고 보니 저도 그런 얘기는 못 들었던 것 같네요.”

“그래?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지누에 대해 모르는 게 많군. 그를 키운 스승의 이름도 모르잖아?”

*  * * * *

술사들의 인사가 끝난 뒤에는 글로다이트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선발 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왔던 고관대작들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매덤 행성의 여러 가지 의례 절차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던 진우는 카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큰 결례를 하지 않고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고 있는 것처럼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많이 힘드세요?”

카딘은 선발대회 본선에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가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힌 채 사람들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는 킥킥거렸다. 실제로 진우는 연회가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체력적인 문제보다는 정신적으로 아주 피곤해 죽겠어.”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카딘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인사도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잠시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쏘였으면 좋겠네.”

진우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슬쩍 훔쳐내며 그렇게 말하자, 카딘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 있으면 전하가 오실 거예요. 밖으로 나가는 것은 일단 전하가 입장한 후에 하는 것이 좋아요.”

카딘이 그렇게 말하자 진우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런 그를 본 카딘이 다시 한 번 웃으며 슬쩍 그의 팔짱을 꼈다.

진우는 순간 흠칫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카딘을 보고는 차마 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가 속으로 지구에 남아 있는 소현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연회장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글로다이트의 지배자이자 모든 술사들의 고향을 다스리는 자비롭고 영명하신 군주, 크랄 전하의 입장이십니다.”

글로다이트의 왕이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알리는 시종장의 외침이 있자 카딘은 진우의 팔을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풀고 궁전 안쪽으로 나 있는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차며 홀 안쪽을 바라보자 잠시 후 내무대신인 이티삿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대동하고 크랄 국왕이 나타났다.

“모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십시오.”

시종장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국왕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크랄 국왕은 신하들의 수행을 받으며 연회장에 들어서더니 홀의 상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가 착석하자 비로소 사람들의 허리가 펴졌다.

국왕은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참석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카딘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우에게서 멈췄다. 그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 몇 마디를 건네자 시종장이 몸을 돌려 진우를 향해 소리쳤다.

“술사 대표로 뽑힌 지누는 앞으로 나와 전하의 하문에 답하도록 하라.”

자신을 지목하는 소리가 들리자 진우는 당황해서 카딘을 살짝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딘이 낮은 목소리로 진우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전하의 앞으로 걸어가서 허리를 숙여 다시 인사하고 그 자세로 자신을 소개하세요. 그러고 나서 허리를 펴면 전하의 질문이 있을 테니 고개를 들지 말고 묻는 대로 대답하시면 되요.”

진우는 카딘이 일러준 대로 크랄 국왕의 앞으로 나아가 그의 면전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크랄 국왕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번에 술사 대표로 선발된 지누인가?”

“예. 그렇습니다.”

“우리 글로다이트에서 자네같은 인물이 나오다니 짐의 마음이 몹시 기쁘다. 그런데 듣자하니 그대는 본래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어느 나라 출신인가?”

진우는 국왕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다. 자신이 지구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스승님의 밑에서 자랐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스승님의 손에 맡겨졌기 때문에 본래의 출신이 어느 곳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스승님이 멜라빈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 출신이라 말도 그곳에서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멜라빈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사실 헤이둑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그곳은 매덤 행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라 중에서도 인구가 십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라였다.

워낙 작은 나라여서 이번 술사 선발 대회에서도 단 한 명의 술사조차 파견하지 못한 곳이었다. 진우는 그렇게 작은 나라의 말을 아는 사람들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급히 그렇게 꾸며대었다.

크랄 국왕은 진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사실상 자네가 속한 나라는 달리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대가 술사와 사냥꾼 자격증을 얻은 이 나라의 백성으로 계속 살아갈 생각이 있다고 믿어도 되겠는가?”

물론 진우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만물의 벽을 파괴하고는 곧바로 다시 지구로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일단 왕의 질문에 허리를 더욱 숙이며 대답했다.

“자비롭고 영명하신 전하의 허락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로다이트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크랄 국왕은 만면에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허락한다. 글로다이트는 본래 술사의 나라다. 자네같이 뛰어난 젊은이가 글로다이트의 백성이 되겠다는데 내가 어찌 허락하지 않겠느냐. 오늘부터 술시 지누는 글로다이트의 백성임을 내가 증명하노라.”

그러자 연회석 전체에서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물론 그것은 형식적으로 진우가 글로다이트의 국민이 되었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의 결정을 칭송하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딘과 그의 오빠 세자베는 진심으로 진우가 글로다이트의 일원이 된 것을 기뻐하는 뜻에서 열심히 박수를 쳤다.

“잘 됐네요. 그의 출신국이 따로 없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에요.”

아비아는 환하게 웃으며 세자베를 향해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게. 그나저나 도대체 그를 가르친 스승이라는 사람은 어떤 분이었을까? 지누가 술사의 기술을 배운 것은 카딘을 통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전에 사냥꾼과 술사 모두의 기술을 익힐 수 있는 마나 운용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가 술사가 될 수는 없었을 거야. 지금도 살아 있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데 말이야.”

지구에 있는 조승운이 들었으면 귀를 후벼 팠을 소리였다.

*  * * * *

진우의 대답을 듣고 흡족해하던 크랄 왕은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가져오라.”

그의 말을 들은 시종 하나가 조그만 상자를 받쳐 들고 진우를 향해 걸어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그대가 이제 글로다이트의 백성이 되어 새로이 가문을 일으켜야 하니 그 기념으로 ‘엘리하의 눈’을 내린다. 그것을 잘 간직해서 가문의 상징으로 삼도록 하라.”

크랄 왕의 입에서 ‘엘리하의 눈’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우가 허리를 깊이 숙인 채로 상자를 받아 뚜껑을 열자 안에서 자두만한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약간 길쭉한 투명한 보석의 한 가운데에는 맑고 푸른색의 또 다른 보석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여신의 푸른 눈과 같다고 해서 ‘엘리하의 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보석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글로다이트 왕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보물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보석이었다.

보석을 받은 진우가 다시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에 물러나오자 크랄 왕은 잠시 후 연회장을 떠났다. 떠나는 그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옆에서 그를 보고 있던 카딘은 이들 전의 경기장에서 보았던 진우의 어색했던 표정이 생각나서 잠시 의아했지만 그때부터 다시금 왁자지껄한 연회가 시작되는 바람에 그 사실을 잊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