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진우가 혼자 선택했던 열두 개의 석판에 대한 마나 주입을 모두 마치자 본격적으로 술사들의 본선 경쟁이 시작되었다. 두 명 이상의 술사들에 의해 선택된 마수의 석판에 차례로 도전하는 이들의 표정은 자못 긴장되어 있었다.
경기장 안에 마련된 대기석에 줄을 맞춰 앉아 있던 술사들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선택한 석판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석판에 순서대로 마나를 주입하고, 석판의 색깔을 바꾸는데 성공하면 변한 석판의 색깔이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에스토어 국 출신의 술사 나르함, 팜토램 석판 마나 주입 완료시간 8분 23초, 변화 유지 시간 14분 12초.”
“완샴 국 출신의 술사 리트하일, 도니 석판 마나 주입 완료시간 9분 2초, 변화 유지 시간 7분 24초.”
“시엔데 국 출신의 술사...”
그들의 도전 결과가 심사위원에 의해 기록되고, 다시 확성기를 통해 관객석에 알려질 때마다 술사들의 입에서 저마다 탄식과 환호가 교차되었다. 일부 술사들은 너무 긴장한 탓인지 석판의 색을 변화시키는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났다.
반면에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은 술사들은 체면도 잊고 제자리에서 두 팔을 높이 들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진우처럼 여러 개의 마수에 동시에 도전한 이들은 편의상 순서가 뒤로 밀렸다. 그 때문에 백 가지의 마수 모두에 대해 도전을 신청했던 진우는 다른 술사들에 대한 심사가 모두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함께 대기석에 앉아 있던 다른 술사들이 진우를 향해 힐끔거리는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유일하게 백 개의 석판 모두에 도전한 그를 무모한 놈이라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들이 많았다.
반면에 예선에서 전체 1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둔 그를 노골적으로 의식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내 중복 신청자가 가장 적어서 다른 술사들의 도전이 일찍 끝난 석판부터 진우에 대한 심사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진우는 차분하게 앞으로 나가 이미 다른 참가자들의 도전이 끝난 석판 위에 한 손을 얹었다. 그의 몸속에서 변화와 조합이 끝난 마나가 물밀 듯이 석판 안으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글로다이트 국 출신의 술사 지누, 엘피로이드 석판 마나 주입 완료시간 1분 13초, 변화 유지 시간 34분 17초.”
“아아....”
그의 도전 결과가 발표되자 앞서 엘피로이드 석판에 마나를 주입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앉아있던 다른 술사들의 입에서 일제히 안타까움에 가득 찬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석판 색깔의 변화 유지 시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색깔 변화를 완료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게다가 변화의 유지 시간 역시 가장 길었다. 아예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진우를 향한 다른 술사들의 눈초리가 더욱 따가워졌다.
석판을 변화시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마나의 성질을 조합하고 그것을 운용하는 능력에 따라 개인차가 심하게 나타났다. 진우는 이미 동조 단계에 든 헌터였다.
비록 술사들의 기술이 사냥꾼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해도 수준차가 너무 컸다. 그의 마나 운용 능력은 처음부터 다른 술사들과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보다 앞서 엘피로이드 석판에 도전했던 술사들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을 기록했던 이의 결과가 5분이 넘었다. 그 점을 감안하면 진우가 1분이 조금 넘는 시간 안에 석판의 색깔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은 반칙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것은 그가 지닌 마나 운용 능력이 다른 술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반면에 마나 유지 시간은 주로 주입하는 마나량에 의해 달라졌다. 진우는 일부러 전력을 기울여 마나를 주입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마나량이 엄청났기에 특별히 마나 고갈을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여유를 두었던 것이다.
그는 다만 앞선 술사들의 기록을 약간 상회할 정도의 마나만 석판에 주입시켰다. 엘피로이드 석판의 경우 앞선 술사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석판의 색깔을 변화시켰던 이의 기록이 30분 정도였다.
진우는 마나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여 자신이 변화시킨 석판의 색깔이 그것보다는 조금 더 오래 유지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론의 여지없이 엘피로이드 석판을 봉쇄할 대표로 최종 선발될 수 있었다.
경쟁자들과 함께 도전했던 첫 석판에 대한 마나 주입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차례대로 다음 석판으로 이동해서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나갔다.
“글로다이트 국 출신의 술사 지누, 타이롤 석판 마나 주입 완료시간 1분 07초, 변화 유지 시간 22분 34초.”
“글로다이트 국 출신의 술사 지누, 웬드마티랄 석판 마나 주입 완료시간 58초, 변화 유지 시간 43분 51초.”
“글로다이트 국 출신의 술사 지누, 도니 석판 마나 주입 완료시간 ......”
그가 다른 술사들에 의해 먼저 도전이 완료된 석판들에 하나씩 마나 주입을 마칠 때마다 원형 경기장 내의 대기석에 앉아 있던 술사들의 탄식이 점점 깊어져 갔다. 반면에 관중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의 놀라움은 점점 커져갔다.
진우가 봉쇄 대표로 선발된 마수의 수가 오십 개를 넘어 육십 개에 가까워질 때쯤 해서는 드디어 관객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하나씩 새로운 석판에 대한 도전을 마칠 때마다 요란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이들은 발을 구르며 그를 응원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본선 경기 시작 전에 자신들이 야유를 퍼부었던 이 젊은 술사의 실력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비웃음과 조롱에서 출발했던 목소리들이, 시합이 진행될수록 조금씩 감탄으로 변하더니 급기야는 경이와 찬양으로 바뀌었다.
“우와, 대단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예선전이 끝났을 때 글로다이트 역사 이래로 최고의 술사가 나온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솔직히 그때는 나도 지나친 과장이라고 코웃음을 쳤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까 글로다이트가 아니라 행성 전체 역사에서도 최고인 거 아니야?”
“젊은 친구가 대단하네. 저 나이에 도대체 무슨 수련을 어떻게 했기에 벌써 저 정도인 거야?”
본선이 진행되는 동안 진우는 어느덧 육십 개가 넘는 석판에 대한 도전을 완료했고, 도전한 모든 석판에 대해 봉쇄 대표로 선발되는데 성공했다. 도전하는 모든 석판마다 다른 참가자들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결과만을 내자 지켜보고 있던 경쟁자들의 속이 타들어갔다.
그의 도전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은 오직 진우의 마나가 고갈되어 더 이상 도전을 계속할 수 없다는 선언이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설마 백 개 전부를 다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지?”
대기석에 모여 있던 술사들 가운데 같은 나라 출신의 대표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그런 말들을 소곤거렸다.
“당연히 그렇겠지. 슬슬 마나가 떨어질 때가 되었어. 저 친구가 우리 석판에 도전하기 전에 포기 선언을 했으면 좋겠는데...”
말을 않고 가만히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술사들의 심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우의 마나가 부족해지는 것뿐이었다.
석판을 변화시키는 속도가 여전히 1분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나 운용 능력이 둔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가 마나를 조합하고 그것을 발현시키는 실력은 이미 자신들이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우가 79개를 넘어 80 번째의 석판에 대해 도전을 시작하자 조만간에 그의 마나가 고갈되어 도전을 멈추게 되리라는 희망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대신에 과연 백 개의 석판 모두에 대해 대표로 뽑힐 수 있을 것이냐는 기대가 경기장을 채우고 있는 관객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다른 술사들은 이미 석판에 대한 도전을 모두 마치고 대기석에 앉아 관객이 된 심정으로 진우의 도전을 지켜보았다.
“이제까지 최고 기록이 몇 개였지?”
“글쎄. 한 삼백 년 전에 81개까지 혼자서 봉쇄시키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관객석에서는 만물의 벽 봉쇄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과거의 기록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니코레임 출신의 첼스본이었다.
첼스본은 매덤 행성에서 수련할 때 가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미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에 행성 전체를 놀라게 했던 그의 기록과 관련해 여전히 그가 사용했던 가명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 * * * *
“91번째 석판입니다.”
이티삿은 진우가 쉬지 않고 새로운 석판에 도전하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주인인 투르가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통해 그 역시 젊은 친구의 실력이 대단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가 드디어 마지막 10개의 석판만을 남겨둔 상황이 되자 설마 설마 하던 그도 적잖이 긴장이 되는 한편 기대가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힐끗 쳐다본 투르가가 피식 웃었다.
“이대로 가면 백 개의 마수 암각 모두를 봉쇄시킬 대표로 뽑히는 것도 가능하겠지?”
이티삿은 새로운 석판 앞으로 다가가는 진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땀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었다. 여력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아직 크게 지쳐보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봐도 그래. 하지만 실제 암각을 봉쇄하는 일은 저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야. 만약을 대비해서 기지개의 달에는 암각마다 봉쇄를 할 예비 술사를 한 명씩은 준비하는 게 좋을 걸?”
“이미 그렇게 지시를 해 두었습니다.”
이티삿이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투르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투르가는 이티삿의 말에는 별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마나량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려울 것 같군. 저렇게 지치는 기색조차 없어서는 판단하기가 조금 애매해. 결국 만물의 벽에 가서야 녀석의 마나량을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긴가? 생각보다 마나가 많은 것 같아.’
투르가는 문득 벨푸와 노르호지라는 플레비크 상급 전사 두 명의 협공을 받고서야 쓰러졌다는 니코레임의 영웅 레비스를 떠올렸다. 그로서는 기록과 영상을 통해서만 보았던 전투 장면이었지만, 당시 그는 레비스에 대해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오직 승리만을 추구하던 그로서도 화면에 비친 싸움을 보고서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현재 니코레임을 지배하고 있는 두 명의 상급 전사와 레비스가 벌였던 전투에는 천생 전사인 플레비크 인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치열함이 있었다.
‘저 녀석이 설마 레비스 정도는 아니겠지. 만약 정말 그 정도라면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는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우가 레비스와 같은 수준의 강한 전사이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심정도 있었다. 그에게는 프레일과 같은 신중함도 있었고, 그에 더해 싸우기 전에 미리 이기는 판을 만들어 놓는 치밀한 머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본질적으로는 플레비크의 상급 전사였다.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지금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그 역시 다른 상급 전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진우가 석판을 하나하나 변화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느낌을 받았다.
* * * * *
진우가 기어코 마지막 백 번째 석판에 대한 도전까지 성공적으로 마치자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경기를 관리하던 심사위원이 확성기를 통해 그의 도전 결과를 발표하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관객이 지르는 찬사와 감탄의 목소리가 경기장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질시와 악의에 가득 찬 눈길을 보내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도, 그가 마지막 석판에 도전할 때쯤 해서는 아예 포기한 표정으로 진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억울함, 아쉬움, 그리고 감탄이 섞여 있었다.
진우의 도전이 모두 끝나면서 터지기 시작한 환호성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대회를 관리하는 심사위원들이 목청을 높여 관객들에게 정숙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지금까지 묵묵히 자리에 앉아 진우의 도전을 지켜보고만 있던 참가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였다. 그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것을 목격한 관객들도 여기저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계속해서 진우에게 박수를 치다가 나중에는 대회 참가자들과 관객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진우의 이름을 연호했다.
“지누! 지누! 지누! 지누!”
헤이둑 일행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그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카딘의 두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찼다. 아직 만물의 벽에 대한 봉쇄는 시작도 되지 않았지만, 선발 대회에서 진우가 보여주었던 결과만으로도 그는 이미 유사 이래 최고의 영웅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카딘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연신 목이 터져라 진우의 이름을 연호하는 다른 관객들의 대열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