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67화 (167/235)

167화

본선에 올라온 사람의 수는 천 명에 약간 미치지 못했다. 처음 예선에 참가했던 인원이 만 명이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적은 사람들이 예선을 통과했다는 뜻이었다.

“올해에는 예년에 비해 술사들의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나 봐. 그래서 보통 때보다 예선 통과자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대.”

카딘이 진우의 귀에 대고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속삭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진우는 조금 의아했다. 그 역시 자신이 참가했던 첫날의 시합 말고는 다른 날에 진행되었던 시합들을 본 적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첫날 함께 예선을 치렀던 이들의 실력이 그리 크게 처져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소문을 퍼뜨린 배후와 관계된 일인가?’

스쳐 지나가는 감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데르하의 사냥에 성공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상황이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자신으로 하여금 만물의 벽을 봉쇄할 수 있는 대표가 될 수 있도록 밀어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불안했다. 그리고 불길했다. 그런 상황이 그다지 반갑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이, 정말로 배후의 인물이 있다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번 행성에서의 수련이 끝나면 대책을 강구해야겠군. 매번 이렇게 기다리는 입장에서 적을 상대한다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야. 자꾸 끌려가는 느낌이랄까...’

*  * * * *

본선 대회의 방식은 간단했다. 본선에 진출한 술사들마다 자신이 봉쇄를 원하는 마수의 암각을 먼저 선택하게 한 다음, 같은 암각을 선택한 사람들이 다수일 경우 실력을 겨루어 한 명의 대표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럼 잘못하면 같은 암각에 수백 명이 몰릴 수도 있겠네요.”

본선 대회가 치러지는 원형 경기장의 관람석에 앉아 있던 카리엘이 자신들의 일행과 동석한 카딘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현직 술사인데다가 술사 학교의 연구원으로 있는 그녀가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관람석의 한쪽에 마련된 단상 위에서는 심사위원장이 나서서 한창 대회 진행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카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백 명 정도라면 모를까, 암각 하나에 수백 명씩 몰리는 경우는 없어요. 나라마다 반드시 봉쇄해야만 하는 암각들이 저마다 다르니까요. 본선 진출자가 천 명이 되지 않는데 봉쇄해야 하는 마수의 암각 종류는 백 가지잖아요. 평균적으로 따지면 열 명씩 서로 경쟁하는 게 맞지요. 하지만 유데르하의 암각 같은 경우에는 어떤 술사도 봉쇄에 도전하지 않는 해가 많아요.”

“왜요?”

카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듣고 있던 헤이둑이 피식하며 웃었다.

“카리엘. 너는 사냥꾼이면서도 그것도 몰라? 행성 전체에서 일 년 내내 유데르하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해가 더 많잖아. 나타나는 나라도 그때마다 다르고 말이야. 자기나라에서 나올 가능성도 분명치 않은 마수의 암각을 꼭 봉쇄하고 싶어 하는 술사가 몇이나 있겠냐? 이건 축제나 행사가 아니야. 자기 나라의 일 년 평안이 걸린 중요한 대회라고.”

“하지만 그래도 유데르하가 일단 나타나면 피해가 엄청나잖아요. 막을 방법도 마땅치 않고요. 나라마다 지누같은 사냥꾼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요?”

그녀가 약간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반문하자 헤이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들은 말이야, 자기 집 지붕에 불이 나지 않으면 우물가로 달려가지 않는 법이야. 유데르하가 나타나면 물론 위험하지. 하지만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잖아. 자기나라에서는 그런 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보통의 인간이야.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걱정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물어.”

헤이둑의 말에 카딘이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유데르하의 암각은 만물의 벽에 있는 암각 중에 가장 크거든요. 주입해야 하는 마나의 양도 가장 많고요. 그래서 다들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는 한 유데르하는 선택하지 않으려고 해요. 더구나 올해는 이미 우리나라에서 한 번 유데르하를 사냥했잖아요. 당분간은 놈이 나타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예요.”

반면에 진우는 분명 유데르하의 암각을 선택할 것이다. 카딘은 그가 백 개의 암각 모두에 도전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문서의 내용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미 진우가 만물의 벽에 있는 모든 암각을 봉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진우가 실제로 품고 있는 생각은 만물의 벽 자체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이었지만, 카딘은 아직까지는 진우의 계획이 단순한 봉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그가 무모한 도전을 하려 든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진우를 말릴 방법도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진우는 천하의 고집불통이었다.

*  * * * *

헤이둑의 말마따나 열두 가지 암각은 누구도 선택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술사들이 아무도 선택조차 하지 않는 암각들이 매년 존재했기 때문에 실제로 만물의 벽이 완벽하게 봉쇄되는 해가 거의 드물었다.

사람들은 올해도 봉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암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매년 그래왔으니까.

그러나 마수들의 암각에 대한 술사들의 선택이 모두 끝나자, 이어서 발표된 선택 결과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술사 한 명이 백 개의 암각 모두에 대해 도전을 신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진우였다.

“저거, 요즘 유명하다는 그 어린 친구 아니야? 예선전에서 전체 1등으로 통과했다는 사람 말이야. 그런데 저 친구 실력이 좋다고 너무 자만한 거 같은데. 어떻게 백 개의 암각 모두를 선택할 수가 있지?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관객 중의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며 어이없어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은 아예 대놓고 혀를 찼다.

“미친 거지. 아무리 상급 술사라고 하더라도 백 가지나 되는 마나를 운용한다는 건 불가능해. 설사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마나가 부족해서 안 되고 말이야. 규정상 가능은 하다지만 저런 거는 심사위원들이 좀 야단을 쳐서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심지어 여기저기서 진우를 대놓고 야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투르가의 명령을 받은 글로다이트 왕실 사람들이 나서서 애쓴 덕분에 수도 제하이어 일대에서는 진우에 대한 평이 좋았다.

젊고 능력있는 새로운 신예.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주. 그러나 그런 평가도 본선에서 발표된 술사들의 선택 결과가 알려지자 순식간에 악의에 찬 비난으로 변하고 말았다.

관람석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진우에 대한 악담을 쏟아내는 것을 본 이티삿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투르가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아무래도 혼자서 만물의 벽 전체를 봉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들조차도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심사위원들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투르가의 표정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경쟁해서 이기면 되는 거니까. 다 이기기는 힘들더라도 오십 개든 육십 개든 마나가 허락하는 동안에는 녀석이 선택한 암각에 대해서 모조리 봉쇄 대표로 선발될 수 있을 거야. 문제는 녀석이 얼마나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느냐는 거지.”

투르가는 진우가 예선을 치르는 모습을 보고 그가 확실히 동조 단계에 든 상급 전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글로다이트 왕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정확하다면 매덤 행성에는 상급 전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냥꾼을 육성하는 체계를 갖추지 않음으로써 몇 백 년 동안 스스로 자신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왔던 탓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관찰한 바로는 술사들의 훈련 방법으로는 천 년이 가도 이곳에서는 동조 단계의 전사가 나올 수 없었다.

그들은 반쪽짜리 전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건 차마 전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쓰레기들이었다.

‘너희들은 아직 상급 전사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 마나가 떨어지지 않는 한 놈과 경쟁해서 이길 녀석이 있을 리가 없지.’

마음 같아서는 아직도 진우가 만물의 벽 전부를 봉쇄할 수 있는 대표로 선발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편이 자신에게 좋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놈의 몸에 있는 마나를 전부 쏟아 붓게 만들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그때가 바로 자신이 나서 저 지구인을 제압할 때였으니까. 투르가는 본선을 통해서 진우가 지닌 마나의 양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 * * *

수도 제하이어의 술사 학교에는 만물의 벽에 새겨져 있는 마수들의 암각과 똑같은 성질을 가진 백 개의 평평한 암갈색 석판들이 있었다. 석판마다 저마다 상징하는 마수의 그림이 그려진 것들이었다.

각각의 석판은 커다란 방패 정도의 크기라서 만물의 벽에 있는 암각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그것이 받아들이는 마나의 성질은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석판 자체가 만물의 벽을 만든 바질리크에 의해 제작되어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현재 술사 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석판들은 모두 글로다이트 왕가에서 하사한 것들이라는 뜻이었다.

본선에 오른 술사들은 자신이 봉쇄하기를 원하는 암각의 종류를 선택한 뒤에, 경쟁자가 있을 경우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석판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만약 석판의 성질에 어울리는 마나를 운용하는데 실패하면 마나는 주입이 되지 않았고, 그러면 석판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에 제대로 된 마나를 주입할 경우 석판의 색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심사는 석판 색의 변화 속도와 유지 시간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술사들은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한 지 십분 이내에 석판 전체를 완벽하게 노란색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탈락이었다.

석판의 색이 완벽하게 노란색으로 변하면, 술사는 손을 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석판의 색이 변화된 채로 오래 남아 있는지를 측정했다.

이것 역시 기본적으로 5분 이상 지속되어야 했다. 두 사람 이상이 5분 이상 변화된 석판의 색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을 경우에는 조금 더 오랜 시간 동안 노란색으로 남아있게 한 쪽이 대표로 선발되었다.

“석판 색깔의 변화 시간이 오래 유지되는 게 왜 중요한데요?”

관람석의 미즈락이 다시 카딘에게 물었다. 카딘은 차근차근 그 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마나의 양과 그것을 운용하는 기술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에요. 어떤 술사든 석판에 마나를 주입할 수 있는 시간은 10분이예요. 그 전에 석판의 색깔이 모두 변하면 손을 떼어도 상관이 없지만, 대개는 10분 동안은 그대로 마나를 주입하죠. 이미 석판의 색깔이 변한 시점에서 시간 측정은 멈추거든요. 석판에서 손을 뗀 뒤에 노란색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느냐 하는 것은 주입된 마나의 양에 의해 결정이 돼요.”

“그러니까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마나를 집어넣은 사람이 이긴다는 거군요.”

중간에 카리엘이 그렇게 묻자 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차피 실제 만물의 벽에 있는 마수의 암각을 봉쇄하려면 저런 석판에 주입하는 마나보다 훨씬 많은 마나를 넣어야 하니까요.”

만물의 벽에 있는 암각의 색이 완전히 노란색으로 변하면 그 해에 그 암각은 봉쇄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기지개의 달이 지나도 마나가 방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술사들이 암각에 부여하는 마나는 그 뒤편 절벽 속에 있는 마나 구슬의 마나와는 정 반대의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결국 암각을 봉쇄한다는 것은 마나 구술이 담고 있는 마나를 술사들이 지닌 마나와 상쇄시켜 당분간 마나를 방출할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술사들은 그런 원리까지는 알고 있지 못했지만, 어쨌든 암각이 흡수하는 마나가 본래 그곳에서 발산되는 마나를 상쇄시킨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경쟁자가 없이 단독으로 신청된 석판에 대한 심사부터 진행하겠습니다. 글로다이트의 지누 술사는 앞으로 나와 선택한 석판에 마나를 부여해 주십시오.”

경기를 진행하는 심사위원이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자, 진우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본선이 진행되는 경기장 중앙에는 허리 높이의 단이 하나 있었고, 그 단 위에는 심사가 이루어지는 석판이 순서에 따라 하나씩 놓였다.

진우는 본선이 시작되자마자 혼자 나서서 유데르하를 비롯한 열 두 개의 석판에 마나를 주입시켰다. 커다란 방패 정도 크기의 동그란 석판에 여러 가지 마수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진우가 단 앞에 서자 대기하고 있던 진행요원들이 그가 단독으로 선택한 석판들을 하나씩 단 위에 올렸다.

“유데르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심사위원의 말에 따라 열 두 개의 석판들이 하나씩 단 위에 올 때마다 진우는 그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마나를 주입시켰다. 암갈색의 석판들은 그의 마나를 받아들여 순식간에 노란색으로 변했다. 그렇게 석판 하나가 완전히 노란색으로 변하는데 걸린 시간이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허헛.”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 사이에서 다시금 놀라움이 깃든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런 탄성은 진우가 그다지 쉬는 기색도 없이 연이어서 나머지 석판들 모두의 색을 변화시키자 조용한 침묵으로 변했다. 다른 석판을 선택했던 술사들도 그가 열두 개나 되는 석판의 색을 다 바꾼 뒤에도 별로 힘든 기색이 없이 단에서 물러나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혈기에 객기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막강한 경쟁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설마 백 개 모두에 도전할 수야 없겠지. 뱃속에 마나 스톤을 담고 다니지 않는 한.’

그러나 진우가 먼저 도전하는 석판에서는 다른 술사들이 탈락할 수도 있었다. 술사들은 모두 자신이 그 재수 없는 경쟁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짐작과는 달리 진우는 뱃속에 마나 스톤보다 더 엄청난 놈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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