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159회에서 카딘이 문서를 번역하는 부분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문서가 장치에 대한 설명과 일기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밝혔습니다. 카딘이 그 문서를 해독하고 우울해하는 묘사도 있습니다. 이번 회의 내용과 연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조금 손을 보았습니다.
다음날부터 진우의 수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련은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술사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에 대비해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히는 것이었다. 카딘의 도움이 필요한 수련이었다.
진우는 그녀로부터 다양한 기술을 배우면서 술사들의 기술이 지닌 독특한 장점에 적잖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 익힌다는 생각으로 배웠는데, 하나씩 기술을 수련하다 보니 생각보다 유용한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최소한 몇 가지는 지구로 돌아가더라도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두 번째는 카딘이 번역해 준 문서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진우는 그녀가 현대 글로다이트어로 해석해 준 문서를 일단 헌터 패드를 이용하여 다시 번역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글로다이트어를 배우면서 자신이 직접 문서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기계의 힘에만 의존하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를 연구하면 만물의 벽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걸 완전히 망가뜨리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는 일전에 야스간 행성에서 약탈의 계곡을 만들어 냈던 거대 수정을 망가뜨린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딱히 의도한 행동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야스간의 환경이 천천히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야스간을 위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문서를 모두 이해하면 조금 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만물의 벽이 세워진 데에는 뭔가 바람직하지 못한 의도가 개입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만물의 벽을 파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 같았다.
나머지 하나는 만물의 벽 지하 공터에서 가져온 백 개의 수정을 가지고 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수정마다 거기에 맞는 마나를 주입하는 연습은 이미 만물의 벽 근처에 있는 여관에 묵으면서 충분히 했었다. 지금 진우가 훈련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개의 수정에 동시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마나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기술을 익히는 데에는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아.’
그는 백 개의 수정에 동시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마나 운용 능력이 지금보다 한 단계 발전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수정마다 받아들이는 마나의 성질이 다 달랐는데, 그렇게 많은 성질의 마나를 동시에 운용할 수 있다면 실전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지. 두 달 안에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우는 또 다시 밤잠을 줄일 각오를 했다. 경지가 아무리 높아져도 그때마다 새로운 훈련 과제가 생기니, 언제쯤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 * * * *
글로다이트의 내무 대신인 이티삿은 자신의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브남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사브남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사브남으로 행세하고 있던 투르가가 그의 인사에 간단히 고개를 까딱이자 이티삿은 목소리를 낮춰 말을 꺼냈다.
“전에 말씀하신 지누라는 젊은이가 술사 선발 대회에 대비한 훈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투르가는 그의 말을 듣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잘 된 일이군. 이번 선발 대회에서는 그 젊은 친구가 반드시 만물의 벽을 봉쇄할 대표로 선발되어야 해. 그런데 정말로 그를 백 개의 마수 암각 모두를 봉쇄할 유일한 대표로 뽑는 게 불가능한가?”
투르가의 말에 이티삿이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술사 선발 대회에는 다른 나라에서도 수많은 술사들이 참가합니다. 만약 저희가 무리하게 그를 단독 대표로 밀어 붙이면 불만이 크게 나올 겁니다. 글로다이트의 국력으로는 그 모든 불만을 잠재우기 어렵습니다.”
“만약에 그 지누라는 친구가 실력으로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이긴다면?”
“그래도 불만은 나올 겁니다. 하지만 정말 누가 봐도 월등한 실력으로 대표에 선발된다면 저희로서도 명분이 생기니 일단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유데르하를 사냥한 덕에 녀석의 이름이 제법 유명해졌잖아? 상급 사냥꾼 자격증도 받았고 말이야. 그런 친구가 또 술사 자격증마저 얻는 바람에 술사들이 발칵 뒤집혔다면서? 그만하면 그 지구인이 다시 또 놀라운 일을 벌이더라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납득해주지 않을까?”
투르가의 지적에는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티삿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술사 대표로 선발되는 일에는 워낙 여러 가지 이권이 걸려 있어 그래도 불만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티삿의 말을 들은 투르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티삿을 향해 다소 싸늘해진 어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럼 그가 되도록 많은 암각을 봉쇄할 수 있는 대표로 선발될 수 있게라도 만들어. 최대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라.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밀어붙일 수 있으면 그냥 강행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티삿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자 투르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기더니 문득 입을 열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알레이브에 있던 루살카라는 얼뜨기를 죽인 것이야 그렇다 쳐. 하지만 프레일이 당한 건 조금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녀석이 실패하기를 기대하기는 했지만 설마 죽을 줄이야. 평소의 프레일이라면 분명 신중하게 앞뒤를 재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든 다음에 덤벼들었을 거야. 그런데도 당했다?”
약탈의 계곡이라는 곳은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곳이라고 했다. 진우라는 지구인은 프레일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고 있던 상태였다. 그렇다면 싸움이 붙었을 때에 지구인의 마나는 프레일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프레일이 당했다면 그게 가능한 것은 몇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놈의 마나 운용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아주 적은 마나만으로도 프레일을 쓰러뜨릴 수 있었거나, 아니면 체내의 마나가 워낙 많아서 그렇게 많은 마나를 빼앗기고도 여전히 프레일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
어느 쪽이나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레일이 당한 게 거의 확실하다보니 그 말이 안 되는 경우 중에 하나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네가 정말 동조의 단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마나 운용 능력이 뛰어나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이미 그 정도라면 니코레임을 정복하던 때처럼 우리도 둘 이상의 상급 전사가 덤벼드는 수밖에는 없겠지. 하지만 단순히 마나의 양이 많아서 프레일을 이길 수 있었던 거라면, 이번 싸움에서 네놈에게는 승산이 많지 않을 거야.”
창밖으로 지는 석양 때문에 방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석양에 잠들기 시작한 어두운 방안에서 투르가의 눈빛만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 * * * *
진우는 현대 글로다이트어로 번역된 문서를 놓고 며칠 동안 혼자 끙끙대다가 결국은 카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 진우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곳을 짚으며 질문을 하면 내용을 설명해주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적극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에게 술사의 기술들을 가르쳐 줄 때와는 반응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나한테 뭔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
그가 카딘의 태도에 대해 무언가를 짐작하게 된 것은 장치를 설명하고 있는 전반부를 넘어가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던 후반부의 해석을 읽기 시작했을 때였다. 일기를 읽으면서 진우의 표정은 어쩔 수 없이 점점 굳어졌다. 그는 문서를 다 읽고 나서 고민을 하다가 마음을 굳히고 카딘을 불렀다.
“이 일기가 천 년 전에 쓰인 것이 맞죠?”
진우의 질문에 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지명, 나라 이름 등을 보면 대략 시기를 알 수 있어요. 아무리 빨라도 구백년 이전이에요. 그 뒤로는 사라진 곳 출신인 사람이 언급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장치는 만물의 벽 안에 마나를 모으고 발산하게 하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고요?”
그 말에 카딘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깊게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얼굴을 들어 잠시 진우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만물의 벽에서 처음 마나가 발산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지금부터 팔백년 전이에요. 문서에 나와 있는 설명이 정확한 것이라면 장치가 완성된 것은 천 년 전일 거예요. 무려 이백년의 세월 동안 마나를 모아야 비로소 작동이 되게 만들었다고 했으니까요.”
진우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문서의 내용, 특히 후반부의 일기에 쓰인 글 때문이었다. 카딘은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있자 한참 동안 갈등이 어린 표정으로 무언가를 망설이더니 결국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 문서에 언급된 장치의 개발자, 그러니까 바질리크라는 사람은 우리 가문의 조상이에요. 정확하게는 그의 후손들이 현재의 글로다이트 왕가를 세웠다고 할 수 있지요.”
그 부분은 진우도 짐작하고 있었다. 헤이둑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로다이트 왕국은 본래 지금의 이웃나라인 디블렛을 비롯한 다른 두 나라와 함께 임파라투스라는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팔백년 전에 만물의 벽에서 마나가 발산되면서 갑자기 마수들의 수가 늘어나는 바람에 제국 전체가 큰 혼란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들이 전례 없이 증가한 마수들의 준동에 힘겨워하고 있을 때, 기적처럼 만물의 벽을 봉쇄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술사들이 등장했다.
현재의 글로다이트 왕가였다.
그들은 매년 기지개의 달이 되면 만물의 벽에 있는 암각들을 봉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일부의 암각을 봉쇄해 보였다. 새로 등장한 술사들의 성공이 계속되자 제국에서는 만물의 벽이 포함된 지역의 일부를 떼어 그들에게 자치권을 주었다.
아예 그들로 하여금 만물의 벽을 관리하도록 맡긴 것이었다. 그 땅이 현재의 글로다이트 왕국이 성립하게 된 모태가 되었다.
“바질리크라는 분이 살아 계실 때에는 술사들의 지위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어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마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거든요. 대부분의 나라에서 왕권이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모두 사냥꾼들이었어요. 술사가 권력을 쥐고 있는 지금과는 정반대의 세상이었던 셈이지요.”
카딘은 처음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다소 힘들어하더니, 얘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차분해졌다. 진우는 별 대꾸없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 년 전에는 술사들의 기술이 지금처럼 다양하거나 유용하지 못했다. 기술의 종류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생활에서의 쓰임새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누리는 지위는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지금의 사냥꾼들보다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는 마나를 쓸 수 있는 매덤 행성에서 그저 생활에 약간 보탬이 될 정도의 기술을 지닌 술사들이 크게 인정을 받을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문서의 후반부에 있는 일기를 읽으셨으면 만물의 벽을 만든 사람이 바질리크님이라는 것과 그 분이 왜 그걸 만들기로 했는지 아셨을 거예요. 처음 우리 가문에만 비밀리에 전해졌던 만물의 벽 봉쇄방법을 전해 준 게 바질리크님이셨지요. 저도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설마 가문의 시조나 다름없는 그분이 만물의 벽을 만든 당사자일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 말을 할 때 카딘의 눈에 기어코 눈물이 맺혔다. 진우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문서 후반부의 일기는 만물의 벽을 만들던 당시의 일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 중에 바질리크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았다. 진우와 카딘은 그 일기를 통해 일의 전모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사들의 지위가 별로 대단치 않던 천 년 전에 매덤 행성에 바질리크라는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천재 술사가 한 명 등장했다. 그는 당시 술사들에 대한 처우가 열악하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사냥꾼들보다 오히려 술사들이 대우를 받는 세상을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얼핏 천재들이 가지고 있는 괴팍한 생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발상이 가볍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집요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술사들이 무력으로 사냥꾼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가 택한 방법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술사다운 것이었다.
바질리크가 했던 발상 자체는 간단했다. 사냥꾼에 대한 대우가 좋은 이유는 그들이 있어야 마수를 퇴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마수의 수를 줄이면 사냥꾼의 필요성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마수들은 다른 생물들보다 마나에 훨씬 민감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마나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면 마수들의 수도 줄어들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천재라는 점은 그런 어린 아이 같은 발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냥꾼의 필요성을 줄이는데 그치지 않고 거꾸로 술사들의 필요성을 늘리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 때문에 본래는 그저 길쭉한 절벽에 불과했던 알마크 산의 한쪽 사면에 만물의 벽을 만들기로 했다는 거지?”
진우의 말에 카딘은 아무 대꾸도 없이 침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밝혀진 문서의 내용은 그녀를 좌절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질리크는 먼저 매덤 행성 곳곳을 여행하며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 깃든 마나를 연구했다. 이십 년 간의 긴 여행을 통해서 그는 모든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백 가지의 서로 다른 성질의 마나들이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특히 마수들의 경우 그런 마나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많이 가질수록 비슷한 종류의 다른 마수들에 비해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칩거하면서 십 년을 더 투자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다듬어서 하나의 장치를 고안해 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규합해서 현재의 만물의 벽 뒤편에 비밀 연구실을 만들었다.
거기서 그가 동료들과 함께 만든 장치는 가히 천재라는 명칭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바질리크는 그 산에다 마나 수집 장치를 만든 거야. 자신이 찾아낸 백 가지의 마나를 모으는 장치 말이지. 이 수정들은 그 장치를 가동시키기 위한 일종의 점화장치 같은 것이고.”
진우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정들을 카딘에게 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만물의 벽에 새긴 마수의 암각은 바질리크가 고안한 장치가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는 동시에 때가 되면 다시 발산하도록 만들기 위한 송수신 겸용의 안테나와 같은 것이었다. 그와 동료들은 석공들을 동원해 자신들이 선택한 백 가지 마수들의 모양을 절벽에 커다랗게 암각으로 새기도록 했다.
암각은 마나의 수집과 발산을 쉽게 하기 위해 일부러 실제의 마수보다 각각 열 배 정도의 크기가 되도록 만들었다.
조각이 완성되자 바질리크는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서 암각의 바위를 부드럽게 변화시켰다. 그런 다음 미리 준비했던 재료들을 전부 동원하여 모든 암각마다 그 뒤편 이백 미터 정도 되는 곳에 커다란 백 개의 수정 구슬을 심었다. 암각을 통해 흡수한 마나가 모일 수 있게 하는 장치였다.
마나를 모으고 다시 발산시키는 장치를 완성시킨 곳이 바로 진우가 발견했던 토굴이었다. 그는 작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토굴의 연구실에 각각의 구슬마다 연결되는 백 개의 점화장치를 따로 만들었다. 진우가 보았던 그 수정들이었다.
모든 일을 완성하는 데에는 엄청난 자금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성장형 수정, 다양한 마나 회로, 백 가지 마나에 특화된 물질 등, 그가 평생에 걸쳐 모았던 모든 것들이 만물의 벽에 쏟아 부어졌다.
그 결과 동료들과 함께 일을 시작한 지 무려 삼십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진우가 문서에서 보았던 엄청난 장치가 완성되었다. 바질리크로서는 실로 인생을 전부 바친 엄청난 대역사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설치 작업을 마치고, 수정으로 만든 백 가지 마수 모양의 점화장치에 바질리크가 서로 다른 마나를 일일이 부여하자 만물의 벽이 가동을 시작했다. 일기의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진우는 지하의 연구실을 직접 다녀왔기 때문에 그 뒤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바질리크는 장치가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독살한 뒤 통로를 무너뜨리고 혼자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는 실로 지독한 사람이었다. 진우는 일기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침대의 백골이 남겼던 마지막 편지는 카딘에게 보여주지 않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러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는 울고 있는 카딘이 안됐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질리크라는 인물의 집요함에 치를 떨었다.
“자신이 영예를 누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술사와 후손들을 위해 무려 이백년을 기다려야 하는 작업을 하다니. 정말 뭐라고 말을 하기도 두려울 만큼 엄청난 사람이네.”
카딘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 엄청난 사람의 후손이 바로 자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만물의 벽이 처음 마나를 발산하기 전부터 무려 이백년을 기다리며 그것을 봉쇄할 방법을 전승해 온 것이 바로 자신의 조상들이었다. 그녀는 문서를 모두 번역한 뒤 그 사실을 깨닫고 내내 혼자서 가슴앓이를 해왔다.
진우는 카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하 공터에서 보았던 시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녀의 조상이 술사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만물의 벽을 만든 것도 모자라 함께 연구했던 동료들마저 제거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미 죽은 지 천 년이나 된 사람의 일이었다. 이제 와서 그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다고 한들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 * * * *
진우는 만물의 벽에 설치된 장치를 망가뜨리기로 했다. 바질리크가 만물의 벽을 만든 행위에 대해서는 그도 선악을 판단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무려 삼십년 동안 함께 일해 왔던 동료들을 비밀을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모두 독살한 것은 인간으로서 용서받기 힘든 일이었다.
그가 한 모든 일들은 만물의 벽을 만들고 가동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그것을 없애는 것 이외에는 죽은 바질리크를 응징할 방법이 없었다.
바질리크가 차라리 마나를 영원히 만물의 벽에 가둬둠으로써 마수의 수를 완벽하게 줄였더라면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만물의 벽을 없애고 그로 인해 마수의 수가 늘면 일반인들은 조금 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진우는 그 때문에 처음에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마수의 벽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만물이 벽이 사라져도 이미 다양한 기술을 발달시켜온 술사들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물의 벽이 사라지면 차츰 마수들의 숫자가 지금보다 늘어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사냥꾼들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지금보다는 향상될 것이다.
‘내가 정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이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일 년에 한 번 만물의 벽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상황도 그다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결과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만물의 벽은 천 년 가까이 유지되어 왔다. 장치가 굉장히 안정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술사들의 지위는 향상되었지만 사냥꾼들의 수가 너무 많이 줄어들었다.
행성 전체로 보면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저항력이 너무 약해진 것이다. 그로서는 마수 사냥에 대한 의뢰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사냥꾼의 수가 줄어든 지금의 상황이 정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야스간 행성에서는 실수로 했던 일을 매덤 행성에서는 의도적으로 재현하기로 했다.
진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카딘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주었다.
“아무튼 만물의 벽이 완전히 봉쇄되기 전까지는 이 문서의 내용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섣불리 문서의 내용이 밖으로 유출되면 너와 나는 물론, 잘못하면 너희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할 수도 있어.”
카딘도 머리가 나쁜 여자는 아니었으므로 진우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웠다.
============================ 작품 후기 ============================
머리속에 설정을 해 놓고 그 부분을 문서를 통해 설명하려고 의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글을 올려놓고 보니 코멘트에서 지적되었던 것처럼 앞뒤를 다 잘라먹고 제 생각을 설명하려는 일방적인 글이 된 느낌이 있더군요. 그래서 글의 후반부를 대폭 수정했습니다.
아울러 159회에서 카딘이 문서를 번역하는 부분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말 그대로 조금만 수정을 했는데, 문서가 장치에 대한 설명과 일기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밝히는 정도입니다.
카딘이 그 문서를 해독하고 우울해하는 묘사도 있습니다. 이번 회의 내용과 연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조금 손을 보았습니다.
좋은 지적을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