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매덤 행성에는 지구의 헌터 학교처럼 사냥꾼들을 양성하기기 위한 교육 기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술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가 큰 도시마다 적어도 하나씩 있는 것과 비교하면 진우가 보기에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수들이 적어 사냥꾼이 넘쳐나는 편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위룬 시에서는 진작부터 사냥꾼 협회에 비위카이를 사냥해 달라는 의뢰를 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둑 팀이 의뢰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며칠이 지나도록 응하는 사냥꾼이 없었다. 그것만 보아도 마수의 수에 비해 사냥꾼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사냥꾼의 수요가 많은데도 그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데에는 진우가 알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남의 나라도 아니고 심지어 남의 행성 얘기이니 그가 굳이 거기까지 관심을 둘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아한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따로 사냥꾼을 양성하는 기관이나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사냥꾼이 되기를 원한다면 개인적으로 스승을 찾아 훈련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제약이 있었다. 스스로 마나를 각성하기 전까지는 사냥꾼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구로 치면 하급 헌터가 되기 전에는 사냥꾼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 규정이 너무 지나치다는 지적이 있어서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약을 낮추거나 아예 없앤 곳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진우가 있는 이곳 글로다이트에서는 유난히 그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사냥꾼들의 수익이 워낙 좋다보니까 젊은이들이 섣불리 생업을 포기하고 사냥꾼이 되기 위해 몰려드는 것을 적절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술사들은 활용 범위가 크고, 수가 많을수록 사회에 유익하지만, 사냥꾼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각국의 지도자들, 특히 글로다이트의 왕가가 내거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술사들은 다른 분야는 몰라도 마수들을 퇴치하는 데에는 젬병이었다. 그들에게는 전투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술사들이 전투력까지 갖추었다면 사냥꾼이라는 신분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글로다이트의 사냥꾼들은 그 필요성에 어울리지 않는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진우가 보기에 어느 나라든 마음만 먹으면 사냥꾼을 대량으로 양성해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 같았다. 마나가 풍부한 행성이라고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모두 조금씩은 체내에 마나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어느 정도 그것을 활용할 줄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매덤 행성에서는 마나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생활용품이 폭넓게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자질이 좋은 이들은 조금만 체계적으로 훈련시켜도 마나를 이용해서 신체를 강화시킬 수 있는 단계, 즉 지구로 치자면 하급 헌터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사냥꾼 학교까지 세워 훈련을 시킨다면 중급 헌터에 해당하는 이곳의 하급 사냥꾼, 혹은 그 이상의 능력을 지닌 이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 * * * *
“나는 열일곱 살에 마나를 각성했지. 남들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였어. 하지만 주변에 사냥꾼이 없다 보니까 그게 마나를 각성한 건지도 몰랐지. 그냥 전보다 몸이 더 튼튼해져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거든. 그래서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그냥 산 속에 들어가서 약초나 캐며 살았어. 아마 내 스승을 우연히 만나지 못했으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산속을 헤매며 살았을 거야.”
헤이둑은 진우가 조금씩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지, 제하이어로 가는 동안 계속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혼자 알아서 마나를 각성하기도 힘들지만, 마나를 각성해도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기는 더욱 힘들지.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아주 좋았던 셈이야. 그런데 정말로 힘든 건 따로 있더라고. 바로 제자로 받아들일 아이를 찾는 거지. 나이를 생각하면 나도 슬슬 제자를 구해야 하는데 그게 영 마음처럼 되지를 않아. 젊은이들이야 많지만, 겉으로 보아서야 누가 마나를 각성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글로다이트 뿐만이 아니라 매덤 행성 전체에서 사냥꾼의 수는 지난 수백 년간 꾸준히 줄어들었다. 이러다가는 세상에 사냥꾼이 하나도 남지 않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마수는 누가 잡을까? 진우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실제로 그 점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만물의 벽이 세워진 게 대략 천 년 전쯤이라고 하더군. 그 전에는 오히려 술사들이 푸대접을 받았다는 거야. 마수의 수가 지금보다 많았던 데다가 술사들의 기술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만물의 벽이 세워진 뒤로 대략 이백년 동안 마수의 수가 계속 줄어들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만물의 벽에 새겨진 마수의 조각에서 마나가 방출되기 시작한 거지. 그게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팔백 년 전의 일이었는데, 처음 그 일이 생겼을 때는 난리도 아니었다는 거야. 갑자기 마수의 수가 확 늘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아직 사냥꾼이 수가 제법 있었으니까 어렵기는 해도 어떻게 처리하기는 했지.”
만물의 벽에서 마나가 방출되면서 처음에는 어찌할 줄 모르던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그 괴이한 현상을 술사들이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처음 시작된 곳도, 그리고 실제로 마나 봉쇄를 시도하고 성공했던 나라도 글로다이트였다. 글로다이트는 그 방법을 숨기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개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술사들이 글로다이트로 찾아와서 만물의 벽을 봉쇄하는 법을 배웠다. 그곳에서 마나가 방출되면 글로다이트 한 곳에서만 마수가 늘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사냥꾼 출신이 왕권을 잡고 있던 곳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도 예외 없이 자국의 술사들을 파견하여 봉쇄 방법을 배우게 했다. 나라마다 수가 늘어나면 곤란한 마수들이 한 두 종류씩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글로다이트에 와서 새로운 술법을 배운 술사들이 만물의 벽 봉쇄에 성공하고 귀국하면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큰 보상이나 직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행성 전체적으로 술사들의 지위가 올라갔다.
반면에 마수들이 줄어듦에 따라 사냥꾼의 지위는 조금씩 낮아졌다. 그런 상황이 8백년 간 계속되자,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술사들이 왕위에 오르거나 높은 직책을 맡아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만물의 벽이 술사들에게는 축복이고, 사냥꾼들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였던 셈이지. 그래도 뭐 어쩌겠나. 마수가 늘어나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말이지. 그리고 술사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많이 개발된 것도 사실이거든.”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지금 일행이 타고 있는 아틀리였다. 술사들이 개발한 마법진을 이용해 바퀴를 움직이는 이 탈 것은 약간의 마나를 운용할 수만 있어도 누구나 손쉽게 구동시키거나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가격이 만만치 않고, 정기적으로 마나를 채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처럼 순하고 빠른 가축이 없는 매덤 행성에서 아틀리는 아주 편리한 이동수단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위룬 시에서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친 진우 일행은 아틀리를 타고 닷새를 더 이동한 끝에 글로다이트의 수도인 제하이어에 도착했다. 진우는 그동안 기억력을 활성화시키는 기술까지 써 가면서 글로다이트어를 배우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덕분에 이들이 제하이어의 성문을 통과할 즈음에는 그래도 아주 간단한 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 * * * *
플레비크 인들은 니코레임을 점령한 다음, 남아있던 니코레임 인들 가운데 상당수를 노예로 만들었다. 그들은 노예가 된 니코레임 인들을 이용해 행성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히 다양한 지식과 전리품을 얻었다.
그들이 얻은 전리품 가운데에는 여러 행성의 언어들을 번역해주는 통역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블리젠 행성의 지배자 투르가가 매덤 행성에 도착한 것은 진우가 만물의 벽 근처의 여관에 묵고 있을 때였다. 진우가 지하의 연구실에서 발견한 수정에 마나를 부여하는 연습을 하고 있을 때, 투르가는 만물의 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매덤 행성으로 오면서 플레비크 본성으로부터 매덤 행성에서 통용되는 여러 언어를 통역해줄 수 있는 장치를 받아왔었다. 그 역시 진우처럼 글로다이트어를 말할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외모에 있었다. 매덤 행성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모를 하고 있던 그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동조의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얼굴과 손의 모양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식의 잔재주를 부린 경험이 적다 보니 외형을 매덤 행성인들과 완전히 비슷한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자신의 외모룰 다른 매덤 행성인들과 똑같이 보이도록 바꿀 수 있게 된 것은 글로다이트의 수도인 제하이어에 도착한 뒤였다. 제하이어로 가는 도중 그는 사람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듣다가 실력이 좋은 술사들 중에는 외모를 바꾸는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제하이어에 도착한 뒤 먼저 고위직 술사 하나를 납치한 다음, 종속의 낙인을 찍어 노예로 만들었다.
그 뒤에 그로부터 술사의 기술을 배운 뒤에야 외모를 완전히 바꾸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곳의 술사라는 녀석들이 재미있는 기술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니, 설마 용모를 이렇게 감쪽같이 바꾸는 방법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역시 흥미로운 곳이야.”
투르가는 노예로 만든 술사를 통해 간단한 글로다이트어를 배우는 한편, 매덤 행성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정보를 니코레임인 노예들이 가지고 있던 기록과 함께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진우라는 지구인을 효과적으로 노예로 만들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진우를 쓰러뜨리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만물의 벽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 * * * *
어둠이 짙게 깔린 제하이어의 왕궁의 벽을 넘는 검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투르가였다.
그는 노예로 만든 술사를 통해 왕궁의 구조와 보초들의 위치를 최대한 자세하게 파악한 다음에, 전문적인 암살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민첩하고 은밀한 몸놀림으로 왕궁 깊숙한 곳까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적지 않은 보초들이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그의 움직임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곳인가 보군.”
왕궁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호화로운 건물의 담장 밑에 몸을 붙인 투르가는 머리 위에 높이 솟아있는 베란다를 올려다보았다. 글로다이트의 왕이 머무는 침실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그는 가볍게 도약해서 침실 베란다의 난간을 움켜잡았다. 높이가 10m가 넘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아무런 소리 없이 베란다 위로 올라섰다.
투르가는 침실로 이어지는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자, 문고리 부근에 가만히 손을 대고 마나를 운용했다. 그러자 안으로 걸려있던 걸쇠가 소리도 없이 벗겨졌다.
잠시 열렸던 베란다쪽의 문을 통해 희미하게 스며들던 달빛은 그가 문을 닫자 곧 사라졌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방안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투르가는 왕이 누워있는 침실로 다가가 잠든 왕의 얼굴을 확인한 뒤, 곧바로 품에서 조그만 통조림 캔처럼 생긴 장치 하나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작동시킨 다음 문 가까이에 설치하고는 침대 옆에 붙어 있는 등에 마나를 불어넣어 주위를 밝혔다. 그리고는 곧바로 잠든 왕을 흔들어 깨웠다.
“누, 누구냐?”
잠에서 깬 글로다이트의 왕 크랄은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가운데 처음 보는 낯선 인물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침대 옆에 선 채로 크랄을 내려다보고 있던 장신의 인물이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침입자... 컥.”
그의 신호를 무시하고 크랄 왕이 경비병을 부르려고 소리를 치자, 투르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재빨리 손을 뻗어 왕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살기에 번들거리는 눈을 크랄 왕에게 바싹 가까이 대고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속삭였다.
“이 방에는 이미 소리 중화 장치를 켜 두었다. 몇 미터만 떨어져도 밖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그러니 헛된 수고 하지 말고 잠자코 말을 들어라.”
플레비크어로 떠드는 그의 말을 크랄 왕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투르가의 말이나 자신의 목을 움켜쥔 억센 손보다는 그의 눈에서 뻗어 나오는 몸서리칠 정도의 살기 때문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소리치는 것을 포기한 듯이 보이자 투르가도 상대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그 대신 손바닥을 활짝 편 채로 두 손을 크랄 왕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마나를 운용하였다. 그의 고문이 시작되었다.
“으, 으아악~”
크랄 왕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투르가가 켜 놓은 소리 중화 장치 때문에 침실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투르가는 고위직 술사 한 명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는 과정에서 이들이 외부의 마력에 저항하는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크랄 왕에게도 바로 종속의 낙인을 찍으려 하지 않고, 먼저 마나 동조를 이용해 그의 머리와 육체에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고통을 이용해 그의 정신을 먼저 무너뜨리려는 의도였다.
글로다이트의 역대 왕들은 모두 뛰어난 솜씨를 지닌 술사들이었다. 그 점에서는 크랄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글로다이트 전체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은 상급 술사였다. 하지만 투르가의 입장에서 볼 때 글로다이트의 술사라는 작자들은 너무도 허약했다. 의외로 정신력이 강해 종속의 낙인을 찍기가 쉽지 않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적 고통이나 강력한 살기에 너무 취약했다.
크랄 왕은 머리를 통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생경한 마나로 인해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평생 귀하게 자란 그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처음에 머리에만 머물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슴과 배를 비롯해 사지를 포함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고통에 몸부림 치는 그의 귀에 투르가가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제부터 내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내 이름은 투르가다. 앞으로 너의 주인님이 될 분이지. 잘 기억해라. 내 이름은 투르가다.”
투르가는 입으로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간간이 고문을 멈추고 크랄 왕의 눈빛을 살폈다. 왕의 눈빛이 고통으로 인해 완전히 흐려진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상대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기 시작했다.
“으으으....”
머리를 파고드는 기괴한 느낌에 처음에는 조금 버티려고 저항하던 크랄 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투르가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의 저항이 줄어듦에 따라 고개가 점점 밑으로 숙여지더니 어느 순간 마치 죄 지은 노예가 주인에게 용서를 비는 것처럼 완전히 앞으로 엎드린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크랄 왕의 머리 위에 놓여있던 투르가의 손이 치워졌다.
“내가 누구냐?”
크랄 왕이 조금 진정한 듯한 기미가 보이자 투르가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그를 향해 물었다. 그의 말을 들은 크랄 왕은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그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크랄이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냐?”
“주인님의 종 크랄입니다.”
크랄 왕이 그렇게 말하자 투르가는 다시 한 번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머릿속에 심어진 종속의 낙인을 확인했다. 종속의 낙인이 이상 없이 제대로 찍혔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왕을 일으켜 다시 침대에 앉히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입으로 하는 언어가 아니라 정신 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말이었다.
“사흘 뒤에 네 신하 중의 한 명인 내무대신 이티삿이 너에게 나를 소개할 것이다. 그때 너는 그에게 명하여 나에게 내무부의 자리 하나를 주도록 하면 된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기 어려울 경우에는 이티삿을 통해 뜻을 전하겠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 그리고 둘만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그렇다고 노예가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도 그러니 혹시 나를 부를 일이 있을 때에는 사브남이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 말을 들은 투르가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는 왕의 침실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침실에는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공기만이 휘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