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숨을 쉬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진우는 마치 오랫동안 참아왔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눈을 떴다. 오십 일이 넘던 명상 수련이 비로소 끝난 것이었다.
그가 명상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몸 전체를 강력하게 짓누르던 압력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의식적으로 마나를 운용하거나 몸 주위로 마나막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몸 위에 쌓인 두꺼운 바닷물이 갑자기 사라졌을 리는 없으니, 지금도 그의 몸 주변에서는 엄청난 수압이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단지 그가 주변의 압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진우는 자신의 수련이 또 다시 한 단계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수련을 처음 생각했던 사람이 마스바로크라고 했나? 그가 정말로 지배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수련 장소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선택했어.”
먀스바로크가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진우가 그를 다소 과대평가한 측면이 있었다. 마스바로크로서는 니코레임의 평화로운 환경과 풍부한 마나가 오히려 니코레임 인들의 수련에 대해 큰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거기에 지배의 단계로 나가기 위한 실마리를 살짝 잡았던 그로서는 동조의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수련해야 할 방향을 대충 짐작한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니코레임 인들이 고향별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가혹한 환경을 가진 곳들을 찾았다. 그 중에서 실제 익혀야 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마나 운용 방법을 수련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다섯 곳의 행성을 골랐는데, 그 첫 번째가 니코레임에 있을 때 누렸던 풍부한 마나의 혜택을 몽땅 빼앗아버리는 약탈의 계곡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정작 마스바로크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발상을 통해 자신의 수련 목표와 방법을 정해나갔다. 야스간에서도 그랬지만, 이곳 토바르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수련 장소들을 지목한 마스바로크조차도 꿈도 꾸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진우의 깨달음은 애초에 마스바로크가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마나를 보는자, 마나를 지배하리라’는 말을 남긴 첼스본이 더 현명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진우는 몸 안의 마나를 점검해 보았다. 수련 전보다 활용 가능한 마나의 양이 더 많아졌다.
이제는 체내 마나량이 늘어난다고 해서 깨달음에 당장 큰 도움이 되는 수준은 이미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 수련이 아니라 전투를 한다고 생각하면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늘어난 것 자체는 분명히 유익한 일이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며 격투술을 잠시 연습해 보았다. 몸을 움직이고 손발을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물에 파동이 생기기는 했지만 특별한 저항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마치 땅 위에서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다만 몸 안에 있는 마나들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자신조차도 주의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힘들 정도였다. 일부러 의지를 개입시키면 진동의 파형과 속도 등을 변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주변의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나가 진동의 성질을 결정했다.
“이젠 압력을 견디는 것은 해결된 것 같네.”
그것은 토바르에 올 때 생각했던 수련 목적이 심연의 구멍에 내려가기도 전에 달성이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성과를 이룩한 셈이었다.
단순히 주변의 강한 압력을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압력 자체에 대해 그것을 통과시키거나 활용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특별히 마나를 운용하지 않았는데도 신체의 움직임이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원활해졌다.
몸에 전해지는 압력 자체가 활력의 원천이라도 되는 듯했다. 진우는 이것이 뎅게스 마을 사람들이 적은 마나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압을 견디며 자연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이 아니라면 딱히 크게 유용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기술을 얻기는 한 거네.”
수많은 잠수부들이 울고 갈 소리를 태연히 내뱉은 그는 처음 배낭을 숨겨 놓았던 장소에서 그것이 잘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눈앞에서 오렌지색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심연의 구멍을 쳐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미 저 안으로 들어가 더 수련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본래 계획했던 훈련 과정은 끝까지 마치고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구멍은 지름 수백 미터 정도의 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구멍은 입구에서부터 밑을 향해 수직으로 뚫려 있었는데 얼마나 깊은지 바닥이 조그만 점처럼 까마득히 멀리 보였다. 진우는 밑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면서 주변의 벽을 이루고 있는 암석들을 살펴보았다.
“강한 열을 받아 암석이 녹으면서 구멍이 뚫린 것인가?”
적어도 충격을 받아 갈라지거나 무언가 억지로 부수면서 뚫고 지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벽 전체가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한 모양으로 주름이 져 있어서 어딘가 녹아내린 듯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흘러내린 방향이 밑이 아니라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구멍이 ‘뱉는 곳’이라고 하더니 아마도 밑에서 위로 압력이 작용해서 그런 거겠지.”
진우가 내려가고 있는 지금도 밑으로부터 주기적으로 발산되는 파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파동이 한 번씩 칠 때마다 구멍의 벽을 통해 복잡하게 반사되는 힘 때문에 만약 압력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중간에서 몸이 찌그러져 도로 위로 밀려 올라가고 말 것 같았다.
진우는 바닥을 향해 내려가면서 주변의 벽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문득 뎅게스 시에서 보았던 건물 수리 장면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암석에 마나를 부여해서 부드럽게 만들던 모습이 생각나네. 암석이 흐물흐물해진 상태에서 가만히 있으면 한쪽으로 흐르면서 이런 모양이 되겠는데?”
수리공이 암석을 밀가루 반죽하듯 다루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했다. 도대체 마나와 암석이 서로 어떤 작용을 하기에 엄청나게 단단해 보이는 암석이 손으로 만졌을 때에는 그렇게 부드럽게 변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우는 나중에 수련을 마치고 뎅게스로 돌아가면 그들의 기술에 얽힌 비법을 꼭 물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도시의 지도자들이 사용한다는 머리를 좋게 하는 마나 활용법이라는 것도 가능하면 배우고 싶었다.
“머리가 좋아지는 방법을 정태 녀석에게 가르쳐주면 좋아할 거야.”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기는 했다.
진우는 내려가던 도중에 아래에서부터 부드럽게 변한 암석의 일부가 파동에 밀려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작은 것은 주먹만 했고, 큰 것이라고 해야 머리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다만 모양이 마치 늘어진 밀가루 반죽처럼 길쭉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스치며 위로 올라가고 있던 암석들 가운데 하나를 잡아챘다.
“영락없이 밀가루 반죽이야. 부드러운데다가 심지어 물컹거리기까지 하네.”
짐작대로 뎅게스의 건물 수리공이 돌을 변형시켰을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처음 손에 쥐었을 때는 물렁물렁하던 돌은 진우가 그것을 손에 쥐고 밑으로 계속 내려가는 동안 점점 딱딱해졌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나자 결국 그것은 탄력을 완전히 잃고 보통의 돌처럼 변했다.
그는 딱딱해진 돌을 손에 올려놓고 마나를 주입시켜 보았다. 마나는 별 저항 없이 순조롭게 암석에 전달되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흐물흐물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쳇. 역시 비법이 있는 것이었군.”
신기한 것은 또 있었다. 지금 내려가고 있는 심연의 구멍 바닥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조그만 점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오렌지색의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기는 했지만, 특별히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구멍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지금 밑을 향해 내려가는 진우의 눈에는 밑에서 올라오는 빛보다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빛이 더 밝게 느껴질 정도였다. 상식적으로 저 정도 깊이에서 비추는 빛이라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구멍 입구까지 환하게 비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태양광선마저도 몇 백 미터 이상은 물속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데, 최소한 10Km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곳에서 바닥의 빛이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내려가 보면 알게 되겠지.”
뎅게스의 경호대장인 찬드로는 이 구멍의 깊이가 입구에서 물 표면까지의 거리만큼 된다고 했다. 심연의 구멍 입구 근처 수심이 10Km 정도 되었으므로, 진우는 그 정도 내려가면 구멍의 바닥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닥은 찬드로가 말한 것보다 훨씬 깊었다.
구멍에서 나오는 색이 오렌지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이곳이 깊은 구멍이라는 뜻이기는 했지만, 실제 깊이는 찬드로가 어림짐작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던 것이다.
진우가 기어코 바닥에 닿은 것은 찬드라가 말한 10Km가 아니라 거의 20Km 가까이 내려왔을 때였다. 그 정도까지 내려오자 주변에서 가해지는 수압이 너무나 엄청났다.
진우는 이미 수압을 무시할 수 있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압력의 세기에 은근히 두려움이 일 정도였다. 만약 그가 단순히 마나막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수련하는 데에 만족했다면 끝까지 내려오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연의 구멍은 바닥 전체가 진우가 내려오는 동안 보았던 물렁한 돌로 덮여 있었다. 그것은 바닥이 가장자리보다 약간 부풀어 올라 전체적으로 조금 봉긋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우는 곧 내려오는 동안 내내 경험했던 강력한 파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바닥이 한 번씩 강하게 진동하면서 순간적으로 밖을 향해 강력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진동이 일어날 때 바닥에 발을 댄 채 별 대비 없이 서있던 진우는 하마터면 진동에 의해 발생한 파동으로 인해 쏜살같이 밖으로 다시 밀려나갈 뻔했다.
“마치 생물의 심장이 뛰는 것 같네. 이렇게 계속 파동이 치니 뱉는 곳이라고 하는 거였군.”
바닥 전체가 푹신한 침대처럼 탄력을 가지고 있어, 주변을 짓누르고 있는 압력만 아니었다면 편히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엄청난 힘을 지닌 진동으로 인해 내장이 터져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우는 바닥을 살펴보다가 그것이 내려오면서 계속 보았던 부드러운 돌과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강한 힘을 계속 전하면서도 바닥이 그 힘을 견딜 수 있다니 대단하네. 돌이 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혹시 내려오면서 보았던 부드러운 돌이 여기서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라가는 건가?”
시험 삼아 바닥에 손을 대고 일부를 떼어내 보려고 했지만 의외로 바닥은 진우의 손아귀 힘에도 살짝 눌리기만 할 뿐 뜯겨져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를 발로 눌러보고 손으로 움켜쥐려고도 시도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바닥 전체가 매끈하게 하나로 연결된 한 장의 돌 판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돌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보네?”
그때 진우는 바닥에서 올라가면서 좁아지고 있던 머리 위의 벽 일부가 실타래가 풀리듯 떨어져 나오더니 압력에 따라 위로 밀려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내려오면서 보았던 물렁한 돌과 같은 모양이었다.
“바닥이 아니라 벽에서 돌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네?”
진우는 그제야 왜 입구보다 바닥이 더 넓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심연의 구멍은 밑에서부터 계속해서 구멍의 크기를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푹신한 바닥에 앉아 바닥을 향해 마나 탐지를 실시했다.
토칠라크에서 처음 동조의 경지에 들었을 때, 진우가 평지에서 주변에 마나 탐지를 이용하여 탐색할 수 있는 거리는 반경 10Km 정도였다. 그 뒤로 계속된 수련의 성과로 인해 최근에는 그 거리가 20Km 정도까지 넓혀져 있었지만, 그것은 특별한 장애물이 없는 평지에서의 이야기였다.
이처럼 암석을 통과해 마나를 탐지할 경우 탐색이 가능한 거리는 불과 몇 백 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암석이 마나에 대한 저항력이 유난히 강하다든가 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놈은 왜 이렇게 깊이까지 마나가 전달되는 거지?”
지금 진우가 딛고 있는 심연의 구멍은 ‘뱉는 곳’이었다. 그래서 진우는 처음 마나 탐지를 실시할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먼 곳까지 탐색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작 마나 탐지를 실시하자 마치 평지 위에서 마나 탐색을 하는 것처럼 탐색의 거리가 끝도 없이 밑을 향해 뻗어나갔다. 만약 진우의 능력이 더 뛰어났더라면 행성의 반대편까지도 바닥을 통해 마나로 탐색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가만, 행성의 반대편?”
그제야 진우는 지금 자신이 어떤 곳에 와 있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행성 토비르가 그렇게 두꺼운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어째서 바다 깊은 곳까지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할 수 환경을 가질 수 있는지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