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수백 명이 넘는 토바르 전사들이 돌창을 들고 다가오자 진우는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격해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까지야 기대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치가 우호적이라기보다는 어쩐지 겁에 질려 있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그로서는 설사 이들이 한꺼번에 덤벼든다고 해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처음 만난 토바르인들과 굳이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진우 역시 다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설마 도시를 파괴하던 저 마수가 이들에게 있어서 무슨 신수라든가 그런 건 아니었겠지? 그럼 일이 골치 아프게 될 수도 있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표정을 굳힌 채 만일을 대비해서 은근히 마나를 몸에 돌렸다. 그때, 진우를 둘러싼 전사들을 헤치며 한 사람이 앞으로 헤엄쳐 나왔다. 주둥이가 뭉툭한 돌고래처럼 생긴 얼굴에, 양쪽 입가로 가늘고 긴 수염이 뻗어 나와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모습을 한 토바르 인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선 뒤 한 손을 들어 진우에게로 다가서던 전사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는 손으로 몇 가지 이상한 동작을 취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우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입을 놀리는 것으로 보아 뭔가 의사 표시를 하는 것 같은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열린 입안으로 두 줄로 뾰족하게 돋아있는 이빨들뿐이었다.
‘뭐라는 거지?’
진우는 잠시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순간적으로 머리를 탁 치고 말았다.
‘아차!’
그는 자신의 멍청함을 속으로 자책하면서 얼른 등에 배고 있던 배낭의 주머니에서 수영용 귀마개처럼 생긴 통역기를 꺼내 귀에다 꼈다. 그러자 상대가 하는 말이 예의 고저장단이 없는 건조한 음성으로 통역되어 들리기 시작했다.
“....의 시장 로싱 다긴입니다. 영웅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토바르 인들은 입 안에 나 있는 이빨을 서로 마찰시켜 초음파를 발생시켰는데, 그것이 그들이 대화를 하는 수단이었다. 진우도 사전에 자료를 통해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마수가 도시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고 달려드는 바람에 미처 준비했던 통역기를 꺼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의 말을 알아듣기는 했지만 대답을 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진우는 할 수 없이 자신의 귀를 가리킨 다음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다시 입을 가리킨 뒤에는 두 손을 교차시켜 엑스자 표시를 했다.
이런 방식의 몸짓이 그들에게 이해될지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토바르 어를 할 줄 모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진우에게는 초음파를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자신을 시장이라고 소개했던 토바르 인은 진우의 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했다.
“혹시 사냥꾼이 아니신지요? 제가 어릴 때 아버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살아 계실 때, 바다 바깥에서 살며 힘센 마수들조차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이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우리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소리를 내지는 못한다고 하더군요. 지금 영웅의 모습을 보니 생김새도 제가 들은 것과 비슷합니다. 사냥꾼이 맞습니까?”
이번에는 헌터라는 말을 아예 사냥꾼으로 통역했다. 아마 사냥꾼에 해당하는 이들의 말이 야스간의 아브칠처럼 그가 들을 수 있는 적당한 말로 변환시키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로싱 다긴이라는 시장의 이름도 사실은 정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진우는 새삼 통역기가 말을 번역하는 방식이 궁금해졌다.
그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상대는 잠시 입을 실룩거리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 몸짓이 그렇다는 뜻이지요? 전설로만 듣던 사냥꾼을 직접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굴록을 혼자서 해치우는 모습을 보니 역시 아버님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꼬리를 요란하게 흔들었다.
‘웃음을 짓는 것으로 보아 저거, 설마 기쁘다는 뜻이겠지? 물고기처럼 생겨서 목은 아예 없고 허리도 위아래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니 몸짓을 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겠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저들에게는 해파리가 촉수를 흔드는 것하고 비슷하게 보이겠네. 그렇다고 나한테 꼬리지느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의사소통할 일이 걱정이다.’
혼자서 꼬리를 흔들며 흥분하던 시장은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약간은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주변에 몰려있던 전사들에게 소리쳤다.
“이 분은 적이 아니라 전설에서 전하던 사냥꾼이시다. 물 바깥에서 오신 분이야. 모두들 창을 거두고 굴록의 시체를 정리해라. 우리는 굴록을 해치우신 영웅을 지금부터 뎅게스의 귀빈으로 모신다.”
그러자 몰려들었던 전사들이 눈에 띌 정도로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몇몇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몇 무리로 나뉘어 빠르게 흩어졌다. 일부는 도시 밑바닥에 널브러져 여전히 가느다란 핏물을 흘리고 있는 굴록이라는 마수를 향해 몰려갔고, 일부는 무너진 도시의 잔해를 정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무리가 시장과 진우를 호위하려는 듯 도시를 향한 방향으로 정렬했다.
그들이 모두 각자의 자리를 찾아 움직이고 나자 자신을 로싱 다긴이라고 밝혔던 시장이 다시 진우를 향해 돌아섰다.
“백년 만에 찾아오신 영웅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영웅을 저희 뎅게스에 모시고 싶습니다. 물 밖에서 오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 도시에는 물이 없는 방을 마련할 수 있으니 쉬시기에 불편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진우는 그제야 다소 긴장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말로 자신이 이곳에 올 때부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 * * * *
뎅게스라는 토바르 인들의 도시는 수심 5,000m 정도에 위치한 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해저의 다른 평지로부터 그 만큼의 높이만큼 솟아오른 고지대에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도시라고는 했지만 시장의 안내를 받아 헤엄쳐 가는 진우의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흰개미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군락같은 모습이었다.
이들의 건물은 모두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산다는 흰개미들의 집처럼 생긴 건물들이 여기저기 땅위로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시장이 진우를 데리고 간 곳은 그 가운데에서도 도시 중앙에 있는 높은 솟은 탑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건물 여기저기에 커다란 공 모양의 발광체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되어 있어서 도시 전체를 밝히고 있었다.
건물의 색깔마저 엷은 하늘색에서부터 분홍색, 노란색 등의 다양한 빛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어 마치 동화 속의 해저 용궁을 향해 가는 느낌이었다.
시장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거대한 탑 주위에는 수많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아마도 건물의 입구인 것 같았다. 진우는 앞서가는 시장을 따라 그 입구들 가운데 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주변의 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건 돌을 녹여서 붙인 것 같은데?’
처음에는 예쁜 빛깔의 돌들을 가져다가 아교처럼 끈기 있는 무언가를 이용해 붙여 만든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아도 돌들 사이에 특별한 이음새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돌이 땅위에서 자라나서 수십 미터 높이의 탑이 된 것 같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깊은 바다 속에서 어떻게 돌들을 녹여 붙였지?’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은 그걸 물을 방법이 없었다. 진우는 궁금한 것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은 시장의 안내에 따라 탑 중앙에 있는 넓은 홀로 짐작되는 곳에 이르렀다.
축구공보다 조금 큰 구형의 발광체가 벽과 천장에 박혀 있어 주변의 풍경을 환히 볼 수 있는 밝은 장소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여성체로 보이는 토바르 인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재빨리 헤엄을 쳐서 시장에게로 다가왔다.
시장은 그녀에게 진우를 소개했다.
“너도 어릴 때 들은 적이 있을 거다. 물 밖에서 오신 사냥꾼이시다. 우리 도시를 부수며 행패를 부리던 굴록을 혼자서 해치우신 분이다.”
시장이 그렇게 말을 하자 토바르 여성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진우는 그 모양이 마치 영화에 나오던 아기 돌고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깨쯤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솟아나온 두 개의 가늘고 탄탄한 팔 때문에 돌고래와는 전혀 달라 보이기는 했다.
그녀에게 진우를 소개한 시장은 이번에는 진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 손녀인 톨이라고 합니다. 영웅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러자 톨이라는 토바르 여성이 진우를 향해 몇 가지 손동작을 했다. 그게 인사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진우로서는 역시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끄덕이자 시장은 다시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손녀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도시가 난장판이 되는 바람에 다소 경황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 저녁에 조촐하게나마 환영회를 열 생각이다. 사람을 시켜 원로들을 부르게 하고 환영회 준비를 해야겠다.
너는 준비가 끝날 때까지 영웅에게 먼저 쉴 곳을 안내해 드리고 그곳을 물 없는 방으로 만들어라. 백 년 만에 우리 도시를 찾아온 귀빈이시니 잘 모셔야 한다.
”
“알겠습니다.”
톨이라는 여인은 진우를 향해 두 손을 가슴에 모으더니 몸을 돌려 진우를 안내했다. 그녀는 먼저 홀 주변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득 담아 놓은 듯한 주머니를 꺼내더니 그것을 허리로 짐작되는 곳에 매었다. 그리고는 다시 커다란 주머니를 하나 꺼내 그 안에 동그란 발광체를 여러 개 꺼내 담았다.
모든 준비를 마쳤는지 진우를 향해 살짝 몸을 돌린 그녀는 그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앞장서서 어디론가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손에 들려 있는 공 모양의 발광체가 다소 어두운 통로를 밝히고 있었다.
톨은 진우를 데리고 사방으로 미로처럼 복잡하게 뚫린 통로를 이리저리 돌아나가더니, 어느 한 곳에 이르자 갑자기 위를 향해 비스듬히 뚫린 구멍이 있는 벽으로 다가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진우가 그녀를 따라 구멍 속을 헤엄쳐 나가자 바닥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모두 박힌 방이 나타났다.
그곳에 이르자 톨은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여러 개의 발광체를 꺼내더니 벽과 천장에 나 있는 홈 속에 그것들을 하나씩 끼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일을 마친 톨은 이번에는 허리에 매고 있던 주머니에서 엷은 하늘색의 돌 하나를 꺼내서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갑자기 돌에서 무수한 공기방울이 뽀글거리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을 채우고 있던 물이 순식간에 바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밖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방에서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톨은 재빨리 처음 들어왔던 바닥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더니 하늘색 돌을 쥔 손만 구멍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방에서 물이 모두 밀려나고 바닥의 구멍에만 물이 찰랑거릴 정도가 되자 그녀는 다시 돌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돌에서 나오던 공기가 멈췄는지 더 이상 물이 밀려나지 않았다. 그녀는 물이 빠진 방안에 서서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진우를 향해 예쁘게 웃더니 구멍 속의 물에 몸을 담근 채 그를 향해 이리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진우가 구멍 속으로 따라 들어오자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분홍색의 돌을 하나 꺼내 진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돌을 방 안에 놓아두면 방안의 공기가 계속 깨끗한 상태로 있을 거예요. 그럼 저는 물러갔다가 환영회 준비가 다 되면 다시 모시러 올게요. 편히 쉬세요.”
진우가 머리를 그냥 끄덕이자 톨은 예쁘게 미소를 짓더니 두 손으로 구멍을 밀며 내려가 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뒤 진우는 물 밖으로 나와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방을 둘러보며 감탄을 했다.
“설마 해저 5,000m에서 이런 방을 구할 수 있을 줄은 몰랐네.”
물이 없다고 해도 몸에 전해지는 압력은 여전히 엄청났다. 그 때문에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 몸 전체에 돌리고 있는 마나를 멈출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그간의 수련을 통해 더 이상 폐로 호흡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로서는 굳이 물이 없는 장소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람의 습관은 무서운 것이라서, 편히 앉아 명상을 하며 마나를 회복하기에는 마른 곳이 훨씬 편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진우는 배낭에서 천과 솜을 꺼내 아예 숨을 쉴 수 없게 입과 코를 꽁꽁 동여매었다. 몸 주위에 두른 마나 때문에 실제 몸에 전해지는 압력은 많이 줄일 수 있었지만, 허파를 통해 높은 압력의 공기가 직접 유입되면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준비를 마친 그는 방 한 구석에 있는 침상에 누워 톨이 다시 부르러 오기 전까지 잠시나마 눈을 붙이기로 했다. 토바르 인들의 거주지를 찾느라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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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도 인터스텔라를 봐야 할 듯... 다들 그 말씀을 하시는데, 정작 제가 본 적이 없어서...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