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지구로 돌아온 진우는 타르코스 소장에게 야스간에서의 훈련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울러 그곳에서 플레비크의 상급 전사들 가운데 하나인 프레일을 해치웠음을 보고했다.
“그럼 이제 플레비크 인들 가운데 상급 전사는 아홉으로 줄어든 셈이구나. 고맙다.”
진우가 동조의 단계에 들어선 플레비크의 상급 전사를 쓰러트린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첫 번째로 상대했던 루살카의 경우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급 전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반면에 이번에 상대했던 프레일의 경우 가진 바 실력도 상당했지만, 일을 처리하는 신중함에 있어서 예전의 루살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런 프레일을 쓰러트린 것이기 때문에 진우 본인은 물론 자세한 전말을 전해들은 타르코스의 기쁨 역시 작지 않았다.
타르코스는 진우가 이제 동급의 상대와 일대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크게 만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기쁨은 진우가 던진 질문으로 인해 급격하게 사그라지고 말았다.
“소장님, 플레비크 인들이 니코레임을 점령한 뒤에 그곳의 니코레임 인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고 일부를 노예로 삼았다고 하던데요. 그게 사실인가요?”
진우의 질문에 타르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니코레임 인들이 다 헌터는 아니야. 그런데 플레비크 인들은 강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 니코레임이 정복된 뒤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강하지 못한 자들은 거의 다 목숨을 잃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하지만 아마 중급 이상의 헌터들이라면 죽이지 않고 종속의 낙인을 찍어 노예로 만들었겠지. 그게 플레비크 인들이 늘 하던 방식이니까. 말했듯이 그들은 강한 자를 종속시켜 노예로 삼으면 그만큼 주인의 힘이 강해지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강한 노예를 많이 만드는 게 플레비크 인들이 행성을 정복하는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하지만 진우가 묻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럼 만약 제가 니코레임으로 가서 그곳을 지배하는 상급 전사들을 죽이면, 이미 노예가 된 다른 니코레임 인들도 모두 죽지 않나요?”
그 말에 타르코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될 거야. 주인과 노예가 다른 행성에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주인이 죽을 경우에는 1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종속의 낙인이 풀어진다고 하더군. 하지만 같은 행성에서 주인이 죽는다면 그 노예들도 함께 죽고 말지.”
“그럼 설사 제가 니코레임에 있다는 두 명의 상급 전사들을 동시에 상대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직접 가서 녀석들과 싸우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나요?”
진우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자신은 니코레임 인들이 고향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돕고 싶은 것이지, 그곳에 남아 있던 다른 니코레임인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수련이 끝나고 힘이 충분히 강해졌다고 해서 무작정 니코레임으로 쳐들어갔다가는 원하지 않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그가 플레비크 전사들을 모두 쓰러트린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 현재 그곳에 남아 있는 다른 니코레임 인들이 몰살을 당하는 참극이 빚어진다면 그건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결과였다.
진우는 니코레임 행성인들이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를 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우의 질문을 받고도 타르코스는 선뜻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동안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지구에 있는 니코레임 인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분명히 나지 않았네.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니코레임을 지배하고 있는 플레비크 전사들이 그곳을 나와 다른 행성에서 자네를 비롯해 우리 쪽에서 동원한 헌터들과 결전을 벌이는 것이지. 하지만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야. 게다가 평의회의 의원들 중에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니코레임으로 직접 쳐들어가서 결판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네.”
“동족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니코레임을 탈환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건 조금 심한 생각 아닌가요? 지구로 망명한 사람들보다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이 더 많을 텐데요?”
진우의 말에 타르코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아직까지는 대다수의 평의회 의원들도 그런 방식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있어. 하지만 사실 지금까지는 그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지. 어쨌든 자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니코레임에 있는 플레비크 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망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지지부진하게 몇 번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네. 많은 의원들이 무작정 니코레임으로 쳐들어가자는 견해에는 분명히 반대의 뜻을 표시하고 있어. 그러나 노예 상태로 평생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내는 이들도 있었네. 그들에 말에 의하면 자유를 잃은 노예의 삶은 더 이상 니코레임 인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 없으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게 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지.”
진우는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지금까지 남을 존중하는 종족이라고만 생각했던 니코레임 인들 가운데 그런 과격한 생각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진우는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진정으로 특정한 삶이 다른 방식의 삶보다 무조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그들의 목숨마저 함부로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진우는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할 수 없었다.
‘되도록 플레비크의 지배자들을 다른 행성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겠군.’
진우는 타르코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그런 결심을 했다. 그는 지구에 있는 니코레임 인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든 현재 종속의 낙인이 찍힌 채로 고향별에서 살고 있는 다른 니코레임 인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길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도와준 타르코스를 비롯한 외계인들이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과는 무관한 문제였다. 자신은 지구인이었고, 지구인의 가치관은 니코레임인들과는 같을 수가 없었다.
진우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서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진우의 표정이 여러 번 변하는 것을 본 타르코스 소장은 엷은 미소를 짓더니 별 말 없이 다음 행선지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다음은 물의 행성 토바르인가?”
“네. 오늘 하루만 지구에서 쉬고 내일 바로 떠나려고요.”
그러자 타르코스 소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육 개월 만에 돌아온 것인데 그렇게 바삐 떠나야 하다니, 뭐라 할 말이 없네.”
그 말에 진우는 그저 씩 웃었다.
“그 대신 필요한 물건 준비하는 걸 좀 도와주세요. 내일 낮에 출발할 생각인데 그 전에 스승님을 비롯해서 몇몇 분들을 만나려면 준비할 시간이 빠듯할 거 같아서요.”
“그러지. 행성에 대한 것은 이미 숙지했으리라 믿고 준비는 내가 대신 해 주겠네.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그곳에 가면 당분간 잠을 거의 자지 못할 수도 있네.”
그러자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게 다 훈련인데 할 수 없죠 뭐. 그리고 며칠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충분히 버틸 수 있어요. 이제 체력이라면 자신 있거든요.”
진우가 토바르에서 겪을 일은 며칠 자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타르코스 소장은 진우의 자신감이 그냥 해보는 소리라는 걸 뻔히 알았지만 더 이상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자신들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으니 더 말을 해봤자 스스로도 민망할 뿐이었다.
* * * * *
진우는 지구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하루 밖에 되지 않는 탓에 연락이 닿는 사람들만 급하게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자리에는 조승운 스승과 장수덕 박사, 소현, 그리고 김상곤과 그의 아내인 박화정이 함께 했다.
김상곤은 진우에게 굳이 그들의 아이를 보여주겠다며 함께 데리고 가려 했지만, 진우의 일정을 전해들은 박화정이 그런 그를 말리고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나왔다. 정태와 도훈은 외계 행성에 나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소현이도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졸업이군.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세월이 빠르긴 빨라.”
조승운 스승이 그렇게 말하자 소현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식사가 끝나고 간단한 음료가 디저트와 함께 나오자 진우는 오늘 이들을 만나면 꼭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마나를 마나 스톤이나 마나 크리스털의 형태로 체내에 저장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가벼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던 대화가 갑자기 뚝 끊겼다. 한참 만에 장박사가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로 진우에게 물었다.
“자네가 뭘 알아냈다고?”
“마나를 저장하는 새로운 방법이요. 인간도 마수들처럼 몸 안에 마나 스톤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어쩌면 마나 크리스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조승운 스승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말이냐?”
질문을 하는 그의 눈이 진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는 야스간에서 있었던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그들에게 자신이 알아낸 마나를 결정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한 뒤부터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일행들은 숨소리조차 거의 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일행들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장수덕 박사였다.
“자네는 지금 몸 안에 마나 스톤이나 마나 크리스털을 만들었나?”
장수덕 박사의 질문에 진우가 고개를 젓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무래도 당분간은 자네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그러자 일행들이 모두 장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왜? 라는 의문이 강하게 떠올라 있었다. 장박사는 그들의 눈을 의식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진우에게로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인데 말이야, 나는 마수들이 몸 안에 마나 스톤을 품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반드시 좋은 일인지에 대해서 약간 의구심을 갖고 있네. 마나 스톤이 있는 마수들이 보통의 포식자들에 비해 상당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마수들 역시 그 힘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네. 물론 따로 실험하거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아직까지는 모두가 그냥 가설로만 품고 있는 생각이기는 하네.”
그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도 진주조개를 알 걸세. 조개들 가운데에는 입 안에 아주 예쁜 진주를 키우는 것들이 있지. 그런데 그 진주라는 게 말이야, 조개에게는 사실 인간으로 치자면 불필요한 혹 덩어리나 다름없는 것이네. 입 안에 들어온 이물질 주변에 조개껍질 가운데 진주층이라는 부분을 이루는 성분들이 달라붙은 것이지. 사람들이나 그 색깔에 감탄하지, 조개의 입장에서는 입 안에 큰 혹이 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당연히 조개가 살아가는 데에도 이롭지 않지.”
진우는 장박사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것은 그가 마나 스톤과는 전혀 다른 마나 기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나 기관은 진우에게 엄청난 양의 마나를 간직할 수 있는 마나 저장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이미 진우의 신체 조직과 완전히 동화되어 하나의 신체 기관이나 다를 바 없는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만들어졌던 와카반의 마나 기관만 해도 진우의 의사에 따라 온전히 작동하지는 않는 구석이 일부 있었다. 불완전하나마 마나 기관이 되었어도 그랬는데, 이물질이나 다름없는 마나 스톤이 몸속에 있다면 어떨까? 그 이물감은 둘째치더라도 녀석이 자기가 들어앉은 주인의 의지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장박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나는 예전부터 최상급 헌터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수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데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네. 뭐 자네가 케이튼에서 보았다는 괴조 정도라면 단독으로 최상급 헌터와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사실은 그런 녀석은 극히 드물지. 행성 전체로 따져도 몇 마리 없을 정도야. 게다가 외계인들 중에는 가끔 있다는 동조 단계의 헌터에 이르게 되면 그런 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마수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어. 내가 동조 단계의 헌터가 지닌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모르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런 마수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일세. 그것이 아마 체내에 마나 스톤을 품는 방식으로 강해질 수 있는 데에는 엄격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맞는 말이었다. 무니악 행성의 윌러킹은 제법 강했지만, 마나 크리스털의 지배를 받는 녀석이었고, 이니스프리에 있던 와카반의 경우는 그 자체가 마수가 아니라 아예 마나 크리스털이 변형된 것이었다.
진우는 장박사의 말을 듣고는 소현을 비롯한 지인들에게 체내에 마나를 결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줄까 하던 생각을 깨끗이 접었다. 조승운이나 김상곤의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것이었다.
물론 그들로서는 그런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지만.
진우는 저녁 식사 자리가 파한 뒤 소현과 장박사와 함께 따로 늦은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은 충분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나를 각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전문 헌터 자격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진우가 전에 그녀의 마나를 손봐 준 뒤로 소현의 실력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래서 3학년 때의 전투 훈련 과목은 오히려 2학년 때보다 수월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진우는 그 자리에서 장수덕 박사에게는 체내에 마나를 결정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소현이 함께 듣는 자리였다.
그는 모든 설명을 마치고 나서 장박사에게 앞으로 마수들의 마나 스톤의 구조를 자세하게 연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마수들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나 스톤이 각자의 신체의 특징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살펴달라고 했다. 그로서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남들도 자신처럼 몸 안에 새로운 마나 기관을 만들 수 없을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박사는 새로운 연구 주제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진우의 부탁을 쾌히 받아들였다.
지인들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회포를 풀기는 했어도 진우는 다시 하루 만에 지구를 떠나야했다. 그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별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꾹 누른 채 다음 행선지를 향해 포털을 탔다. 다음 목적지는 물의 행성 토바르였다. 육지가 하나도 없이 행성 전체가 물로 덮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