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35화 (135/235)

135화

니코레임을 지배하고 있는 두 명의 상급 전사 가운데 하나인 노르호지가 다스리는 곳은 벨푸가 있던 곳과는 거의 행성 반대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스탄은 무중력 비행기를 타고도 거의 하루를 꼬박 날아서야 노르호지가 머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전에 니코레임 연합 의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때에 사용하던 커다란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다시 사흘 동안 구금 상태에 있다가 간신히 노르호지를 만날 수 있었다.

“네가 아스탄이라는 쓰레기인가?"

아스탄에 대한 노르호지의 첫 마디는 신랄했다. 아스탄은 그 목소리에 덕지덕지 묻어나오는 불쾌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추러 들었다.

자신의 동족을 배신하고 혼자만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니코레임 인들보다는 오히려 플레비크 인들에게 더 혐오감을 주는 것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니코레임 인들과는 달리 플레비크 인들은 ‘하나이면서 전체’라는 사고방식에 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아스탄은 전체를 저버린 하나였다. 그런 하나는 플레비크 인들의 입장에는 살려둘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스탄은 목숨을 구하기 위한 그의 선택이 점점 자신을 더 깊은 구렁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아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니코레임 출신의 아스탄이라고 합니다.”

그는 강제로 무릎을 꿇린 자세에서 오히려 허리를 더 깊게 숙여 고개를 바닥에 대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주변에 늘어서 있던 플레비크 인들 사이에서 그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조용히 해라.”

하지만 그런 웃음소리는 노르호지가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세게 내리치며 호통을 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르호지는 주변의 플레비크 인들을 사나운 눈초리로 돌아보더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아스탄의 앞으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던졌다.

아스탄은 고개를 살짝 들고 손을 뻗어 눈앞에 떨어진 종이를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다섯 개의 행성 목록과 좌표, 그리고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가 종이를 살피는 것을 본 노르호지가 다시 말을 꺼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니코레임의 콴톤 의장이 우리에게 그 목록을 보냈다. 강진우라는 지구인이 앞으로 그 행성들을 방문한 예정이라는군. 강진우가 동조 단계에 들었다는 그 지구인이 맞는가?”

노르호지의 말에 아스탄은 얼른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지구인으로서는 최초입니다.”

“네가 한 번 말해 봐라. 도대체 콴톤이 왜 우리에게 그의 행적을 알리려는 거 같은지.”

그의 말에 아스탄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왜라니? 플레비크 인들이 동조 단계의 전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말씀하셨듯이 그 자는 동조의 단계에 들었습니다. 플레비크 인들은 타고난 전사라고 들었습니다. 강자가 있으면 그와 싸워 복종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까? 그는 동조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복종시키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노르호지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날렸다.

“맞아. 우리가 강자와의 싸움을 좋아하기는 하지. 그 자를 복종시킬 수 있다면 힘이 더 강해질 수 있으니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나정도 되면 꼭 그렇지도 않아. 그것보다 내 얘기는 왜 니코레임 인들이 자신의 손으로 키운 상급 전사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리느냐는 것이다. 네놈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니코레임 인들 역시 그동안 지구에 머물면서 단체로 돌연변이라도 일으킨 건가?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

아스탄은 그제야 노르호지의 질문이 이해가 되었다. 평소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 자신이 긴장을 해서인지 금방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마 지구를 보호하려는 뜻일 겁니다. 플레비크 인들이 강진우를 찾기 위해 지구를 직접 방문할까 두려웠겠지요. 지구에는 플레비크 인들을 상대할 전사가 많지 않으니까요.”

아스탄의 말은 반만 맞는 것이었다. 지구에는 최상급 전사가 백 명 가까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플레비크의 중급 전사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급 헌터라면 하급은 몰라도 중급 전사만 해도 버거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중급 헌터 이하가 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동조 단계에 든 상급 전사가 백 명 이상의 중급 전사를 대동하고 지구에 쳐들어오면 전 세계의 헌터들이 합심하여 상대한다고 해도 그들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문제는 한 명의 상급 전사가 전장에 나설 때에는 최소한 천여 명의 전사들과 함께 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핵을 쓰는 것과 같은 극약처방을 해야 하는데, 그런 방법으로는 한 번이라면 몰라도 두 번 세 번은 곤란했다.

지구인들이 사용하는 핵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이 플레비크 인들에게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지구만 황폐화될 우려가 있었다.

아스탄의 대답을 들은 노르호지는 혀를 찼다.

“니코레임 인들은 아직도 물렁하군. 자신들보다 문명도, 개인적인 전투 능력도 모두 떨어지는 행성을 위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다니. 그러니 레비스 같은 훌륭한 전사를 지니고도 결국 우리에게 행성을 빼앗겼지. 도대체 마나 하나 없다는 지구를 우리가 굳이 쳐들어갈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지. 하긴 그걸 아니까 강진우를 굳이 다른 행성으로 보냈겠지.”

지구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아스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얘기를 노르호지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자신의 처지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때 다시금 노르호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콴톤 의장이 보내 준 목록에는 행성의 이름과 좌표, 그리고 강진우라는 자가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의 이름만이 적혀 있더군. 앞으로 오일 동안 시간을 줄 테니 너는 그 목록에 나와 있는 행성과 장소에 대해 최대한 자세한 정보를 입력해라. 그 일이 끝나면 네 문제를 처리하겠다.”

아스탄은 속으로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다니? 어떻게? 그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실지...”

그러자 노르호지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벨푸가 지구의 위치를 알려주면 네 목숨을 살려주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비록 이제 와서 지구의 위치를 알 필요는 없지만 말이 나온 김에 정보를 입력하면서 그것도 함께 기록하도록 해라. 하지만 너를 이곳에서 그냥 살게 해 줄 수는 없어. 그러느니 차라리 쓸 데 없이 지구의 위치를 묻지 않고 그냥 네놈을 죽이는 게 낫지. 그 일이 모두 끝나면 너는 헬케인 행성으로 추방한다.

그 목록에 적혀 있는 마지막 행성이다. 그곳에서 자유를 누리든 말든 네놈이 알아서 재주껏 살아가도록 해라.

그게 싫으면 이 자리에서 지금 죽던가.”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스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자식. 하필이면.’

헬케인은 지구보다 더 큰 행성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헬케인 인들의 수는 고작 천 만을 간신히 넘는 정도였다. 그들은 전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가 플레비크 인들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중급 이상의 마수들도 흔했다. 그래서 니코레임 인들도 수련을 목적으로 하는 상위급 헌터들이 아니면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너무 위험했던 것이다.

헬케인에 관해서는 아스탄도 거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헌터로서의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그런 곳을 방문할 생각이 전혀 없어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노르호지로서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무 행성이나 찍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아스탄은 최악의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  * * * *

모필로 마을을 떠나 이틀 만에 눈물의 연못에 도착한 진우는 그곳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식수를 보충한 다음 달구지에 매여 있던 팜플을 풀어놓아 주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팜플이 본능적으로 진입을 거부하는 지역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을을 떠나기 전 촌장이 했던 조언에 따라 연못 부근에 팜플이 먹을 수 있는 먹이를 잔뜩 내려놓았다. 촌장이 미리 챙겨준 것이었다.

어차피 부근에는 이들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풀어 놓아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연못 부근을 배회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면 이십 일 후 모필로 마을 사람들이 식량을 싣고 와서 이들을 데려갈 것이라고 했다.

팜플을 풀어놓은 진우는 자신이 직접 달구지를 끌고 약탈의 계곡으로 향했다. 적지 않은 식량과 물품들을 실은 달구지는 제법 무거웠지만, 진우의 근력은 이미 그 정도에 힘들어 할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달구지를 끌고 한 시간 정도를 이동하자 드디어 약탈의 계곡의 영역 안에 들어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으로부터 조금씩 마나가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견딜 만 하지만 안으로 들어설수록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겠지?”

타르코스는 이번 수련이 힘들지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수련을 마치기까지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예전의 경험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른 이야기였다.

“약탈의 계곡 한가운데에서도 더 이상 마나를 빼앗기지 않고 견딜 수 있다면 일단은 수련이 성공한 것이라고는 했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그는 조금 더 나아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는 그곳에서 검술을 수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마나를 이용한 검술을 사용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온몸은 물론이고 검에도 마나를 불어넣어야 했다. 그 상태에서도 외부에 마나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수련할 수 있다면 마나를 다루는 자신의 능력은 한층 더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동조를 이용한 기술을 펼칠 수 있어야겠지.”

진우 스스로도 그것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약탈의 계곡에서 그렇게 하려면, 계곡의 흡수력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주변의 마나를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다른 동조 단계의 헌터들조차 그런 식의 수련에 도전을 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배의 단계까지 오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심 그 단계까지 성과를 얻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동조를 완성하는 길로 성큼 다가설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저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겠지.”

물론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의 단계에 도달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느냐에 따라 사정이 달라질 수 있었다. 진우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마나를 볼 수 있는 자가 마나를 지배할 수 있다는 얘기가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겠지.”

달구지를 잡은 진우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 *

며칠 동안 계속 퇴짜를 맞는 바람에 머리를 쥐어 짜내다시피 해서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해낸 아스탄은 결국 그가 그토록 꺼려했던 헬케인 행성으로 강제로 보내지고 말았다. 간단한 식량과 장비만 주어진 채 헬케인을 향해 열린 포털 속으로 등을 떠밀려 내던져진 그는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포털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추방되고 일주일가량 지났을 때 한 명의 플레비크 상급 전사가 노르호지를 방문했다.

“어서 오게, 페르일. 연락은 받았지만 자네가 설마 그 지구인에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군. 지금 있는 곳은 조금 무료하던가?”

노르호지의 말에 싱긋 웃음을 지은 페르일은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에 앞서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같은 상급 전사지만 노르호지는 그보다 무려 이십 년 앞서 동조의 단계에 올라선 연장자였다.

상급 전사들은 서로 독립적인 존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선배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게 좋았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정리되고 나니 요즘은 통 할 일이 없어서요. 그렇잖아도 일 년 정도 뒤에는 그만 본성으로 귀환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새로 진출할 행성을 모색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흥미로운 얘기가 들려와서요.”

노르호지가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페르일을 쳐다보았다.

“설마 자네가 황무지나 다름없는 지구에 관심을 둘 리는 없고, 야스간까지 직접 강진우라는 자를 잡으러 갈 건가?”

페르일이 비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조 단계에 든 상급 전사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뭐 선배 정도라면 그마저도 더 이상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저는 아직 조금 더 커야 해서요. 선배가 직접 가실 생각이 없다면 제가 도전해 볼까 해서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페르일의 말에 노르호지가 갑자기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는 다소 냉랭한 눈빛으로 페르일을 쳐다보았다.

“좋다. 네 말대로 나는 그 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그 점은 벨푸 역시 마찬가지야. 그러니 강진우는 너에게 양보하겠다. 하지만 명심해라. 아무리 귀여운 고양이라도 함부로 데리고 놀 생각을 하다가는 코를 할퀴게 될 수도 있어.”

그러자 페르일이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까딱 숙였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본성에도 녀석은 제가 처리하는 걸로 보고하겠습니다.”

노르호지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페르일은 다시 싱긋 웃고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진 뒤에 혼자 남아 있던 노르호지가 갑자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열심히 해 봐라 페르일. 지금은 관심이 없지만 만약 네가 당한다면 우리도 녀석에게 조금 관심을 갖게 되기는 할 거야.”

진우가 야스간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나던 시점에서 니코레임 행성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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