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진우는 모필로 마을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아브칠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전하는 이야기와 미묘하게 다르기는 했지만, 신장이나 모양새 등의 기본적인 형태가 비슷했다. 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할 줄 모른다는 점과, 무엇보다 그의 배낭 위에 쌓아올린 많은 양의 가죽들이 다른 의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이 아브칠이라고 부르는 니코레임의 헌터들은 그동안 야스간을 방문할 때마다 절대로 이곳의 원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지구에서와는 달리 새로운 문명을 전파하지도 않았다. 모든 면에서 그들과의 마찰을 피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반면에 헌터들이 야스간 현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사냥한 짐승의 가죽은 평범한 야스간 인들로서는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나운 맹수나 마수의 것이었다. 품질이 좋기도 했지만 매우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브칠이 한 번씩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야스간 인들은 그가 가져온 새로운 가죽을 구매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구경이라도 하려고 몰려들고는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브칠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본성을 플레비크 인들에게 빼앗긴 니코레임 인들이 관광이나 수련을 위해 이곳을 방문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야스간 인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된 맹수나 마수의 가죽을 거의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새로운 아브칠이 가죽을 잔뜩 짊어지고 마을을 찾은 것이었다.
지금도 진우가 타고 온 달구지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 마치 진귀한 동물을 구경하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진우의 배낭 위에 묶여 있는 가죽들을 보고는 한결같이 탄성을 내뱉었다. 특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최하급 마수의 가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우가 몰려든 인파에 다소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야스간 인 한 명이 마을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진우에게 인사를 했다. 진우의 입장에서는 얼굴에 다소 주름이 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야스간 인들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모필로의 촌장인 스튜밀이라고 합니다. 무려 칠십 년 만에 아브칠을 뵙는군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진우는 엉겁결에 자신도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진우가 자신의 인사에 반응을 보이자 약간 긴장감이 어려 있던 촌장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저도 어릴 때 먼발치에서 한 번 본 것 말고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브칠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묵으실 곳을 특별히 정하지 않으셨으면 오늘은 저희 집에 모시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진우는 그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몰려든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 하고 있던 참이었다. 진우가 스튜밀의 말에 따라 배낭을 둘러매고 달구지에서 뛰어내리자 촌장은 그에게 손짓을 하며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거의 비슷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지어진 마을의 집들 가운데 그래도 약간은 커 보이는 건물이었다.
진우가 촌장의 뒤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하자 달구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우르르 쫓아왔다. 그 모습을 본 촌장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진우를 향해 물었다.
“실례지만 가지고 계신 가죽은 혹시 파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촌장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우의 대답을 확인하자 뒤로 돌아서더니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일단 아브칠께서도 쉬어야 하니 가죽에 관한 일은 나중에 논의하도록 하세. 아브칠께서 가지고 오신 가죽을 판다고 하셨네. 한스콘과 아틀, 케이널드가 저녁 식사 후에 우리 집으로 와서 나하고 함께 가죽을 분류하고 등급을 매기도록 하면 어떻겠나? 너무 이렇게 몰려들면 곤란하니 다른 사람들은 그만 돌아가서 나중에 소식을 듣도록 하게.”
그러자 몰려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삽시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촌장은 돌아가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을 붙잡고는 뭔가를 지시하는 듯했다.
촌장의 지시를 받은 그들은 진우 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얼핏 무질서해 보이면서도 나름대로 일사불란한 모습이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진우는 그들의 성향에 대해 기록된 정보를 떠올렸다.
‘부지런하고 순박하며, 협동심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밝고 명랑하다.’
촌장의 집은 제법 아늑하고 편안했다. 내부 장식은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하나같이 정성이 깃든 솜씨로 만든 것들이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촌장의 식구들과 함께 한 저녁 식사에서도 투박하지만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나왔다. 다만 식탁부터 의자까지 모든 가구들이 그들의 신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키가 190cm에 가까운 진우로서는 의자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친 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음식을 먹어야 했다.
진우는 식사 후에 내온 차를 마시며 촌장의 손자와 손녀로 보이는 두 꼬마로부터 한동안 폭풍 같은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촌장과 그의 자식들로 보이는 이들은 겉으로는 그들을 말리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함께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 이외에는 달리 표현의 수단이 마땅치 않은 진우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우가 그렇게 난처한 상황에 시달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방문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촌장의 아들이 나서서 문을 열자 밖에는 아까 촌장이 지목했던 세 사람과 마을 청년 몇몇이 서 있었다. 청년들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커다란 침대와 식탁, 의자 등을 들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다른 분이 촌장 직을 맡고 있을 때, 저희 마을에 아브칠 한 분이 방문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분을 위해 만들었던 침대와 가구들입니다. 그 동안 마을 공동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인데, 저희가 사용하는 것을 쓰기에는 불편하실 것 같아서 이리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진우는 촌장의 배려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지만 그저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밤은 도대체 어떻게 자야 하나 하는 문제로 약간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촌장의 손자, 손녀들이 물러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가구를 들고 왔던 젊은이들에게 붙잡힌 진우가 또 다시 시작된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에 촌장을 비롯해서 아까 대표로 지목되었던 세 사람이 그가 가져온 가죽을 하나하나 검사했다. 그들은 검사를 하면서도 다소 시끄러울 정도로 열심히 토론을 해 가면서 가죽에 대한 품평을 하는 눈치였다.
‘기록에는 그런 얘기가 없더니만, 야스간 인들이 의외로 수다스러운 모양이네.’
진우가 그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사가 모두 끝났는지 촌장이 진우에게 다가와 주변에서 젊은이들을 물러나게 했다.
“아브칠께서 가지고 온 가죽은 저희 마을이 한꺼번에 모두 사들이기에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윈시와 지누리의 가죽도 있더군요. 혹시 그들의 몸에서 마나 스톤도 얻으셨습니까?”
아브칠은 굳이 번역을 하지 않고 그냥 통역하더니, 마나 스톤은 진우가 알아들을 수 있게 바뀌어 들렸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세 개의 마나 스톤을 꺼냈다.
그들이 윈시라고 부르는 최하급 마수에게서 하나, 그리고 지누리에게서 얻은 것이 두 개였다. 진우가 꺼낸 마나 스톤을 본 촌장 일행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다시금 감탄을 거듭했다.
“마나 스톤은 석 달에 한 번 이곳에 들르는 상인들에게 팔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귀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저희로서는 사용할 방법도, 구매할 능력도 없습니다. 아브칠께서는 가죽과 마나 스톤 대신 특별히 구하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진우는 촌장의 질문을 듣고 난감했다. 구하는 물건이야 많았다.
텐트와 취사 장비는 배낭에 넣어 가지고 왔지만 식수와 음식을 비롯해 이것저것 머무는 동안 필요한 소모성 물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그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촌장 일행이 또다시 저희들끼리 뭔가를 수군거리더니 촌장이 한스콘이라고 불렀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아브칠께서는 혹시 약탈의 계곡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진우는 그의 질문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해보니 자신의 목적지를 그들이 알고 있는 게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예전에 가끔 나타났던 아브칠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짧게 있다 돌아오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어떤 분은 몇 년 동안 계속 머물기도 했습니다. 아브칠께서도 혹시 그곳으로 가서 머무시려는 겁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촌장 일행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감탄의 표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들에게 약탈의 계곡은 금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브칠은 세상에 등장할 때마다 늘 그곳으로 갔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수련을 한다고 했는데, 거기서 아브칠이 정확히 무엇을 하다 오는지 그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약탈의 계곡으로 향한 아브칠로 인해 자신들이 해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약탈의 계곡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계실 계획이신지요?”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수련을 마치는 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그로서도 선뜻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진우의 고민을 눈치 챈 듯 촌장이 다시 나섰다.
그는 진우 앞에 지도 한 장을 펴 놓았다. 그리고는 지도의 왼쪽 끝에 표시된 지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설명을 했다.
“이곳이 약탈의 계곡입니다. 주변이 온통 황무지입니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것은 물론 물도 구할 수가 없는 곳이지요. 약탈의 계곡을 둘러싼 사방 82Km 정도가 모두 그렇습니다. 계곡의 중심부에서 끊임없이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82Km라는 복잡한 숫자가 나온 것은 아마도 야스간의 거리 단위를 번역하는 과정에 생긴 문제인 것 같았다. 촌장은 다시 오른쪽 위 중간쯤에 있는 마을을 손으로 짚었다.
“이곳이 저희 마을인 모필로입니다. 약탈의 계곡 중심부와는 377Km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팜플을 타고 쉬지 않고 달리면 이틀 거리입니다. 아브칠께서 계속 약탈의 계곡에 계실 거라면 저희가 이십 일에 한 번씩 이곳 눈물의 연못까지 식량을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이 이상은 팜플들이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촌장이 눈물의 연못이라고 한 곳은 지도에서 볼 때 약탈의 계곡에서 대략 1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중에 헌터 패드에 있는 지도를 통해 자세한 위치와 거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물이 있는 곳으로서는 약탈의 계곡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아브칠께서 가지고 오신 가죽은 모두 37장입니다. 그 중 하품이 16장, 중품이 11장, 상품이 7장입니다.
나머지 세 장은 마수의 가죽이지요. 저희가 한 번씩 식량을 배달할 때마다 그 대가로 하품 가죽 한 장을 주시면 됩니다. 중품은 세 번 배달할 때마다 한 장, 상품은 열 번 배달할 때마다 한 장을 주시면 됩니다. 혹시 남은 가죽을 팔고 싶으시면 저희가 식량을 배달할 때 미리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러면 다음 번 상인이 들를 때 식량을 배달하면서 함께 데리고 가겠습니다.
”
진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맹수와 마수의 가죽이 이들 사이에서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기록에 그에 관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마지막 기록 만해도 이미 수십 년 전 것이었다. 게다가 이들이 배달해 주겠다고 한 식량의 양이나 품질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진우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상당히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식량과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자료에 의하면 야스간 인들은 상거래에서 속임수를 쓰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가지고 계신 마나 스톤은 아쉽게도 저희로서는 구매할 여력이 없습니다. 나중에 파실 생각이 있다고 하시면 저희가 마을에 들른 상인에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들이라면 아마 마나 스톤을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진우는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걸 굳이 팔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 스톤이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진우에게는 앞으로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문제로 머리를 쓸 필요는 없었다.
* * * * *
다음날 촌장은 그를 데리고 마을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니며 식량을 비롯해 진우에게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싫증도 내지 않고 거의 모든 가게를 돌아다니며 진우에게 소개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은 모두 고르십시오. 다 고르시면 대금은 식량과 함께 일괄적으로 계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우는 칼을 가는데 사용할 숫돌을 비롯해서 활대를 교정하는데 필요한 도구 몇 개, 그리고 여분의 텐트와 모포 등을 챙겼다. 텐트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가 잘 수 있는 크기의 것을 진우 혼자 사용하면 적당할 듯 했고, 모포는 가게의 주인이 다음날까지 여러 장을 이어서 크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진우가 자신이 입을 옷을 찾는 눈치를 보이자 촌장은 치수를 먼저 재고는 나중에 식량을 배달할 때 새로 만든 옷을 가지고 가겠다고 말을 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당장은 그가 입을 옷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필로에서 이틀을 더 머문 진우는 사흘 째 오전에 두 마리의 팜플이 끄는 달구지에 촌장이 챙겨준 물건들을 모두 싣고 마을을 떠났다. 떠날 때는 또다시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입구까지 나와서 그를 전송했다. 진우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캐릭터 인형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헌터 패드를 꺼낼 수 있다면 촬영해서 가져갈 경우에 소현이가 좋아할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만 삼키며 진우는 그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동한 그는 그때부터 팜플들의 몸에 매달린 밧줄을 힘차게 흔들어 속도를 빨리했다. 두 마리의 팜플이 끄는 달구지는 그의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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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격려를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완결까지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