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31화 (131/235)

131화

마음 같아서는 아는 사람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사정을 설명하고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조승운 스승은 워낙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는 때가 제한되어 있었다. 최현은 화이트캐슬의 카슨 사장으로부터 거액의 의뢰비를 받은 뒤에 서울 인근에 커다란 저택을 짓고 있었다.

저택이 거의 완공 단계에 들어 최근에는 날마다 공사 현장에 붙어살다시피 한다는 소문이었다.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대로 효도를 할 생각이라고 했는데, 진우가 보기에는 집이 너무 커서 오히려 불편해 하시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영국에 있던 멜리사가 선뜻 한국에 오겠다고 한 것은 의외였다. 그녀는 진우가 전화를 걸어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다고 하자 대뜸 아스탄과 관계가 있는 일이냐고 물었다.

“네. 아스탄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그래. 아무래도 영국 헌터 학교와 관련된 일이니까. 언제까지 한국에 가면 되니?”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요. 되도록 빨리 뵐 수 있을까요? 조승운 스승님은 내일 저녁이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럼 나도 내일 오후까지는 한국에 도착하도록 하마. 도착하면 전화할게.”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다른 질문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최현에게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전화로 들리는 진우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다음날 저녁에 약속장소로 오겠다고 약속했다.

케이튼에 있는 조세연 박사에게는 비싼 포털비를 물면서까지 일부러 긴급 메시지를 보냈다. 만약 지구를 방문하면 자신이 포털 이용료를 부담할 테니 잠시 시간을 내 달라고 부탁했다.

답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진우는 내심 그녀가 꼭 와주기를 바랐다. 모두 자신이 이만큼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라 결정을 내리기 전에 꼭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권일도 교관과 김상곤도 부르고 싶었지만 두 사람 모두 다른 행성에 헌팅을 나가 있는 상태였다. 헌팅 중이라 급히 연락을 하기도 어려운데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던 터라 차마 헌팅을 포기하고 지구로 귀환하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  * * * *

소현이야 자주 얼굴을 보고 지냈지만 정태까지 불러 함께 저녁 식사를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김도훈과 차연희는 졸업 후에 헌터 보조원 생활을 하느라 마침 지구에 없었다.

김도훈은 아버지인 김정호가 대학에 진학을 하든지 아니면 회사에 들어오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 얘기에 의하면 본인은 최소한 하급 헌터가 될 때까지는 당분간 헌터로서 활동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고 했다.

“힘이 세지면 되지. 그럼 다 해결돼.”

진우가 식사 도중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슬쩍 말을 흘리자 정태 녀석은 별 고민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녀석다운 대답이었다.

“힘세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남들한테 피해를 입힐 수도 있잖아. 그래도 옳고 그른 건 가려야 하지 않아?.”

듣고 있던 소현이 옆에서 그건 아닐 거 같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정태가 갑자기 오른손을 치켜들더니 힘을 주어 알통이 튀어나오게 했다.

“물론 가릴 건 가려야지. 하지만 나만 가리면 뭐해? 나보다 센 놈을 만나면 결국 싫어도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결국은 힘이 곧 정의야. 힘이 없으면 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어.”

“힘세다고 자기 좋은 대로만 하다가 옆에서 너 때문에 우는 사람이 생기면?”

“아쉽지만 할 수 없지, 뭐. 그렇다고 늘 뭐가 옳은지를 따지며 살기도 어렵잖아? 솔직히 나는 정말 옳은 게 뭔지를 잘 모르겠어. 세상사람 붙잡고 죄다 물어봐라. 뭐가 옳은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봤자 결국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 수밖에 없는 거야. 그렇게 살려면 역시 힘이 있어야 하고.”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면 세상이 무법천지가 될 걸? 난 힘이 없는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소현의 말에 정태가 이번에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말이야 좋지. 하지만 그렇게 바라기만 하면서 살아 봐라. 세상이 바뀌나.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노력을 해야지. 노력도 안 하고 앉아서 남이 내 말을 들어주길 기다려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억울하면 힘을 키워야 해.”

다소 거칠기는 했지만 정태의 말도 맞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으면? 힘이 있어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 힘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에 충분한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이 진우의 고민이었다.

그때 소현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녀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난 생물학이 전공이야. 그러니까 그걸로 말할게. 가끔 엄청나게 독성이 강한 세균이 등장할 때가 있어. 그런 놈은 감염된 숙주를 단번에 죽여 버려. 그래서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결국 멸종하고 말아. 숙주가 없으면 세균도 살 수가 없는데, 세균이 너무 강하면 다른 개체에게 전염시킬 기회도 없이 숙주들이 다 죽어버리거든. 그럼 결국 그 안에 있는 세균도 살 수가 없게 돼.”

소현이 정태가 아닌 진우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가장 강한 것이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너무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것들이 오히려 끝까지 살아남아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의 고리를 이어나가는 거야. 난 다른 건 잘 모르겠으니까 내가 아는 것만 말할게. 생물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존과 번식이야. 하지만 다른 개체나 주변의 환경과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지 않는 놈들에게는 장기적으로 보면 생존도 번식도 모두 불가능해. 사자가 아무리 힘이 세도 들판의 먹이를 한꺼번에 모두 죽여 버리면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어. 자기보다 약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면 마지막에는 강한 놈도 버티지 못해. 그게 자연의 법칙이야.”

정태는 소현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자신의 전공까지 꺼내며 이야기를 하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녀가 마지막 말을 하면서 진우를 빤히 바라보자 그제서야 오늘의 분위기가 뭔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현은 오늘 저녁 식사의 분위기가 다소 무겁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우는 애써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표정에서 언뜻언뜻 묻어나오는 고민의 흔적을 잡아냈다.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지기는 했지만 그의 질문도 뭔가 가슴에 걸리는 게 있었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분위기 가라앉았네, 하하. 자, 그럼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 하자. 커피 한 잔 마시고 다들 오랜만에 영화나 한 편 보는 게 어때?”

하지만 정태는 식사를 마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슬쩍 빠졌다. 정태가 빠지자 진우와 소현도 영화 관람을 포기하고 한참 동안 차를 세워둔 채 거리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내용이 없는 겉도는 대화였다. 그가 소현을 바래다주기 위해 차를 몰고 헌터 학교 입구까지 왔을 때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진우에게 몸을 돌리고 물었다.

“괜찮은 거니?”

진우는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진우는 소현을 가볍게 껴안고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무중력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의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소현은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게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  * * * *

다음날 저녁에 조승운 스승과 최현, 멜리사, 그리고 케이튼에서 일부러 귀환한 조세연 박사까지 모두 진우의 집으로 모였다. 특이한 것은 소현의 아버지인 장수덕 박사도 자리를 함께 했다는 점이었다.

진우는 그들이 모두 모이자, 콴톤 의장과 타르코스 소장이 했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자신이 토칠라크에서 겪었던 일도 빠짐없이 모두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일행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진우 네가 이제 동조의 단계에 올라섰다는 말이구나.”

한참 만에 조승운은 느닷없이 그렇게 물었다.

“네.”

진우가 간단히 대답하자 조승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술을 간단히 펼쳐 봐라. 직접 보고 싶구나.”

진우는 체내의 마나를 꺼내 자신의 주변에 백 여 개의 마나 송곳을 띄워 올렸다.

“여기서는 제 몸속의 마나만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마나가 풍부한 행성이라면 제 마나는 쓸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의 마나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조승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나 송곳은 순식간에 흩어져 다시 진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멜리사와 최현은 굳이 마나 송곳이 아니더라도 순간적으로 진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만으로도 그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우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니코레임 인들의 부탁을 들어줄 셈이냐?”

최현이 물었다. 진우는 잠시 일행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어요. 어쨌든 그동안 받은 게 많았으니까요. 제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러자 멜리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이래서야 마치 네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전사로 사육된 것 같지 않느냐. 솔직히 지구에 헌터가 없었다고 하면 지금 인류가 누리는 여러 가지 혜택은 불가능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구인의 삶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받은 건 고맙지만 꼭 그 대가로 네가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을까?”

진우는 멜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건 그들이 우리에게 베푼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빚을 지운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은혜를 베푼 것으로 보느냐가 문제지요.”

그러자 조세연 박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따지자면 빚이겠지. 그것도 강제로 지운 빚 말이다. 처음부터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낼 생각으로 베푼 것이라면 그건 은혜라고 볼 수는 없어.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지구에 폭탄을 안고 온 것이나 다름없어. 그것도 폭탄이 된 사람이 다름 아닌 진우 너이고 말이야.”

그랬다. 만약 지구에 동조에 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애초에 플레비크 인들이 이곳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지구란 마나 하나 없는 황량한 행성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니코레임 인들이 찾아와 헌터를 양성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종속의 대상으로 탐낼 만한 인물 하나 없는 곳이 지구였다.

지구로서는 복주머니가 굴러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냉큼 집어 들어 열었는데 거꾸로 재앙이 튀어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진우가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 포털 제작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할 생각이예요.”

그 말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장박사가 나섰다.

“그건 제가 진우 군에게 말한 겁니다. 아마 외계인들로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고 싶지 않은 가장 큰 기술일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최현이 물었다. 그러자 장박사가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구인들은 상급 이상의 헌터가 될 수 있는 소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나가 전혀 없는 환경에서 나고 자란 때문이겠지요. 지금은 동조의 단계에 든 것이 진우 혼자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른 헌터들 가운데에서도 동조에 성공하는 이들이 나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플레비크 인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전투 종족이 우주에 등장하는 셈이지요. 외계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마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일 겁니다.

멜리사는 장박사의 말에 대해 조금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결국 힘을 가진 자는 그것을 쓰고 싶어 하는 법이에요. 힘 있는 헌터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면 그들 사이의 싸움이나 전투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피해가 생기지 않을까요?”

장박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헌터들의 싸움은 아마 주로 지구 밖에서 일어날 겁니다. 지구는 마나가 없기 때문에 헌터들이 싸우기 힘든 곳이니까요. 더구나 이곳은 이제 자원도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힘을 과시해 봤자 외계 행성에 비하면 사람을 부리는 것 말고는 얻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헌터들끼리의 싸움은 단순한 무력시위든, 아니면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든 그 무대가 대개는 외계 행성이 될 것 같습니다.

지구는 일종의 안전지대나 중립지대가 되겠지요.”

그때 조세연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끼어들었다.

“헌터들의 싸움보다는 강대국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요? 예전에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신대륙, 그리고 아시아를 두고 벌였던 패권 전쟁이 이번에는 자원이 풍부한 외계 행성을 놓고 재현될 가능성이 있어요. 지금과는 달리 헌터들을 군대나 하수인으로 만들려고 할지도 모르고요. 헌터들이 아무리 초인과 같은 힘을 가졌어도 만약 살고 있는 도시 한 복판에 핵이 떨어지면 버틸 수는 없어요. 포털 제작 기술이 인류에게 희망의 원인이 될지, 절망을 잉태한 씨앗이 될지는 알 수 없어요.”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진우도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진우는 입을 뗐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인류 모두가 힘을 합해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저나 여기 계신 분들이 걱정한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명히 분쟁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두려워서 언제까지나 움츠리고만 있어서는 더 잔인한 미래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니코레임 인들처럼 지구에 우호적인 외계인이 방문했던 것은 운이 아주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음에 우리를 찾아올 외계인들도 그들과 같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망상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진우는 일행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입을 열었다. 적잖이 고민을 했는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중하게 나왔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가 느낀 것은 결국 개인적으로 누가 힘을 가지든지 일단은 지구인들 자체의 힘이 커져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니코레임 인들이 빚을 강제로 지운 방식도 그렇고, 일방적으로 저를 상대하기 위해 쳐들어오겠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플레비크 인들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우리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주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외계인들이 있는 마당에 지금부터라도 문을 닫아걸고 우리끼리 지구에서 잘 살자는 방식은 너무 소극적이에요. 그건 마치 덤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 솔개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닭이나 다름없어요. 우리도 적극적으로 우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 가장 필요한 기술이 포털 제작 기술이고요.”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든지 니코레임 인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어요. 미련하고 감상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걸 갚고 싶어요. 그걸 위해서는 제가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요. 그래도 이제 와서 피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어차피 아니잖아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대신 저 이후로도 강한 지구인들이 나와서 더 이상 외계인들에게 휘둘리는 일은 없도록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 인류가 살아가기에 적당한 행성들의 좌표와 포털 제작 기술을 넘기라고 요구하려고요. 그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일행의 얼굴이 착잡하게 변했다. 말은 쉽게 하지만 결국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따위의 동화같은 명분에 감동하기에는 일행의 연륜이 짧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가 굳이 저렇게 얘기하는 이유를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지구의 정부가 니코레임 인들과의 협상을 통해 그들이 전하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 대가를 인류 전체가 아닌 진우 개인이 짊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뿐이었다. 가장 축복받은 재능을 가진 덕분에 가장 위험한 일을 떠맡게 된 것이었다.

“그럼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지구를 떠나 있을 계획이냐?”

장수덕 박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네. 그들이 제 제안을 받아들이면 곧 니코레임 인들이 준비했다는 프로그램에 따라 지구를 떠나야 하거든요.”

진우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장박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박사는 진우가 왜 자신에게만 특별히 사과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그저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외에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적지 않은 분들이 토칠라크에서 만났던 루살카가 엑스트라로 전락한 것에 대해 허탈감을 느끼시는 모양이더군요. 뭐, 제 입장에서는 전락이 아니라 원래 그 녀석은 엑스트라였습니다. 진우가 동조 단계에 들어선 기념으로 경험하는 튜토리얼 정도라고나 할까...

오늘로 이번 파트가 끝납니다. 다음 단계로 가는 중간 과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조금 길어졌네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쓰고 있으면서도 저 역시 계속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다들 추위에 감기조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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