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진우는 며칠만 더 정리 훈련을 한 뒤에는 지구로 귀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온 식량은 진즉에 다 떨어지고 없었다.
마실 물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동물이 하나도 없는 행성이다 보니 그동안 계속 풀만 먹고 살아야 했다. 그나마 토칠라크에서 자라는 식물 가운데 식용으로 쓸 만한 것들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하게 수련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이곳을 떠났을 터였다.
벨푸의 연락을 받은 루살카가 토칠라크에 도착한 때는 진우가 이틀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정리 훈련을 시작한 때였다. 진우는 그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막 오전 명상을 끝내고 슬슬 기술 훈련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석 달 동안이나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던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포털이 열리더니 괴생물체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가 전에 마나 크리스털과 싸우던 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생물체와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자였다.
“플레비크 행성인이라고 했던가?”
진우는 지구로 메시지를 보낸 뒤에 타르코스 소장으로부터 전송된 크리스털 메모리 하나를 받았다. 만약 자신에게 연락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미리 정한 시간과 좌표로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해 둔 참이었다.
타르코스 소장은 진우가 정한 시간에 정확하게 포털을 열어 여러 가지 정보와 메시지가 담긴 메모리 크리스털 하나를 전송했다.
그 메모리에는 소현과 최현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안부를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외에도 자신이 보았던 괴생물체가 플레비크 행성인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타르코스 소장은 그들이 타고난 전사 종족이며 니코레임 인들과도 오랜 악연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니, 특별히 주의를 해서 상대해야 하는 자들이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여전히 진우가 원하는 만큼의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구로 귀환하면 플레비크 인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귀환을 며칠 앞두고 새로운 포털이 열리더니 또 하나의 플레비크 인이 나타난 것이다.
진우는 포털에서 루살카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짝 긴장했다.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기세에서 순간적으로 머리가 쭈뼛 서는 듯한 강한 살기를 느낀 것이다.
“네가 지구에서 왔다는 강진우인가?”
니코레임 행성어였다. 진우는 헌터 학교에 다닐 때 타르코스 소장과 펄스너 교장의 강권에 가까운 설득으로 두 학기나 니코레임 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주 능숙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를 안다니 재미있군. 당신은 누구지?”
루살카의 얼굴에 만족한 듯한 웃음이 걸렸다.
“니코레임 어를 할 줄 안다더니 정말이군. 나는 플레비크 행성의 상급 전사인 루살카라고 한다.”
“상급 전사?”
“아, 너희들 분류로는 그냥 동조 단계의 헌터라고 해야 알아듣겠군.”
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동조 단계의 전사라면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는 불과 삼 개월 전에야 비로소 동조에 들었다. 그 단계를 몸에 완전히 익히기 위한 훈련을 막 끝낸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자신처럼 동조에 들었다면 이미 적지 않은 경험과 수련을 쌓았을 가능성이 컸다.
진우가 긴장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루살카는 기분 좋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윗분들 중에 네가 동조에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는 분이 있더군. 그것도 본격적으로 마나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 지 우리 시간으로 고작 2년이 채 되지 않은 녀석이 말이야. 솔직히 가소로운 이야기지. 나도 그렇지만 그 말을 전해 준 분도 그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마나 하나 없는 지구에서 그렇게 빨리 동조 단계에 이른 자가 나타나다니. 웃기는 농담이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진우는 상대의 말을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강의 의미는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동조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뻔하다.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보려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내가 동조에 들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진우가 그렇게 묻자 루살카는 또 다시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오, 아직은 제법 여유가 있군 그래. 자기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도 그런 게 궁금한가? 아쉽지만 그건 아직 말해줄 수가 없어. 그런 문제는 일단 너를 쓰러뜨리고 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루살카의 몸 전체로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진우를 덮쳤다. 본격적인 공격이라기보다는 일단 위세를 보여 기를 죽이려는 수법이었다. 진우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 전체에 강하게 마나를 일으켰다.
‘이 자식, 나를 가볍게 보고 있군. 일단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공격의 방식은 동조 단계에 든 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생각보다 그 위력이 약했다. 진우게게는 자신을 루살카라고 밝힌 상대의 몸 전체에 검붉은 마나가 짙게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최상급은 가볍게 뛰어넘겠지만 소위 말하는 상급 전사의 마나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아직 실력을 다 보이지 않고 있군.’
진우는 동조의 단계에 들기는 했지만, 같은 단계를 밟은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은 수비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자신이 지닌 마나량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벨푸는 그가 세 개의 마나 크리스털을 동시에 몸에 갈무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화를 내며 거짓말이라고 소리쳤다. 그만큼 진우가 마나 기관 안에 저장하고 있는 마나의 양은 이미 원숙한 동조의 경지에 든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감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동조에 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를 동조 단계에 든 상급 전사라고 밝힌 루살카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역시 최상급은 뛰어 넘은 건가? 생각보다 잘 막는군.”
진우가 자신의 기세를 쉽게 막아내는 것을 본 루살카는 비릿한 미소를 입에 물더니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진우의 몸 주위의 마나가 소용돌이 치며 모여들더니 수십 개의 커다란 창 모양으로 형상화 되었다. 진우는 급히 자신의 주위로 마나로 이루어진 방어벽을 쳤다.
그것을 본 루살카는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치켜들었던 손을 진우를 향해 내려뻗었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허공에 떠 있던 마나창들이 진우를 향해 한꺼번에 짓쳐들었다.
텅, 텅, 텅.
나름 단단하게 형상화시켰다고 생각했던 마나 방어벽들이 거칠게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진우는 처음에 바짝 긴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만든 방어벽들이 상대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루살카는 설마 상대가 마나 방어벽만으로 자신의 마나창들을 모두 막아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얼굴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정말 동조 단계에 든 건가?’
그의 마음에 비로소 살짝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 사이에 허공에 떠 있던 루살카의 마나창들이 모두 진우의 방어벽에 부딪혀 사라지고 말았다.
“받았으니 돌려줘야지? 이번에는 내 차례다.
루살카가 자신의 공격이 전혀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이를 악물었을 때에 진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루살카의 주변을 둘러싼 허공에 이번에는 진우가 형상화시킨 마나 송곳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더니 그를 향해 쏜살같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건방진 자식. 감히.”
짜증과 분노가 섞인 말을 내뱉은 루살카는 자신 역시 주변의 마나를 움직여 일단 엄밀한 방어벽을 쳤다. 그리고는 방어에 그치지 않고 진우의 몸에 직접 마나 간섭을 시도했다. 마나를 직접 조정해서 진우의 몸을 꼼짝못하게 고정시키려고 한 것이다.
루살카의 마나 방어벽은 한동안 진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진우도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개개의 공격력이 크지 않은 대량 살상용 공격을 통해 동조 단계에 든 전사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진우가 마나 송곳을 쏘아내는 시간은 루살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공격의 지속시간이 길어지면서 두 사람이 지닌 마나량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하던 루살카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일그러졌다.
반면에 진우의 마나에 대한 간섭 시도는 마치 거센 철벽에 부딪힌 듯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진우는 동조 단계에 든 이후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와카반의 마나 특성을 발전시켜 자신의 마나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아직 완성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루살카의 마나 간섭은 진우의 방어를 뚫고 그의 마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자신의 간섭은 먹혀들지 않고 마나 송곳에 의한 상대의 공격도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자, 드디어 루살카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런 허접한 공격을 계속하려는 것이냐?”
마나창을 만들어 한 번 공격하고 끝나버린 자신과는 달리 허공에서 쏘아지는 상대의 마나 송곳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우의 마나 송곳이 방어벽을 두드리자 루살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그는 이 상태로 가다가는 화끈한 전투가 아닌 지구력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지구인은 자신보다 지닌 마나량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루살카는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방어벽을 풀어버리더니 모든 마나를 두 손에 모았다. 그는 쏟아지는 마나 송곳을 무시하고 두 손에 날카로운 검의 형상으로 마나를 결집시키더니 쏜살같이 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속도가 워낙 빨라 몇 개의 마나 송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있던 빈 자리를 때리고 말았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마나 송곳 일부가 루살카의 몸에 적중했지만 그것은 이미 마나가 덧씌워진 그의 피부에 가느다란 흔적만을 남기고 부서졌다.
쩡
두 사람의 마나검이 서로 부딪히자 유리 막대를 부딪히는 것과 같은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우 역시 오른 손에 검 모양으로 마나를 형상화시켜 루살카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싸움은 순식간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마나 동조력을 이용한 원거리 전투가 아닌 직접적인 싸움의 시작이었다.
쩡, 쩡, 쩡...
루살카는 두 손에 맺힌 마나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진우의 몸을 노렸다. 반면에 진우는 왼팔에는 팔뚝부터 주먹까지 덮개를 씌우듯이 마나막을 두르고 한 손에 든 마나검만을 이용하여 루살카의 공격을 하나하나 걷어냈다.
간혹 왼쪽으로 파고드는 불의의 공격은 마나 덮개를 씌운 왼팔을 이용해서 막아냈다. 루살카의 공격은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랐지만 진우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칼질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칼 솜씨는 오히려 마나 동조 능력보다 떨어지는 것 같은데?’
진우가 정확하게 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루살카는 주인이었던 바실라가 죽었을 때 중급 전사였다.
지구로 치면 상급과 최상급의 사이였다. 그 상태에서 알레이브로 간 그는 거기서 수많은 알브레이 인들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었다.
플레비크 인들은 노예를 하나 만들 때마다 힘이 강해졌다. 그리고 일단 플레비크 인의 노예가 되면 그들 역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복종시켜 종속의 인장을 찍을 수 있었다. 마치 지구에서 한 때 유행했던 다단계 판매방식과 유사했다. 그렇게 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노예가 늘게 되면 그만큼 가장 위에 있는 주인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알레이브에는 플레비크 인들이 좋아하는 중급 이상의 전사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루살카가 그곳에 가기 전까지는 알레이브에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다른 플레비크 인들이 없었다. 수치상으로 무조건 많은 사람을 노예로 종속시키면 그만큼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플레비크 인들의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한 전사들과 싸워서 그들을 직접 종속시키는 것을 훨씬 선호했다.
루살카는 자신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에 강한 상대를 싸워 이기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노예를 많이 만드는 방식으로 힘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그래서 비록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야 했지만 덕분에 드디어 동조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탓에 기술의 단련과 깨달음이 충실하지 않은 채 동조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었다.
‘뭐야? 이놈 생각보다 약한 건가? 동조의 단계에 들었는데 왜 저렇게 힘과 속도가 평범하지? 칼을 쓰는 기술은 심지어 최상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어떻게 된 일이지?’
진우가 상대의 실력에 다소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있는 때에 루살카는 반대로 기겁을 하고 있었다.
‘분명 동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 녀석이라고 했는데? 분명 마나가 전혀 없는 지구에서 성장했고 따로 훈련을 시켜 줄 상급자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빨리 동조 단계에 적응할 수가 있지?’
루살카의 마음에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두려움이라는 생소한 감정을 이겨내기라도 하려는 듯 점점 휘두르는 마나검의 속도와 위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진우의 눈에 상대의 몸 전체를 덮고 있는 마나의 색이 강해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검붉은 색이었던 것이 이제는 거의 검은 색에 가깝게 보일 정도로 마나의 농도가 짙어졌다.
그에 따라 상대가 휘두르는 마나 검의 기세가 더욱 강력해지면서 동시에 두 개의 검을 막아내야 하는 진우의 손이 조금 더 급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더 이상의 변화가 보이지 않은 채로 다시 몇 분이 흘렀다.
진우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상대의 마나 색이 더 이상 짙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기까지가 놈의 한계인 것 같았다. 그는 상대가 최선의 공격을 해 올 때까지 기다리려던 생각을 버리고 먼저 선공을 하기로 했다.
“합.”
진우가 짧은 기합과 함께 내지른 오른 손의 마나검이 루살카의 왼쪽 가슴어림으로 부드럽게 찔러 들어갔다. 루살카는 이제까지 수비를 위주로 하던 진우가 갑작스럽게 공세로 방향을 바꾸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직도 여유를 가지고 있었어?’
루살카는 비로소 자신이 이 괴물 같은 지구인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조에 든 시기가 비슷하면 당연히 플레비크 행성인인 자신이 상대를 압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플레비크 전사가 우주 최강의 전투 종족이라는 자부심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그런 생각이 자책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그 바람에 일순간 루살카는 가슴을 파고드는 진우의 검의 속도를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찌익
왼손의 마나검으로 찔러 들어오는 진우의 검을 비껴 흘리려고 했지만 힘이 덜 들어갔는지 방향을 완전히 틀지 못했다. 루살카는 헛바람을 삼키며 다급히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었지만 왼쪽 가슴 아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찢기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칼이 지나간 자리의 옷이 찢어지며 순식간에 녹색의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윽.”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정신이 번쩍 들은 루살카는 할 수 없이 일단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서고 말았다. 하지만 진우는 한 번 시작된 싸움에서 상대가 물러나는 것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물러나는 루살카를 따라 더욱 바짝 다가선 진우의 왼손이 마나 덮개를 씌운 채로 오른쪽으로 몸이 치우친 상대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컥.”
루살카가 답답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휘청였다. 그 순간 진우의 검이 그의 목을 짧게 후려쳤다.
서걱
깔끔하게 살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경악으로 눈을 치켜뜬 루살카의 머리가 단숨에 잘려 땅에 떨어졌다.
“후~.”
진우는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맺혔던 마나를 거두었다. 상대를 이겼다. 하지만 뭔가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이 자를 정말 동조의 단계에 든 전사로 보아야 하나?”
사용하는 기술로 보아서는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실력은 기대보다 너무 미흡했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하늘 위에 둥실 뜬 채로 모든 것을 촬영하고 있던 비행 드론을 보았다. 지구로 돌아가면 저 영상을 보여주고 타르코스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 또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