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진우가 몸의 방어에 대한 집중을 푸는 순간 일시적으로 방어력이 약해지면서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아직은 방어가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몸을 관통 당하는 정도의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슴과 배, 두 팔과 다리에는 뼈가 보일 정도의 깊은 상처가 여럿 생겼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올 것 같은 고통을 애써 참으며 오히려 허공의 마나 크리스털에 대한 간섭을 강화시켰다. 그런 그의 노력이 먹혔는지 잠시 후 진우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몰려들던 마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놈의 마나를 동결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진우의 간섭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투명한 마나 크리스털은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쳤다. 녀석의 몸부림이 강해질수록 마나 파편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은 물론 공격의 강도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반면에 진우는 놈의 공격이 약해질수록 더욱 더 필사적으로 마나 크리스털이 지닌 마나를 동결시켜 녀석을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애를 썼다. 마나 크리스털과 진우 사이의 힘겨루기가 어느 한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진우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허공의 마나 크리스털이 진우 주변의 마나에 대해 동조를 시작한 지는 이미 여러 날이 지나고 있었다. 진우가 토칠라크에 발을 디딘 지 사흘 정도 지났을 때 이미 놈은 진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동물이 존재하지 않는 토칠라크에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는 간혹 거센 폭풍으로 인해 하늘 높이 날려 올라간 나무토막이나 작은 돌멩이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진우처럼 며칠 동안 지속적이고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토칠라크에는 몇 개의 마나 크리스털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을 차지하고 주변의 마나를 지배했다.
지배하는 영역의 넓이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상대의 영역을 넘보지 않은 채 오랜 세월 동안 나름대로 공존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움직임이 영역 내에서 감지되었다. 토칠라크에서 그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존재는 또 다른 마나 크리스털 밖에는 없었다.
녀석은 진우를 비롯해 예전에 토칠라크를 방문했던 다른 탐사대의 움직임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자신과 경쟁을 벌이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던 다른 마나 크리스털이 마음을 바꿔 침입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존과 성장에 노골적인 위협을 감행하는 상대를 침입자로 간주하고 그것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진우가 자신의 몸을 자극하는 정전기 형태의 자극을 느끼기 시작하던 때부터 놈의 동조는 이미 진행되는 중이었다. 다만 원하는 만큼의 마나를 마음대로 조정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에 서서히 동조를 끌어올리면서 충분한 힘이 모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만하면 새로운 침입자를 물리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그가 막 공격을 시작했던 때가 바로 진우가 숲으로 우거진 산을 넘어 초원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녀석은 자신의 공격 방식이 지닌 특성상 장애물이 없는 넓은 지역을 선호했다.
예전의 침입자들도 모두 그런 방식으로 물리쳤었다.
* * * * *
싸움 도중에 전개했던 진우의 마나 간섭은 마나 크리스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기껏 끌어올렸던 마나 동조가 순식간에 약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다시 강화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일단 풀려버린 마나 동조를 다시 원하는 정도까지 끌어올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상대의 간섭으로 인해 마나 동조는 물론 자신의 마나를 움직이는 것조차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가 굳으면서 주변의 마나에 대한 조정 능력이 약화되어갔다. 녀석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마나 크리스털은 진우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기로 했다. 주변의 마나가 자꾸 자신을 아래로 밀어내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밑으로 끌려 내려갈 가능성이 있었다. 마나 크리스털의 본질은 형체도 모양도 분명치 않은 투명한 구름 덩어리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마나 동조가 불가능할 경우 물리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녀석에게는 없었다. 놈은 주변에 대한 동조를 모두 중지하고 자신의 몸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에 모든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 * * * *
진우는 몸의 상처를 무시하면서까지 허공의 마나 크리스털을 끌어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런 노력이 효과를 보는 듯, 녀석의 본체는 점점 밑으로 밀려 내려와 상공 10m 부근에 이르렀다.
몸만 성하다면 도약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손에 움켜쥐는 것이 가능한 높이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도약은커녕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다. 몸 여기저기에 입을 벌리고 있는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너무 많았다.
정신이 자꾸 흐릿해졌다.
그의 몸으로 쏟아지던 마나 파편의 공격이 어느 순간부터 딱 멈췄다. 그러더니 다시 하늘로 올라가려는 놈의 저항이 강력해졌다. 진우는 몸의 방어를 위해 돌리던 마나에 대한 조정마저 포기하고 모든 정신을 허공의 마나 크리스털을 붙잡는 데에 집중시켰다.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핑 하고 돌면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출혈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잠시 정신이 흔들리는 바람에 놈을 잡아두던 마나 조정력이 흔들리고 말았다.
쌔액
아마 소리가 났다면 그런 소리가 들렸을 거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늘 위로 높게 솟구친 마나 크리스털은 잠시 후 진우의 마나 탐지 범위 밖으로 쏜살같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감각 속에 있던 마나 크리스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온 몸의 힘이 탁 풀리면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다 잘못하면 빈혈로 죽겠군.’
진우는 마지막 남은 힘을 사용해서 자신의 몸을 치료했다. 벌어졌던 상처가 닫히고 어느 정도 몸의 상태가 회복되는 것을 느낀 그는 쓰러지듯 초원 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아깝네.”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지평선 근처를 서성이던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진우는 벌거벗은 몸을 훤히 드러낸 상태로 그렇게 밤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 * * * *
플레비크 행성의 중급 전사 마르칼은 자신의 주인인 상급 전사 벨푸의 부름을 받아 그가 머물고 있는 옛 시청 건물을 들어서고 있었다. 자신들과는 다르게 엄격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은 니코레임 인들에게는 흔치 않을 정도로 커다란 건물이었다. 하지만 정작 잔혹한 살육 끝에 건물을 점령한 플레비크 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작은 오두막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거처에 불과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마르칼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벨푸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벨푸는 고개를 숙인 마르칼을 힐끗 보더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메마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몽테반으로부터 소식이 끊겼다.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열흘이나 지났어. 네가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을 좀 해야겠다.”
마르칼은 고개를 숙인 채로 물었다.
“토칠라크에 갔던 하급 전사 녀석 말입니까?”
“그래. 니코레임 인들의 기록에 남아 있던 행성 가운데 하나다. 혹시 녀석들이 그곳으로 간 게 아닐까 싶어 몽테반을 보냈는데 아직 돌아오지를 않았다.”
“희소식이군요.”
“맞아. 녀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니까. 마수가 존재하지 않는 행성에서 변을 당했다면 그곳에 니코레임 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겠지.”
플레비크 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다지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였다. 하급 전사 하나의 목숨으로 적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적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규모와 능력을 파악해라. 그것이 네 임무다.”
임무라는 말에 마르칼의 고개가 바닥을 한 번 쿵 하고 쳤다.
“적과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죽일 수 있으면 죽여라.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 싶을 때에는 피해서 돌아와라.”
“피한다....는 말씀입니까?”
마르칼의 목소리가 약간 느려지자 벨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녀석들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그래야 다음에 어떤 전사를 몇 명이나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 공연히 허약한 놈들에게 종속의 낙인을 찍는답시고 시간 끌지 말고 되도록 빨리 돌아와라. 지금은 정보가 더 중요하다.”
“네. 알겠습니다.”
마르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벨푸는 앉아 있던 자리 뒤에서 배낭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간이 포털 장치 두 개다. 그곳에는 동물이 살지 않는다니 식량을 충분하게 가져가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 게 부족해 오래 버티기에는 곤란한 곳이다. 가져간 식량이 다 떨어질 때까지 탐사하고, 그때까지 아무런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냥 돌아와서 보고해라.”
마르칼은 다시 한 번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배낭을 짊어지고 시청 건물에서 물러났다.
* * * * *
출혈이 조금 심했던지 진우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것은 다음날 늦은 오전이 되어서였다. 해가 막 졌을 때부터 정신을 잃었으니 열 두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쓰러져 있던 셈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바이크를 찾았다. 다행히 바이크는 무사했다.
“일단 옷부터 걸쳐야겠다.”
물 한 병을 한 번에 다 마셔 갈증을 풀고는 짐칸에 실었던 배낭에서 예비로 가져왔던 방호복을 꺼내 입었다. 몸을 움직여보니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드는 곳이 몇 군데 있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나 저나 얘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투명한 마나 크리스털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바람에 마나 크리스털들이 들어있던 장식들이 부서지면서 두 녀석이 모두 겉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바이크에 있는 마나스톤 보관함에 넣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진우는 일단 토칠라크를 떠날 때까지는 그냥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다음에 또 놈을 만나면 아무래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마나 크리스털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녀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번에는 서로 운이 좋았어. 다음에 만나면 방어하느라 힘을 빼지 말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마나 간섭을 시도하는 게 낫겠다.”
투명한 마나 크리스털은 자신의 마나가 간섭당해 주변에 대한 동조 능력이 약해지자 황급히 자리를 피해 도망가 버렸다. 진우는 정신을 차린 뒤에 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 놈이 다시금 공격을 해왔다면 이미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달한 자신으로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마치 사냥꾼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짐승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물론 생물체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녀석으로서는 진우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보다는 다른 가능성에 더 신경이 쓰였다.
“만약 놈의 동조 능력이 제대로 발동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녀석으로서도 더 이상 강한 공격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우는 자신의 마나 간섭으로 인해 놈의 동조가 약화되어 버렸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토칠라크에 도착한 이후로 사흘 정도 지난 뒤에야 몸에 전해지기 시작하던 가벼운 자극을 떠올렸다. 그 자극들은 진우에게는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중급 헌터까지는 거의 감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미약했다.
놈의 마나 동조는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급격히 강해지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상처를 입힐 정도의 위력을 가졌었지.”
마나 동조가 약해질 경우 다시 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면 녀석이 더 이상 공격을 생각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피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오랜 싸움으로 인해 놈이 힘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짐작에 모험을 걸 수는 없었다.
“만약 다시 마주쳤을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단계적인 공격을 가한다면, 놈의 마나 동조 능력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 분명한 거지.”
그럴 경우에는 동조가 본격화되기 전에 강력한 선제 공격을 가하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높이 떠 있는 놈을 어떻게 끌어내리느냐는 점이었다. 상공 1Km에 떠 있는 놈에게 마나 간섭을 시도한다는 것은 현재의 진우가 가진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100m 까지는 방어를 하면서도 마나에 간섭할 수 있어야 해.”
말이 좋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우는 그 때문에 네 개의 마나 크리스털 모두를 직접 몸에 장착해서 그들과의 교감을 최대화 시킬 생각을 했다. 와카반의 마나를 몸에 둘러 방어를 하면서 최대한 동조의 거리를 늘리자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어찌 보면 마나 크리스털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능력에 적지 않은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마나 크리스털을 모두 꺼내놓고 다닌다고 해도 남의 이목을 끌 염려가 없었다.
진우는 검 속에 있던 금색 마나 크리스털까지 꺼내들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활용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를 두고 스스로 제약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 * * * *
진우는 몸을 추스르자 곧바로 스페인 탐사대의 경로를 따라가며 탐색을 재개했다. 그들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거리상으로 볼 때 처음 도착한 곳에서 열흘 가량 이동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장소였다. 독일 탐사대가 모두 당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과 유사했다.
그들의 유품을 수습한 진우는 이번에는 처음부터 프랑스 탐사대가 출발한 곳으로부터 열흘 가량 떨어진 곳을 향해 직진했다. 그곳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경로를 더듬으며 탐색을 하자 어렵지 않게 프랑스 탐사대가 공격을 당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녀석이 탐사대의 존재를 확인하고 공격을 할 만큼 준비를 하는 데에는 열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군.”
그렇다면 생각보다 동조의 위력을 충분히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시간이 많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마나 탐지에도 걸리지 않으니 미리 녀석의 위치를 파악해서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처음 녀석과 싸움을 벌인 뒤로는 공중으로도 마나 탐지의 범위를 넓혔지만 아무리 진우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반경 1Km 가량의 완전한 반구 모양으로 탐지 범위를 확대시키기는 어려웠다.
“무리하기보다는 기다리는 게 낫겠다. 어차피 녀석은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처음 싸움을 벌인 뒤로 벌써 보름이 지났다. 스페인과 프랑스 탐사대의 흔적을 쫒느라 제법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만약 녀석이 진우를 향해 공격을 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면 벌써 마나 동조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전기가 몸을 자극하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을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건가?”
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중국 탐사대가 전멸한 것으로 확인된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곳은 프랑스 탐사대가 몰살을 당했던 곳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충 따져도 이십일 가량 쉬지 않고 이동을 해야 했다.
진우가 그렇게 다소 무료한 여행을 일주일가량 했을 때였다. 토칠라크에 온 지도 어느 덧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마나 탐지의 범위를 넓히는 훈련을 하면서 움직이던 진우에게 갑자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전해졌다.
“놈이다.”
진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전해지는 느낌은 마나 크리스털이 누군가 다른 상대를 향해 공격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현재 지구에서 이곳에 와 있는 사람은 진우가 알고 있는 한 자기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 작품 후기 ============================
몇몇 분들이 오행설이나 오원소설을 언급하시기에 그에 관한 얘기를 후기 형식으로 밝힙니다.
일단 제 글에서는 그리스의 오원소설(five elements theory)을 차용하되, 그 속성은 오히려 동양의 오행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서양의 오 원소와 중국의 오행은 조금 개념이 다릅니다.
서양의 원소가 ‘그 이상의 더 작은 단위로 나뉘지 않으며, 영원히 불변하는 근본적인 실체’라는 개념이라면 중국의 오행은 일종의 범주(category) 개념입니다. 사물이나 현상을 다섯 가지 종류의 범주로 나누어 생각하는 거지요. 그리스의 오 원소가 다른 것들과 결합을 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절대로 잃지 않는데 반해, 동양의 오행은 다른 범주와 서로 관계하면서 스스로 변하기도 합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실체라는 개념은 아닙니다.
그리스의 오원소설은 본래 인도 바라문교에서 얘기하던 사원소설을 빌려오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엠페도클레스가 흙, 물, 불, 바람의 네 가지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 전에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바라문교에서는 이미 지수화풍의 네 가지를 만물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나중에 석가모니에 의해 성립된 불교가 그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지요.
그리스 문명은 이집트와 페르시아, 인도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도 문명은 이란 고원을 거쳐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자리잡았던 페르시아 문명과 교류하고 다시 그리스로 전해졌습니다. 피타고라스가 신봉하고 플라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영혼 윤회설 같은 것은 모두 인도의 영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가 이집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가운데에 수학이 있습니다. 그리스인들, 특히 플라톤이나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경우 수학을 몹시 중요한 학문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전통을 정리한 사람이 바로 기하학 원론을 쓴 유클리드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정다면체가 다섯 개 밖에 없다는 점에 큰 흥미를 보였습니다. 정다면체란 정다각형만으로 이루어진 입체를 말합니다.
정삼각형 네 개로 이루어진 정사면체, 정사각형 여섯 개로 이루어진 정육면체 등이 대표적인 정다면체입니다. 이밖에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등이 있습니다.
그 이상은 기하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다면체는 이들 다섯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각각 사원소를 대응시켰습니다. 정사면체는 불, 정 이십면체는 물이라는 식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하나가 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 십이면체에 에테르를 대응시켰습니다.
그들은 형체도 무게도 없지만 우주와 영혼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소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에테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와서 그런 생각이 맞는지를 묻는 것은 아마 무의미한 질문이 될 겁니다.
그냥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지요.
저는 이 오원소설을 차용하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은 오히려 동양의 오행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도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한 겁니다.
그런 개념이 저에게는 조금 더 매력적이어서 그랬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건 단순히 소설 상의 부분적인 설정이지 그게 스토리의 근간을 이룬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개념을 살짝 빌려온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