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저기, 아가씨.”
최현이 어린 도로시를 달래고 있는 젊은 여자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 네. 죄송합니다. 도로시가 혹시 폐를 끼치지는 않았나요? 혹시 그랬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자신을 부르자마자 대뜸 사과부터 하는 바람에 최현은 막 입에서 뱉으려던 말을 그만 삼키고 말았다.
“이 꼬마 아가씨가 아빠를 찾던데, 아빠가 어디 멀리 가셨나요?”
옆에 있던 진우가 최현을 대신해서 질문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젊은 여자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 네. 도로시 아빠가 일이 있어서 나가셨는데 약속했던 날짜가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않아서요. 도로시가 걱정이 되어서 아빠를 찾으러 나왔나 보네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젊은 여자는 말을 마치더니 이제 좀 진정이 된 도로시를 안아들고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뭔가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미처 그럴 틈도 없이 여자와 도로시가 사라져 버리자 남은 두 사람은 약간 뻘쭘하게 되고 말았다. 진우는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최현을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이거 굉장히 찝찝한 광경을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최현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꼬마의 철없는 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뒤이어 나타난 여자의 태도로 보아 아무래도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본인이 입을 열지도 않는데 남의 일을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었다.
“그만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든 헌터들을 보디가드로 데리고 다닐 텐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냐. 우린 그만 가서 여행 준비나 하자.”
진우와 최현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상가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최현의 말마따나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회사의 대표가 설마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행성을 돌아다닐 리는 없었다.
진우는 눈물을 매달고 있던 꼬마의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보호자인 듯한 어른이 함께 있는 걸 보았으니 문제가 있다면 알아서 뭔가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 *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 여행 채비를 갖춘 두 사람은 하루를 푹 쉬고 일어나 모처럼 휴식을 위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최현은 아침 식사를 마친 식탁 위에 이니스프리 행성의 지도를 펼쳐 놓고 다시 한 번 여행 목적지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진우에게 일정을 확인해 주었다.
“일단은 아르야다 산으로 가서 지플론 폭포를 구경하자. 그곳에도 조그만 호텔이 하나 있으니 오늘 저녁은 거기서 묵으면 될 거다. 그 다음날은 타호 지역의 골짜기를 흐르는 강을 따라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서 야영을 하면 될 거야. 그곳에서 보는 일출이 이니스프리의 장관 가운데 하나다.
”
최현의 계획은 일단 북동쪽으로 가다가 하루를 묵고, 그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동했다가 남쪽을 향해 크게 원을 돌면서 이니스프리의 명소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대략 열흘 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일정의 마지막은 남서쪽의 온천 지대를 거쳐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최현과 진우는 아르야다 산으로 가기 전에 잠시 험프리 호텔을 들렀다 가기로 했다. 최현이 그곳에서 뉴스를 내려 받고 가자고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니스프리처럼 적지 않은 헌터들이 항상 머무는 곳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지구의 신문이나 방송을 받아볼 수 있는 뉴스 자판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헌터 카드와 크리스털 메모리를 꽂고 원하는 뉴스를 선택하면 자동으로 금액이 결제되면서 최근 뉴스를 받아볼 수 있는 기계였다.
두 사람을 태운 무중력 차량이 험프리 호텔 정문을 향해 다가갈 때쯤 진우가 운전대를 쥐고 있는 최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어제 그 꼬마 아가씨가 있는데요?”
최현은 진우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호텔 정문 앞에 도로시라는 꼬마와 어제의 그 젊은 여자가 함께 나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빠를 기다리는 건가? 돌아온다는 소식이라도 왔나?”
“글쎄요.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최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일부러 차를 두 여자 근처에 세웠다. 최현은 차에서 내려서는 도로시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는 키가 작은 도로시에게 눈을 맞추고 물었다.
“안녕, 꼬마 아가씨. 아빠 기다리는 거니?”
그러자 도로시가 최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최현이 옆에 있는 젊은 아가씨를 쳐다보자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도로시가 아침을 먹고 나서 계속 아빠 기다리러 가자고 해서 나왔어요.”
아마 도로시가 아빠가 올지도 모른다고 보채자 할 수 없이 그녀가 호텔 정문까지 아이를 데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최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꼬마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런다고 사라진 앤드류 카슨이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었다.
“도로시 아빠가 앤드류 카슨 씨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돌아오시기로 한 날짜가 언제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최현이 몸을 일으키며 젊은 아가씨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현을 쳐다보고는 망설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최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최현이라고 합니다. 이 섬 남쪽에 있는 빌라를 한 채 빌려서 머물고 있습니다. 자동차와 복장을 보고 짐작하셨겠지만 헌터입니다.”
그때 최현이 헌터라는 말을 들은 도로시가 최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아저씨도 헌터에요? 무슨 헌터에요?”
최현이 다시 몸을 낮춰 도로시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헌터 맞다. 그런데 무슨 헌터냐니?”
“헌터들 등급 말이에요.”
최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씬 상급이란다.”
그러자 도로시의 눈이 커졌다. 최현은 그 눈에 기대가 담긴 것을 보았다.
“상급이면 무지 센 거 아니에요?”
“응. 약하지는 않지.”
“그럼 아저씨가 우리 아빠 좀 찾아주세요. 네?”
도로시가 그렇게 말하자 듣고 있던 젊은 아가씨가 깜짝 놀라 황급히 도로시를 말렸다.
“도로시, 안 돼. 헌터 아저씨들한테 함부로 막 부탁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왜?”
“그건... 헌터 아저씨들은 몹시 바쁘거든. 도로시가 귀찮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차마 의뢰비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두 사람에게는 상급 헌터는커녕 하급 헌터 한 명도 고용할 수 있는 돈이 없었다.
카슨 사장이 떠나면서 피씨 카드 한 장을 주고 가기는 했지만, 그 돈으로 헌터를 고용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도로시를 말린 젊은 아가씨는 최현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다시 사과했다.
“카슨 사장님의 비서인 크리스틴 모레스라고 합니다. 도로시가 아직 어린데다가 아빠 때문에 초조해서 그런 거예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죄송하긴요. 도로시가 아빠를 몹시 보고 싶어 하는가 본데 카슨 사장님이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최현은 크리스틴 모레스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카슨 사장이 돌아오기로 한 날짜를 대답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모레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혀를 찬 최현은 할 수 없이 간단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진우와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도로시가 한 말에 의하면 카슨 사장이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벌써 사흘이나 지난 셈이니까 이미 지구에 연락을 했겠지요? 비서라고 했으니 사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는 상황이면 알아서 지구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요?”
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레스라는 비서 아가씨도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아 보였어요. 헌터라고 신분을 밝혔는데도 아예 대답을 안 하던데요?”
“글쎄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남을 쉽게 믿지 않는 걸 탓할 수는 없겠지. 카슨 사장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지금쯤 연락을 받은 지구에서는 난리가 났을 거다. 정상적이라면 곧 수색 팀이나 구조대가 도착하겠지.”
최현이 뉴스 자판기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되어 있는 몇 개의 신문과 방송 뉴스를 다운받고 나자 두 사람은 곧 호텔을 떠났다. 그들이 차에 올라타 북쪽을 향해 방향을 틀 때까지도 도로시와 모레스는 여전히 호텔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진우와 최현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저 꼬마 아가씨의 의뢰를 받아들일까요?”
그러자 최현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연한 짓이다. 그런다고 저 비서 아가씨가 감사하며 카슨 사장의 행적을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아. 너 같으면 상급 헌터씩이나 되는 사람이 동정심으로 돈 한 푼 받을 수 없는데다가 결과마저 알 수 없는 의뢰를 맡겠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냐? 아마 우리를 더 의심할 거다. 그리고 진우 네 마음은 기특하다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다른 헌터들에게 욕을 먹을 거야.”
“욕을 먹는다고요?”
“헌터는 구세군도 아니고 자원봉사자는 더더욱 아니다. 상급 헌터가 무료로 꼬마 아가씨의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나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잠시 많아지겠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돈 없는 사람들의 의뢰를 거절하는 다른 헌터들이 단체로 욕을 먹을 거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전 세계에서 동정심에 호소하는 의뢰 요구가 쇄도하겠지. 그걸 거절했다가는 당장 거센 비난이 쏟아질 거다.
”
최현이 소리 내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명심해라. 우리를 칭찬하던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를 욕할 거다. 네가 굳이 정의의 사도가 되겠다고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헌터로 살 생각이라면 섣부른 동정은 금물이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 도대체 최현은 아까 무슨 생각으로 모레스라는 비서 아가씨에게 카슨 사장에 관한 일을 물었던 걸까. 진우는 최현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하지 못한 그의 속마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이 딱딱 끊어지는 것으로 보아 최현은 지금 잠시 진우를 가르치던 헌터 교관으로서의 입장으로 돌아간 듯했다.
조승운 스승도 늘 헌터는 돈을 받고 움직이는 사냥꾼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헌터들은 의뢰를 받았으면 의뢰비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철칙처럼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진우도 그런 원칙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헌터도 결국 인간이었다.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명색이 자유로운 헌터인데...’
인생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진우는 도로시의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눈망울이 자꾸 생각나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호텔 정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던 그 꼬마의 모습에, 어린 시절 집 앞에 서서 늦게 퇴근하던 아빠를 기다리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였다. 그리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현 역시 속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르야다 산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입을 떼지 않고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 * *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얘기야말로 사실은 정답에 가장 가까운 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아르야다 산 중턱에 있는 ‘카모스’라는 조그마한 호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다소 수다스러운 프론트 직원의 환영 인사를 받다가 뜻밖의 말을 들었다.
“앤드류 카슨 사장이 여기에 묵었었다고요?”
진우가 깜짝 놀라 되묻자 무니악 행성의 세드릭을 연상시키는 젊고 잘 생긴 남자 직원은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근처에 있는 지플론 폭포를 구경하러 오셨었다니까요. 그분 아시죠? 화이트 캐슬 사의 공동 창업자 가운데 한 분이시잖아요. 그렇게 유명한 분도 일부러 구경을 올 정도면 지플론 폭포가 얼마나 장관인지 아시겠죠? 이니스프리에 오셨으면 반드시 지플론 폭포를 구경하셔야 해요. 그걸 놓치면 이 먼 행성까지 온 보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니까요. 내일 오전에 그곳까지 다녀오는 관광버스가 출발합니다. 아리따운 가이드 아가씨의 안내를 받는 비용까지 삼백 피씨밖에 안 해요. 어떻게, 지금 예약을 해 드릴까요?”
최현과 진우는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다. 지플론 폭포는 최현이 몇 번씩이나 가봤던 곳이었다. 무중력 차량도 가지고 왔다. 따로 차량이나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최현이 자신의 헌터 카드를 내놓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물었다.
“만약 카슨 사장이 이곳을 떠난 뒤로 어디로 가기로 했는지를 말해 주면 숙박비에다 백 피씨를 더 얹어 결제를 해도 좋소. 뭐 추가된 백 피씨는 당신이 알아서 다른 곳으로 이체시켜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직원이 최현이 내민 헌터 카드에 상급 헌터라고 표시된 내용을 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헤헤, 고객에 대한 사항은 다른 분들에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서 말이죠.”
“이백 피씨.”
최현이 프론트의 데스크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직원에게 가까이 댔다.
“아.. 하하하. 아무리 그러셔도 그건 좀 곤란...”
“삼백 피씨. 아니면 말고.”
최현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프론트 데스크 위에 올려 져 있던 그의 헌터 카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대신 카드가 놓여 있던 자리에 종이 한 장이 척 하고 나타났다.
“카슨 사장님이 떠나기 전에 저한테 오셔서 몇 가지 여행 정보를 묻느라 일정을 적어 놓은 종이를 꺼내셨거든요. 그런데 얘기를 하던 도중에 어디선가 전화를 받으시더니 그만 깜빡하고 이걸 그냥 두고 가셨지 뭡니까. 그분의 글씨가 적혀 있던 종이라 제가 기념으로 간직하려고 했는데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하.”
최현은 씩 웃으며 직원이 내민 종이를 받아 품속에 집어넣었다. 진우는 속으로 이 사람이 오전에 공연한 동정심 운운하던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현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옆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진우의 눈을 힐끗 보더니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험험, 그냥 궁금해서 말이다.”
“저 아무 얘기도 안 했습니다.”
이번에는 최현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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