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누가 오는 거 같은데요?”
진우가 갑자기 냄비에서 고개를 들고 최현을 보며 말했다. 최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멀리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보이는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헌터들이겠죠? 이쪽으로 오는 것 같네요.”
이 시간에 인적도 없는 초원에 일반인들이 지나다닐 리는 없었다. 최현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 자리에 던져 놓았던 대검을 다시 등에 메었다. 진우 역시 요리를 하면서 풀어놓았던 검을 다시 허리에 차며 일어서고 있었다.
작은 불빛으로 보이던 무중력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똑바로 비추며 다가오더니 직전에 이르러서야 방향을 살짝 돌려 냄비를 걸어 놓은 버너 옆에 정지했다. 최현과 진우가 몰고 나온 것보다 한배 반 이상 큰 트럭이었다.
무중력 자동차가 정지하면서 그 여파로 주변에 바람이 일며 흙먼지를 날렸다. 진우는 얼른 스튜가 끓고 있던 냄비의 뚜껑을 덮었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여어~. 이거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두 분이서 사냥이라도 나온 거요?”
정차한 무중력 차량의 창문이 내려가더니 보조석 쪽에서 삼십대 초반의 남자 얼굴이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턱이 길쭉한 게 말상이었다.
“맞소. 사냥도 하고 훈련도 할 겸해서 나왔소. 거기 계신 분들도 헌터들인 거 같은데 해가 저문 뒤에도 움직이시는 걸 보니 어디 바삐 가실 곳이라도 있으신가봅니다?”
헌터들은 보통 밤에는 잘 이동을 하지 않았다. 밤에는 돌아다니는 마수들도 거의 없는데다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관계로 아무래도 낮보다는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아, 오늘 내로 북서쪽 수림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낮에 중급 마수를 사냥하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요. 한 시간만 더 달리면 수림 경계까지 도달할 수 있으니 조금 더 가서 야영을 하려고요. 그런데 두 분이야말로 조금만 더 가면 수림인데 그냥 여기에 텐트를 치셨네요?”
사내의 말투에 언뜻 ‘우리는 중급 마수씩이나 잡고 다니는 사람들이야’라는 것을 내세우는 듯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진우는 표시나지 않게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네. 해도 저물었는데 굳이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으려고요. 그쪽은 일행이 여섯 분이지만 보시다시피 우리는 달랑 둘 뿐이어서 밤에 움직이기에는 불편해서요. 조금 늦더라도 해가 뜬 뒤에 다시 이동할 생각입니다.”
최현이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두 사람이 이곳에 텐트를 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둘 뿐이기는 하지만 상급과 최상급 헌터의 조합이었다. 웬만한 마수들을 겁낼 정도의 구성이라기에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저 날짜를 다투는 일정은 아니었기에 굳이 어둠 속을 뚫고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생각 같아서는 한 그릇 부탁하고 싶기도 한데, 우리도 바삐 가야 해서 이만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지내시고 많은 성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사내가 말을 마치자 일행을 태운 트럭이 다시 움직였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최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귀찮은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조금 경우가 없는 사람들이기는 하네요. 야영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저희들한테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비추면서 다가왔어요. 차도 야영 장소 바로 옆에다 붙이듯이 세웠고요. 말투는 특별히 무례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자신감이 과도한 거 아닐까요?”
“글쎄다. 예의 없이 군 게 그저 잠깐 실수한 거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헌팅이란 게 운전하고 비슷한 면이 있어. 그 왜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운전대만 쥐면 성격이 바뀌는 사람들이 있지 않냐. 헌터들 가운데에도 그런 치들이 있거든. 지구에 있을 때는 평범한 이웃사람인데, 외계 행성에 나가서 필드에만 서면 갑자기 무법자처럼 구는 녀석들이 있거든.”
최현의 목소리에는 다소 우려의 기운이 섞여 있었다.
“적재함에 타고 있던 세 사람 가운데 하급이 하나 중급이 둘이었어요.”
진우가 최현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최현의 고개가 끄덕였다.
“운전석에 타고 있던 세 사람도 상급과 중급, 하급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자는 중급이었지만 아무래도 안에 상급이 한 사람 타고 있는 것 같았어.”
“저희도 내일 숲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되도록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진우의 말에 최현이 피식 웃었다.
“그거야 미리부터 걱정한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서로 운이 좋기만을 바래야지. 말썽은 피해가야 하는데 말이다. 저 사람들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는 아무래도 미국 헌터들인 것 같았지?”
“네. 발음이나 억양으로 보아서는 미국식 영어를 쓰는 것 같기는 했어요.”
그 점이 조금 불안했다. 이번 헌터 대전을 후원하는 기업이나 참가하는 헌터들 중에는 미국에 소재를 둔 기업이나, 미국 출신 헌터들이 가장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진우와 최현 일행이 훼방꾼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합리적인 생각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모두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었다.
두 사람으로서는 공연한 분쟁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 * * * *
두 사람의 우려는 아쉽게도 사실이 되고 말았다.
다음날 해가 뜨기 직전부터 일어나 서둘러 이른 아침을 먹은 최현과 진우는 무중력 트럭을 몰고 한 시간 정도를 달린 끝에 북쪽 수림의 경계에 이르렀다. 수림에 들어가 오전 동안 다시 하급 마수 두 마리를 상대로 마나 통제를 연습한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나서는 중급 마수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 마주치는 최하급이나 하급 마수는 그냥 무시했다.
“전방 800m 지점에 중급 마수로 짐작되는 놈이 한 마리 있어요.”
수림의 나무들 위를 날아가던 트럭에서 진우가 운전대를 잡고 있던 최현을 향해 말했다. 진우의 말을 들은 최현은 트럭을 나무들 아래로 내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착륙시켰다.
“중급 마수에게도 마나 통제인가 하는 걸 시험해 볼 거냐?”
“네. 최종 목표는 상급 마수를 통제하는 거니까 중급 마수를 본 김에 더 연습을 하고 싶어요.”
“조심해라. 중급 마수는 하급 마수들 몇 마리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건 알지?”
“네. 정 안 되면 그냥 달려들어서 처치할게요. 이번에는 만약을 대비해서 활도 가지고 내릴 거예요.”
최현은 대답을 하는 진우를 바라보며 대견한 눈빛을 했다. 참 많이 성장했다.
나중에 전해 듣기는 했지만 진우가 케이튼에서 하급 마수였던 케로스와의 싸움에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렸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중급 마수를 상대로 여차하면 검으로 베어 버리겠다는 얘기를 태연히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진우가 앞장을 섰다. 수림의 나무들 사이를 뚫고 500m 가량을 전진했을 때 진우가 걸음을 멈추며 주먹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엔드리아고예요.”
엔드리아고라면 확실히 중급 마수였다. 몸길이가 5m 가량에 어깨까지의 높이가 2m 정도 되는 놈이었다.
다리가 여섯 개 달린 녀석은 평소에는 그 다리들을 이용하여 빠르게 이동하다가도, 싸울 때에는 몸을 치켜들어 맨 앞의 두 앞발을 마치 손처럼 사용했다. 여섯 개의 다리가 모두 말이나 사슴처럼 길어서, 그럴 때에는 마치 하체는 말이고 상체는 인간이라는 전설 속의 켄타우로스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은 오히려 주둥이가 길쭉한 악어처럼 생겼다.
당연히 잘 발달된 이빨을 잔뜩 가지고 있어서 최하급 마수들 정도는 한 입에 물어뜯어 죽일 수도 있었다. 여섯 개의 발에도 맨 뒤의 두 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리한 발톱이 나 있었다.
나무를 타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싸움이 격렬해지면 맨 뒤의 두 발로만 몸을 지탱한 채 네 개의 발과 이빨을 사용하여 공격을 하기도 했다. 상급 헌터 혼자서는 일대일로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진우가 몸의 마나를 누른 채로 엔드리아고와의 거리가 150m 정도 될 때까지 다가가자 놈이 귀찮은 듯 진우를 향해 몸을 틀었다. 녀석은 진즉부터 진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비교적 약한 놈으로 보여 알아서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진우가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다가서자 흉성이 발동한 것이다.
엔드리아고가 여섯 개의 발을 모두 땅에 붙인 채 등을 활처럼 구부렸다. 그것을 본 최현이 진우를 향해 짧게 소리쳤다.
“조심해라.”
도약을 이용한 돌진의 징조였다. 최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100m 이상의 거리를 두세 번의 도약을 이용해서 단숨에 좁힌 녀석이 진우를 향해 커다란 주둥이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진우는 침착하게 몸을 숙이고 오히려 앞을 향해 이동을 함으로써 엔드리아고가 자신의 몸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엔드리아고의 발이 다시 땅에 닿으면서 서로의 자세가 역전되는 순간 진우가 재빨리 오른 손을 뻗으며 놈의 몸에 있는 마나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몸이 움찔하면서 앞을 향해 미끄럼을 타듯 밀려나가더니 부근의 커다란 나무에 쿵 하고 부딪히면서 멈춰 섰다.
나무에 부딪힌 엔드리아고가 몸에 걸린 마나 통제를 힘겹게 뿌리치면서 간신히 진우를 향해 돌아섰다. 진우는 놈에게로 조금 더 다가서면서 마나 통제에 쏟은 정신력을 더욱 집중시켰다.
진우를 향해 두 앞발을 치켜들려던 엔드리아고의 몸이 무엇에라도 걸린 듯 덜컥 하며 멈추더니 두 발이 쿵 하고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놈이 자신의 앞으로 더욱 다가선 진우를 향해 고개를 쭉 내밀며 주둥이를 벌렸다.
진우가 더욱 힘을 강화시키자 엔드리아고의 턱이 더 이상 뻗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무언가가 억지로 입을 묶어버린 듯이 하나로 다물어졌다. 진우는 약간의 여지만을 남겨 놓고 놈에 대한 통제를 최대한 강화시켰다. 엔드리아고의 사나운 눈이 불과 2m 정도의 앞에서 맹렬한 살기를 띤 채 진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할 만 하냐? 괜찮은 거야?”
그제서야 진우에게로 다가온 최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우는 정신 집중을 유지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확실히 하급보다는 저항력이 강하네요. 통제하기가 훨씬 힘들어요.”
진우는 억지로 짜내듯이 말을 하고 나서는 다시금 엔드리아고에게 정신을 집중시켰다. 몸속의 마나가 맹렬하게 움직이면서 세 개의 마나크리스털들이 진우의 마나에 적극적으로 교감해오기 시작했다. 하급 마수를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얌전하게 있던 녀석들이었다.
“어떻게 할래? 내가 바로 녀석의 목을 칠까?”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되도록 오래 버텨 볼 게요. 중급을 상대로 언제까지 통제를 할 수 있을지 시험을 좀 해보고 싶어요.”
진우의 말을 들은 최현이 대도를 뽑아들고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언제든지 달려들 준비를 한 채 대기했다. 그렇게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진우는 하급 마수를 상대로 할 때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10분을 버티는 사이 엔드리아고에 대한 그의 통제는 오히려 더 능숙하게 변해갔다. 마수를 통제하기 위한 마나의 움직임에 마나 크리스털들이 교감해 오면서 더욱 원활하게 강한 힘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안정적으로 엔드리아고의 마나를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한 발 더 내디딘 채로 몸의 안과 밖을 맴도는 마나들의 성질을 느끼는 데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휘익~~. 틱
어디선가 화살이 한 대 날아와 진우를 바라보며 버둥대고 있던 엔드리아고의 콧잔등을 때렸다. 때렸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 그 화살은 중급 마수인 엔드리아고의 가죽조차 파고들지를 못하고 그냥 놈의 콧잔등에 부딪혔다가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녀석의 몸속에 있던 마나가 전보다 훨씬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젠장.’
진우는 순간적으로 하마터면 엔드리아고에 대한 마나 통제를 놓칠 뻔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요동치는 놈의 마나를 간신히 억눌러서 붙잡고 있는데 또 한 번 휘익 하며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엔드리아고가 아니라 진우 자신이 화가 치솟는 바람에 마나 통제에 실패할 뻔 했다. 어떤 개자식들이...
“누구냐?”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진우와 마수를 바라보고 있던 최현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대도로 쳐서 동강이를 내버렸다.
“누구냐? 나와라. 어떤 놈들이 남의 사냥감에 함부로 화살을 날리는 거냐?”
그러자 최현이 쳐다보고 있던 곳에서 여섯 명의 헌터들이 나타났다. 그 중 한 명이 활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최현이 도끼눈을 뜨고 있는 것에 반해 오히려 상대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어이~. 하루 만에 또 보네요. 근데 사냥 중이었다고요? 사냥을 당하는 중이 아니라?”
어젯밤에 운전석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을 걸었던 말상의 중급 헌터였다. 손에는 박도를 들고 있었다. 녀석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유들유들한 표정에 상대를 놀리는 듯한 웃음마저 걸려 있었다. 최현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 말은 어쨌든 우리가 엔드리아고를 상대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는 뜻이군. 그런데 무슨 짓이지? 중급 마수한테는 이빨도 먹히지 않는 허접한 화살을 날려대다니 말이야. 설마하니 남이 사냥 중이던 마수를 끌고 가기라도 하려던 것인가?”
박도를 든 사내가 최현의 표정을 보더니 픽 웃었다.
“당신 일행 하나가 엔드리아고 앞에서 바짝 얼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엔드리아고가 발 한 번만 휘두르면 바로 죽을 것처럼 보여서 일단 시선을 돌리려고 그런 건데, 설마 호의를 무시할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건가? 중급 마수를 상대로 달랑 둘이서? 저쪽 친구는 보아하니 이제 막 헌터 학교나 졸업했을까 싶은데, 설마 어린 아이를 마수 먹이로 던져주려던 건 아니겠지?”
최현의 얼굴 위에 차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진짜로 화가 났다는 표시였다. 그가 새로 등장한 헌터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등 뒤의 진우에게 말을 했다.
“진우야. 그만 저 놈은 처리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자꾸 발을 걸치고 싶어 하는가 보다.”
최현은 진우에게 일부러 영어로 얘기를 했다. 진우도 눈앞의 엔드리아고를 상대로 더 이상 연습을 하기는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놈에 대한 마나 통제를 풀지 않은 채로 허리에 찬 검을 빼어들었다.
“이봐. 정말로 애를 죽이려는 건가?”
진우가 검을 빼드는 모습을 보자 박도를 든 사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나섰다. 최현이 말을 또박또박 끊으며 대꾸했다.
“너, 보아하니 중급인 것 같은데, 아직 단계에 들어선 지 오래되지 않았나 보구나. 상대를 보면서도 실력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보니까 말이야.”
최현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진우는 검에 마나를 강하게 주입했다. 진우의 몸에서 갑자기 폭발적인 마나가 퍼져 나오자 이제까지 박도를 든 사내의 일행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장신의 사내가 눈을 꿈틀거렸다.
“합~.”
그 순간 짧은 기합을 내뱉은 진우가 간신히 마나 통제에서 풀려나 몸을 움찔거리려던 엔드리아고의 머리 한 가운데에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놈은 고개를 돌려 진우의 검을 피하려고 했지만 아직 굳어있던 마나가 채 풀리지 않은 상태라 반응이 조금 느렸다.
하긴 정상적인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찔러 들어오는 진우의 검이 너무 빨랐다.
푸욱
마치 두부를 파고들 듯 부드럽게 엔드리아고의 이마 한 가운데를 찌르고 들어간 진우의 검이 놈의 머리에 박히더니 그대로 뒤통수까지 뚫고 나왔다. 진우가 찔렀던 검을 빼어 옆에 있던 풀에 쓰윽 닦는 사이 엔드리아고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너, 너......”
진우가 엔드리아고를 단 칼에 쓰러뜨리는 것을 본 박도의 사내가 손가락으로 진우를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장신의 사내가 그의 어깨를 뒤로 잡아당기면서 앞으로 나섰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군. 그 나이에 벌써 상급인가?”
최현과 진우 모두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헌터 카드에는 분명 진우의 등급이 상급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실력은 최상급 이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에서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그게 궁금한가? 그보다는 먼저 사과를 해야지. 남의 사냥감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헌터들에게 금기에 속하는 짓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아니, 그건 당신들이 마수에게 당할까 봐...”
“당신 말고 거기 키 큰 친구. 자네가 한 번 말해 보지. 보아하니 상급 헌터인 것 같은데, 우리 어제 한번 만났잖아? 설마 여태 우리 실력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자 잠자코 있던 장신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당신 실력은 알아 봤지. 하지만 저 어린 친구가 설마 상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호의로 했던 일이니까 이만하고 그만 넘어가지. 다친 사람도 없잖아.”
진우는 나이가 어리다. 그래서 진우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설마 그가 상급 헌터는커녕 중급헌터일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우를 본 사람이 상급 헌터라면 얘기가 달랐다. 상급 헌터부터는 상대의 마나를 느끼는 감각이 크게 향상된다.
상대를 보고도 그 경지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최현의 입 꼬리가 비틀렸다.
“명색이 상급 헌터씩이나 된 자가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 헌터 자격증은 돈 주고 산 건가? 상급 헌터가 다른 상급 헌터를 몰라 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지금? 그리고 우리 둘 다 상급 헌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남이 사냥 중인 중급 마수에게 동료가 화살을 날리는 걸 뻔히 보고 있었잖아. 그런 주제에 호의였다고? 발현도 안 되는 허접한 궁수의 화살 따위가 중급 마수의 가죽에 박힐 거라고 기대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러자 상대의 얼굴에도 짜증 섞인 비웃음이 떠올랐다.
“어차피 헌터 대전 중인 사냥터에 들어와서 마수를 사냥한답시고 깽판을 친 건 너희들이 먼저 아닌가. 그런 녀석들이 지금 우릴 상대로 시비라도 걸겠다는 거냐?”
최현도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던 대도를 고쳐 잡았다.
“마치 이니스프리 사냥터는 언제든지 너희들이 마음만 먹으면 독점을 할 수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너 뭐냐? 단순히 참가 신청을 하고 여기에 온 녀석들은 아닌 것 같은데. 일부러 우리 뒤를 쫓아온 건가?”
그러자 장신의 사내도 자신의 키보다 더 긴 언월도를 두 손으로 잡았다.
“우린 험프리 그룹에 소속된 헌터들이다. 고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후원을 받고 있지. 너희들이 굳이 참가 신청도 하지 않고 사냥터를 헤집고 다닌다고 하기에 어떤 간 큰 녀석들이 그런 짓을 하는지 궁금해서 따라와 봤다.
과연 겁이 없는 녀석들이긴 하군. 그래서 두 놈이서 우리한테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진우가 검을 든 채로 최현의 옆에 와서 섰다.
“저 놈 몸속에 있는 마나스톤은 천천히 꺼내야 할 것 같네요.”
그러자 최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저놈들이 마수도 아닌 우리 뱃속의 간 크기를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최현과 진우가 각각 자신의 무기를 들고 대응의 자세를 취하자 상대 헌터 여섯 명도 재빨리 포위를 하듯 진영을 넓게 펼치더니 공격 자세를 잡았다. 순식간에 수림 속의 공기가 팽팽한 긴장으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 작품 후기 ============================
제가 절단 같은 걸 사용하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이번에는 앞으로 끊어도 뒤로 끊어도 분량이 몹시 애매하네요. 고민하다 일단 여기까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