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96화 (96/235)

96화

“총하고 실탄도 다 챙긴 거니?”

“네. 하지만 이번 사냥에서는 총을 쓸 일이 거의 없을 거예요.”

다음날 아침 최현이 빌린 무중력 트럭에 짐을 실으면서 진우는 활과 총을 새로 산 배낭 옆에 매달았다. 몸에는 늘 쓰던 검 하나만 달랑 차고 있었다.

각자의 배낭에 텐트와 식량 식수 등을 집어넣고도 따로 큼지막한 가방을 세 개나 더 실었다. 예상대로라면 한 달 이상의 긴 야영 생활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서 이것저것 필요한 장비들을 잔뜩 준비하느라 짐이 꽤 늘었던 것이다.

“좋구나. 일 년 만에 너하고 같이 사냥을 나가니까 말이다.”

운전석에 앉은 최현이 보조석에 올라타는 진우를 보며 씩 웃었다. 진우도 그를 보고 밝게 웃었다.

이제는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사냥의 동료로서 함께 하는 길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그 사이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최현은 중급에서 상급 헌터로 올라섰다. 그만해도 한국에서는 이십 위권 안에 드는 엄청난 고급 인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진우의 발전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 수도 없었다.

‘타르코스 소장이 뛰어난 인재라고 극구 칭찬하며 훈련을 부탁할 때만 해도 녀석이 저렇게 빨리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자신이 처음 맡아서 키운 아이였다. 그 생각만 하면 절로 가슴이 뿌듯했다.

짧은 세월 동안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냥의 목적은 여전히 비슷하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이번 사냥의 첫째 목적 역시 수련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리에브리라고 했니?”

“네. 일단은 최하급 마수부터 천천히 연습을 해 보려고요.”

리에브리는 북서쪽의 초원 지대에 사는 최하급 마수였다. 와카반이 사는 서쪽 지역은 하루 이상만 달려도 황량한 암석 지대가 시작되었다.

그곳에도 꽤 다양한 종류의 마수들이 있기는 했지만, 거기서 하루를 더 달리면 그 다음부터는 거의 마수들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암석지대 초입에 사는 마수들은 최하급이라도 성격이 과도하게 난폭한 경우가 많았다.

진우는 그보다는 조금 더 얌전한 녀석들을 상대로 실전 연습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먼저 적당한 마수를 찾기 위해서 일단 북서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연습을 마친 뒤 천천히 서쪽을 향해 다시 비스듬히 내려갈 작정이었다. 중간에 식수의 보충을 위해서도 그렇게 가는 것이 좋았다.

“가자. 이니스프리에는 괴조가 없으니 이번에는 안심하고 가도 될 거다.”

말을 마친 최현이 큰 소리로 웃었다. 진우도 소리 없이 웃었다. 그 괴조는 진우에게는 고난과 행운을 동시에 가져다 준 녀석이었다. 진우는 이번에도 고난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행운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두 사람을 태운 무중력 트럭이 부드럽게 땅 위로 솟아올랐다.

*  * * * *

최현과 진우는 그날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반나절 가량을 이동한 끝에 리에브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니스프리 호수 인근에는 이미 마수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헌터들에 의해 깨끗이 정리가 된 상태라 사냥을 하려면 보통 그 정도의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지금 발견한 녀석도 마나를 이용한 진우의 탐지 덕분에 그나마 일찍 발견한 편이었다.

마수를 발견한 두 사람은 놈이 있는 곳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미리 차를 세우고 기척을 죽이며 접근했다. 거리가 100m 안까지 줄어들었을 때 진우가 최현에게 천천히 뒤를 따르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혼자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진우를 발견한 리에브리는 이빨을 드러내며 사나운 표정을 짓더니 쏜살같이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수들은 다른 생물의 기척을 발견하면 본능적으로 먼저 상대에게서 풍겨 나오는 마나의 향기를 통해 수준을 탐색하고는 했다.

리에브리는 다가오는 진우의 수준을 자신보다 낮다고 판단했다. 그가 일부러 자신의 마나를 억눌러 밖으로 기미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리에브리가 50m 안까지 접근했을 때 진우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에 가했던 마나 억제를 풀면서 놈을 향해 오른 손을 뻗었다. 정신없이 돌진해 오던 녀석은 갑자기 상대에게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마나의 향기가 느껴지자 깜짝 놀라 급히 멈춰 서려고 했다. 그러나 녀석보다는 진우의 마나 통제가 먼저였다.

리에브리는 순간적으로 몸 속의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며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몇 바퀴 나뒹굴었다. 초원의 풀밭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녀석은 진우를 10m 앞에 둔 상태에서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  * * * *

최현은 지난 일주일 동안 진우가 명상을 하고 호수를 들락거리는 걸 보기는 했지만, 그가 정확하게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진우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오던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맹수도 아닌 마수가 달려오다 제풀에 넘어진 것도 그렇지만, 몸을 일으켜 세운 녀석이 진우의 10미터 정도 앞에서 몸을 바르르 떨면서 꼼작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은 그의 헌터 생활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괴한 장면이었다.

그게 리에브리를 향해 앞으로 내뻗은 진우의 손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어떻게? 순간 최현의 머리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면서 몸속에 전율이 일었다.

‘저게 진우가 요즘 연습하고 있다는 새로운 기술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황당하면서도 엄청난 기술이군.’

진우같은 최상급 헌터가 고작 최하급 마수 한 마리를 처치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까지 개발해서 상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달려드는 놈을 일격에 베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중급 이상의 마수에 대해서도 같은 기술이 먹힌다면? 더구나 혼자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팀원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그 경우에는 궁극의 기술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최현이 굳어 있는 리에브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진우가 그를 불렀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대도를 저놈 머리 위에 들어 겨누고 계셔 주실래요?”

최현은 등에 메고 있던 대도를 뽑아 리에브리 곁으로 다가가 높이 치켜들었다. 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머리 위로 솟아오른 최현의 대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수가 겁에 질려? 힘이 빠지거나 살기를 체념한 마수는 본 적이 있지만 겁에 질린 놈은 처음 보는군.’

최현의 대도를 본 리에브리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마비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놈의 몸속 마나에 대한 진우의 통제도 더욱 강해졌다. 대략 5분 넘게 벗어나려는 마수와 붙잡으려는 진우의 대립이 계속되던 끝에 결국 리에브리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듯 고개를 떨구고 체념하는 빛을 보였다.

그 순간 진우의 고개가 끄덕였다. 최현은 들고 있던 대도를 놈의 목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서걱

최현의 대도에 목이 떨어진 리에브리의 몸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무리 최하급이라지만 마수치고는 너무나 볼썽사나운 죽음이었다. 최현은 놈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피해 물러서서 대도에 묻은 피를 닦아 등에 멘 도집에 수습했다.

“연습은 성공적인 거냐?”

최현이 그렇게 묻자 진우가 약간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기는 한데 쓰면서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동감이었다. 아무리 사냥감이라고는 하지만 마수답지 않은 너무나 무기력한 죽음이었다. 최현이 마수의 죽음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들어 잡아 죽인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만약 사람에게 저 기술을 사용한다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할 것 같았다.

“동조인 거냐? 방금 쓴 기술 말이다.”

“본격적인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보적인 단계지만 일단 이 기술이 완숙해지면 그 다음으로 나갈 수 있는 바탕은 마련될 거 같아요. 궁극적으로는 주변에 있는 모든 마나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서야 하니까요.”

진우의 대답에 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면 이미 동조가 아니라 지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진우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배는 또 단순히 주변의 마나를 제어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자세한 것은 제가 확실히 동조 단계에 올라서면 타르코스 소장님이 말씀해 주신다고 했지만, 제 느낌으로는 마나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외계인들도 그 단계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내용 이외에는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훈련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 역시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들의 일대기에서 힌트를 얻어 흉내 낸 것이라니까요.”

“근데 왜 나더러 대도를 들고 놈을 겨냥하라고 했던 거냐?”

“생각보다 저항이 세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목숨이 구체적으로 위협받는 자극을 받으면 더 제어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해서요. 실제로 저항이 조금 더 세지기는 했어요.”

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에브리의 사체를 칼로 갈라 마나스톤을 꺼냈다. 리에브리의 경우 가죽이 비교적 좋은 값에 거래되는 마수이기는 했지만, 이번 사냥에서는 아주 고가의 것이 아니라면 되도록 마수의 사체는 수습하지 않기로 했다.

한 달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정에서 최하급 마수의 사체까지 일일이 싣고 다니다가는 트럭의 적재 용량이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었다.

*  * * * *

그날 저녁까지 최현과 진우는 세 마리의 마수를 더 사냥했다. 마지막에 잡은 마수는 최하급이 아니라 하급이었다.

카싸도르라는 호랑이 크기의 야행성 마수였는데, 해가 질 무렵에 어슬렁거리며 초원으로 기어 나왔다가 재수 없이 진우의 손에 걸려들고 말았다. 놈 역시 영문을 알기도 전에 꽁꽁 굳은 채로 발버둥을 치다가 최현의 칼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전문 헌터나 갓 마나를 각성한 하급 헌터들과 함께 하는 사냥이라면 마수에 대한 경험을 쌓게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기는 하구나. 사냥 실력을 키우는 데는 그 반대이겠지만 말이다.”

최현의 말에 진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 사냥을 위해서 연마하고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지금은 최현이 있으니 연습 삼아 아예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수들의 목을 치는 것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혼자서 사냥할 경우에는 이렇게 완전히 정지시켜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검이나 활을 사용할 때에 아주 잠시라도 상대의 몸을 굳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연습이 아니라 진짜로 사냥을 할 때에는 그런 방식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  * * * *

사냥터에 나온 뒤로는 거의 모든 식사를 진우가 담당했다. 숙소에 있는 동안은 최현이 모든 것을 알아서 보살펴 줬었다. 하지만 야영을 하는 동안은 아무리 헌터 등급이 더 높다고 하더라도 진우는 최현을 말 그대로 선생님처럼 모셨다.

예전에 소현이 진우의 헌터 패드에 넣어 준 정보 중에 외계 행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요리법이 있었는데, 그걸 직접 활용해 보고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다른 행성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동물에 대한 정보 가운데, 이른바 헌터들의 행성이라고 불리는 다섯 곳의 행성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기도 했다.

“그거 냄새가 좋구나. 뭘 쓴 거냐?”

진우는 사냥 도중 나중에 요리 재료로 쓰기 위해 잡은 초식 동물의 고기를 넣고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중간에 근처 숲 속에 들어가 뜯어온 몇 가지 풀잎을 집어넣자 냄비에서 굉장히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이에르바하고 베르푸라는 풀이에요. 소현이가 준 요리 도감에 나와 있는 건데 고기 비린내를 없애는데 아주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까 시간이 없어서 고기의 피를 충분히 빼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냄새가 날까봐 넣었는데 향이 괜찮네요.”

“근데, 소현이하고는 사귀기로 한 거냐?”

“네.”

최현은 진우가 본격적으로 소현과 사귀기 전에 헌터 학교를 떠났다. 진우가 보낸 크리스털 메모리에 간간이 소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슬쩍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불빛에 비친 진우의 얼굴 표정만 보아도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헌터가 돈은 잘 번다만 자주 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 소현이도 헌터가 되기로 결심했다니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해 주겠지만, 그래도 자주 연락을 하도록 해라.”

말을 해 놓고 나니 남 얘기가 아니었다. 자신도 예전에 사귀던 여자가 아이를 배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 행성 저 행성으로 사냥을 다녔었다.

뱃속에서 아이를 잃은 여자가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의 그 후회와 절망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금도 가끔씩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을 후비는 고통을 느끼고는 했다. 최현은 진우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기를 바랐다.

공연한 이야기를 꺼내서였을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말이 끊겼다. 냄비 위에서 보글대며 끓고 있는 향긋한 스튜 냄새만이 텐트를 친 초원 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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