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95화 (95/235)

95화

“저는 헌터 대전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따로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까지 부탁을 하시는데 긍정적인 대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진우는 딱 잘라 거절했다. 본래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일부러 찾아와서까지 이러니 오히려 참가하고 싶은 생각이 더 없어졌다.

“이번 헌터 대전은 전 세계 십여 개 대기업들이 공동으로 후원하는 행사입니다. 여러 면에서 헌터와 기업들의 우호적인 관계를......”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하임 상무는 끈질기게 부탁을 했다. 아무래도 윗선에서 진우와 최현을 반드시 참가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온 것 같았다.

“지금 이 행성에 적지 않은 헌터들이 와 있지만, 상급 헌터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상급이신 두 분이 참가해 주신다면 이번 대회의 품격이 올라갈 겁니다. 더구나 한 분은 더블형 상급 헌터가 아니십니까? 필요한 조건이 있으시면 저희가 되도록 들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진우와 최현의 헌터 등급이 꼭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걸 아무나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일개 기업의 상무가 두 사람의 수준을 훤히 알고 있었다. 험프리 호텔은 다국적 기업인 험프리 그룹에서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큰 기업들은 웬만한 국가보다 나은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더니 그게 빈 말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헌터 대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 일정하고 맞지도 않고요. 오시느라 수고하셨지만 원하시는 대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나가달라는 의사표시였다. 만하임 상무는 한참 입맛을 다시더니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어나서 결국 돌아갔다.

“왜 저렇게 헌터들의 참여에 매달리는 거죠? 이미 적지 않은 헌터들이 참가 신청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진우의 질문에 최현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말이다. 많이 참가할수록 저들한테 이익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러 찾아와서까지 부탁을 하니 조금 이상하기는 하구나. 하지만 뭐 어차피 참가도 하지 않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무슨 이유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험프리 호텔만 해도 이곳 이니스프리에서는 가장 큰 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정도 되는 대기업의 상무라고 하기에는 다소 지나칠 정도의 저자세였다. 그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최현의 말마따나 진우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마수들을 상대로 한 연습은 언제 시작할 생각이냐? 명상 훈련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직접 필드로 나간다고 하지 않았니?”

최현이 개수대 쪽으로 가서 진우가 잡아놓았던 이니스프리 잉어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렇잖아도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마수들을 직접 상대하는 훈련을 시작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나는 아무 때나 상관없다. 언제든지 괜찮아.”

“그럼 내일부터 바로 시작할까요? 이곳에서도 일주일째 빌라에만 있었더니 조금 지루하기도 하네요. 굳이 시간 끌 필요 없이 생각난 김에 바로 나가봐도 될 거 같아요.”

“그럼 오늘은 험프리 호텔에 가서 근사하게 저녁을 먹고 필요한 물품도 구입하자. 어차피 주요 상점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으니까 말이다.”

최현은 말을 하면서 잉어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게 두 사람의 점심이었다.

*  * * * *

최현과 진우가 무중력 자동차를 타고 험프리 호텔로 향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진우의 헌터 패드로 화상 전화가 왔다.

“누구세... 만하임?”

“나야. 미국 뉴욕 헌터학교의 만하임이다. 기억나나?”

당연히 기억난다. 무투 대회 때 집단 전투 시합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미국 뉴욕 헌터 학교 팀의 주장이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전화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지?

“오랜만이네. 이니스프리 행성에는 헌터 대전 때문에 온 건가?”

“응. 나도 이번 헌터 대전에 참가하려고. 그런데 혹시 시간 있으면 잠시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나 지금 험프리 호텔에 있어. 언제든지 편한 시간을 잡으면 내가 그 시간에 맞추지.”

진우가 최현의 얼굴을 보았다. 화상 통화에 스피커까지 켜 놓고 있던 상태라 최현도 만하임과의 통화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 험프리 호텔로 가는 중이었으니 잠시 만날 시간은 있었다. 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있어. 우리가 지금 험프리 호텔로 가는 중인데 괜찮다면 10분 쯤 뒤에 그곳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보는 건 어떨까?”

“그래? 잘 됐네. 그럼 10분 뒤에 그곳에서 보지.”

*  * * * *

거의 1년 만에 보는 만하임은 전문 헌터가 되어 있었다. 장 페이량도 그렇고 무투 대회에서 나름 활약하던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졸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들 벌써 전문 헌터 자격증을 받은 모양이었다.

“오전에 우리 삼촌이 너를 만나러 찾아갔던 모양이더군. 헌터 대전 참가를 부탁하러 갔다가 깨끗이 거절당하고 왔다고 하더라.”

진우는 픽 웃고 말았다. 예전에 진승훈 교관이 만하임에 대해 미국 소재의 다국적 기업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오전에 자신을 도널드 만하임이라고 소개했던 험프리 호텔의 상무를 만났을 때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는데, 화상 전화를 받고서야 문득 이 녀석이 연관이 있다는 기업이 험프리 그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도널드 만하임 상무가 자기 삼촌이란다.

“응. 이니스프리로 온 건 휴식과 훈련을 겸해서 온 거였거든. 헌터 대전이 있는 줄은 포털을 타려고 상해에 갔을 때 비로소 들었어. 계획에 없던 일이라 참가할 생각이 없어. 일정도 맞지 않고.”

“흠... 내 생각에는 네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말이야. 이번 행사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다국적 기업 상당수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거든. 너도 헌터로서 앞으로 기업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참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십년 후면 포털 관리 권한이 외계인들에게서 지구인에게로 넘어오는 건 알지?”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헌터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만난 자리에서 이 녀석 자기가 무슨 기업의 대변인처럼 굴고 있었다.

진우는 그게 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만하임이 험프리 그룹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만나자마자 대놓고 다시 헌터 대전 참가를 종용받으니 괜히 만나자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할 것도 없어. 내 일정하고는 맞지 않으니까. 말했잖아. 그 일과는 무관하게 여기 온 거라고. 내 일정까지 깨면서 참가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봐, 진우. 너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야, 지난 무투 대회에서 보여준 실력 때문에 굉장히 많은 기업에서 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중급 헌터가 되었다는 건 행성 헌터라는 직업이 생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상급이라면서? 그것도 사수형과 신체형의 더블이고 말이야. 이건 엄청난 일이라고. 넌 분명히 대단한 녀석이야. 하지만 너도 기업들의 러브콜을 계속 피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앞으로 헌터에 대한 의뢰는 결국 기업들이 내는 게 대부분을 차지할 거야. 이왕이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지 않겠냐?”

말이 조금 이상했다. 칭찬인 듯하면서도 강요가 섞인 느낌이었다. 너는 대단하다. 그런데 우리는 더 대단하다. 우리가 물주니까. 그런 우리가 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 되도록 얌전히 같이 하자는 대로 말을 듣는 게 어떠냐. 대충 그런 소리로 들렸다.

“헌터는 자유직업이야. 사냥을 하는데 남의 허락을 받는 직업이 아니라는 말이야. 굳이 기업의 의뢰를 받지 않아도 사냥을 할 수 있어. 포털 관리 권한을 기업에서 가져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내가 굳이 기업의 의뢰를 염려해야 하지? 의뢰를 하지 않으면 받지 않고 나 혼자 사냥을 하면 되지.”

그러자 만하임이 쓰게 웃었다.

“이봐, 진우. 헌터가 얻은 마나 스톤이나 마수의 사체를 매입하는 건 결국 기업이야. 정부나 다른 연구소 같은 곳에서 소비하는 마나 스톤의 양은 그에 비하면 아주 적어. 이미 나라마다 발전이나 철도 같은 사업들이 거의 민간 기업에게 넘어갔다는 건 너도 알잖아. 결국 기업이 대부분의 마나 스톤을 소비하는 거야. 기업은 앞으로 헌터들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 될 거야.”

같은 말이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진우는 짜증이 났다.

“그만해라, 만하임. 나는 이번 헌터 대전에 참가하지 않을 거야. 내 결정은 네가 얘기하는 그런 거창한 일들 하고는 관계가 없어. 나한테는 다른 계획이 있고, 헌터 대전에는 별 관심이 없어. 그러니 오랜만에 만나 쓸 데 없는 이야기로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 난 바빠서 이만 일어날게. 만나서 반가웠다.”

만하임이 일어나려는 진우를 다급하게 잡았다. 진우가 조금 날이 선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자 만하임이 얼른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다른 부탁을 하자. 네가 헌터 대전에 참가하지 않을 거면 그 대신 이번 헌터 대전 기간 동안에는 사냥을 하지 않는 건 어떠냐? 만약 네가 사냥을 하지 않고 대전이 끝날 때까지 얌전하게 숙소에만 머물러 준다면,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진우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가 그저 허접한 보통의 전문 헌터였다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너는 상급 헌터잖아. 더구나 같이 있는 분도 상급이라면서? 상급 헌터들이 헌터 대전과는 무관하게 사냥터를 쓸고 다니면 다른 헌터들이 피해를 받게 돼. 대전에 참가한 헌터들 입장에서는 중급 이상의 마수를 잡아야 경쟁에 유리한데, 많지도 않은 그놈들을 네가 먼저 잡아버리면 곤란하다는 말이야. 쉽게 말해서 만약 네가 북쪽 지역으로 사냥을 나가면 그 지역에서 사냥하던 참가자들이 다른 곳보다 불리한 경쟁을 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야. 성질 사나운 헌터들과 마주치면 충돌이 생길 수도 있어. 부탁한다. 우리는 이번 헌터 대전을 무사히 마쳐야 할 이유가 있거든. 네가 좀 양보해 줬으면 좋겠다.

진우의 얼굴이 굳었다. 말은 양보라고 하지만 양보의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왜 이번 헌터 대전을 무사히 끝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걸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쉽게 말해서 그건 너희들 일이지 내 일이 아니야. 애초에 이 행성의 사냥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거야. 그걸 몇몇 기업들이 무슨 대전을 한답시고 독점해 버리면 오히려 그게 민폐인 거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부터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너희들 일에 끼어드는 거라고? 아니야. 너희들이 오히려 내 일에 끼어드는 거야. 너희들이 나 하는 일에 부당하게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한테는 그걸 요구할 권리가 있어. 하지만 너희들에게는 없지. 나 이만 간다.

진우는 찬바람이 일 것 같은 표정으로 만하임을 쏘아보고는 몸을 돌렸다. 아무 말 없이 옆에서 듣고만 있던 최현 역시 함께 일어났다. 만하임이 당황해서 다시 진우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진우가 그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말았다.

내일부터 있을 헌팅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상가들이 늘어선 지역으로 향한 두 사람은 한 시간 가량 특별한 대화 없이 리스트에 적어 온 물건을 사는 데에만 열중했다. 물건을 어느 정도 챙기고 나자 저녁 식사까지 시간이 조금 애매하게 남았다.

최현은 진우를 데리고 시원한 음료를 파는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걱정이구나. 저 사람들이 대전에 참가하지 않는 다른 헌터들에게도 보상을 약속하면서 비슷한 부탁을 하고 다닐 것 같은데 말이야.”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켜서 마시던 최현이 문득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마 모든 헌터들을 설득하지는 못할 거예요.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성향이 강하니까요. 필드에서 헌터들끼리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진우라고 해서 예상치도 않은 말썽이 생기는 걸 원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특별히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최현과 진우가 찾아가려는 와카반의 서식지는 무중력 자동차를 타고도 사흘은 계속 달려야 할 만큼 먼 거리에 있었다. 그곳은 와카반 이외에는 다른 마수들이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되도록 많은 마수들을 사냥해야 하는 대전 참가자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사냥터라고 할 수 없었다.

아마 그곳에 머물면서 수련을 한다면 헌터 대전 기간 동안 다른 헌터들과 특별히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동안 간간이 하급 이하의 마수들을 상대로 진우가 뭔가를 시험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최현이 진우를 부른 것은 그에게 새로운 형태의 마나를 가진 마수를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타르코스 소장이 진우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양한 마나에 대한 경험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그를 불러들인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헌터 대전이라는 기업 주도의 행사와 일정이 겹치고 말았다.

본인 스스로도 별 관심이 없던 행사였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방금 전에 만하임이라는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잘못하면 말썽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뭐, 웬만한 녀석들이야 덤빈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없겠지만.’

중급 정도의 헌터가 속한 팀이라면 충돌이 생긴다고 해도 별로 걱정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상급 이상의 헌터가 속한 팀과 충돌이라도 생기게 되면 어느 쪽이든 크게 다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최현은 딸기 쉐이크를 먹고 있는 진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을지 궁금하긴 하네.’

최현 자신은 남들과 충돌이 생기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경험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상급으로 올라선 실력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진우는 최상급이었다. 아마 싸움이 일어나면 다치는 쪽은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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